폴 고갱의 연인, 메테소피가드, 테하아마나

*폴 고갱의 연인, 메테소피가드, 테하아마나

인상파 화가, 폴 고갱의 연인, 메타 소피가드, 테하아마나

19세기 후기 인상파로서 빈센트반 고흐의 친구였던 화가 고갱의 연인은 누구였을까? 화가를 시작하기 전 그의 아내였던 메테 소피가드, 미술 활동을 위하여 남태평양의 식민지 타이티를 방문하여 함께 한 테하아마나, 두 번째 타이티 방문때 함께 한 파우라, 베히네, 베오호가 있다. 그녀들과 고갱이 함께 한 것들에 대하여 최대한 객관적인 자료들을 수집하여 정리해 본다.

1.화가 폴 고갱 

폴고갱([ Paul Gauguin,1848.06.07. ~ 1903.05.08. ]프랑스의 후기인상파 화가로 생전에는 좋은 평가 받지 못하였으나 오늘날에는 인상주의를 벗어나 종합주의 색채론에 입각한 작품을 남긴 화가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생의 마지막 10여년을 타히티를 비롯한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에서 생활하며 작업하였는데 이 시기 작품이 그의 대표작이 되었다.

고갱의 작품은 파블로 피카소나 앙리 마티스와 같은 프랑스 아방가르드 작가들에게 영적감성을 주었던 폴 고갱에게는 그의 부인인 메테-소피 가드와 타이티섬에서 만난 13살 소녀 테하아마나, 파우라, 베히네, 배오호(마리-로즈) 가 있다.

먼저 폴의 출생과 배경에 대해서 살펴보자.
폴고갱이 출생당시 34세였던 아버지 클로비스는 프랑스 오를레앙에서 이주한 사업가 집안 출신의 자유주의 언론인이었는데 클로비스는 신문에 낸 기고문 때문에 프랑스 당국으로부터 추방령을 받았다.

어머니 알린은 당시 22세로, 작가였던 앙드레 샤잘과 사회주의 활동가였던 플로라 트리스탕의 딸이었다.

폴 고갱의 외할머니였던 플로라 트리스탕은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라는 유명한 구호를 인류 최초로 제안한 노동 운동가였다.

알린은 이와 같은 귀족 집안에서 의식 있고 풍족한 집안에서 태어난 덕분에 평안하게 살았으나 남미 페루와 인연이 있던 트리스탕은 혁명 강연을 다니다 보르도에서 1844년 병사하였다.

폴 고갱은 외할머니를 본 적은 없었지만 깊이 흠모하였으며 그녀가 쓴 책을 평생 가지고 다닐 만큼 그의 외할머니를 존경하였다.

1850년 추방령으로 프랑스에서 더 이상 살 수 없게 된 고갱의 아버지 클로비스는 장모인 트리스탕의 연줄을 통해 페루에서 언론인의 경력을 계속 쌓고자 그의 가족을 동반하고 여행길에 올랐다.
그러나 그는 긴 항해 중에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결국 목적지인 페루에는 아내 알린과 18개월 된 폴 고갱 그리고 3살의 폴의 누나만이 도착하게 되었다.

페루에서 알린과 그의 가족을 맞이한 외종조부는 다행히 차기 대통령직이 확실한 정치인이었고 슬픔 어린 알린과 그의 아이들을 환대하였다.
덕분에 훗날, 고갱은 페루에서 보낸 유년시기를 그의 생애에서 가장 풍족하고 행복한 때로 회상하였다.
그러나 1854년 후견자이던 외종조부가 정치에서 실각하여 세력을 잃자 알린은 아이들을 데리고 다시 파리로 돌아와 바느질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고갱은 파리지역의 학교 두어 곳을 옮겨 다니다 오를레앙의 잔 다르크 학교로 편입하여 그곳에서 졸업하였다.
1867년 7월 7일에는 어머니 알린이 사망하여 생계를 책임졌고, 고갱은 파리의 증권회사에 취직하였다. 1871년, 그때 고갱의 나이 23세때의 일이다.

고갱은 성공한 파리지앵 증권 중개인이 되어 거액을 벌으며 11년을 근무하였고 미술품 거래에서도 많은 돈도 벌었다

2.고갱의 아내, 메테소피가드

고갱은 1873년 덴마크 출신의 메테-소피 가드((Mette Sophie Gad,1850년 – 1920년)와 결혼한다. 둘은 10년 동안 살면서 다섯 명의 자녀를 낳았다.

그러나 1882년 파리 증권시장이 붕괴하면서 그는 더 이상 증권 거래로 수입을 얻을 수 없게 되자 전업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그림작업에 몰두하기 시작한다.

고갱과 그의 아내 매테소피가드

증권중개인으로 풍족한 생활을 하였던 고갱의 가족은 증권시장 붕괴로 생계를 위해 고갱의 처가가 있는 덴마크 코펜하겐으로 1884년 이사를 한다.
고갱은 그곳에서 프랑스제 방수포 판매를 하였다. 그러나 덴마크어를 하지 못하는 고갱은 사업하는데 어려움을 겪었고, 덴마크 사람들은 어설픈 사업가의 방수포를 사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고갱의 방수포 사업은 실패하였다.

어설픈 고갱의 사업 실패로 가족의 생계를 떠맡은 고갱의 아내 가드는 프랑스어 강사를 하면서 근근이 생활을 유지했지만 11년이라는 시간은 너무 길었다.
게다가 집안의 생계를 맡아야 할 고갱은 적반하장 격으로 전업 화가를 하겠다고 선언하게 된다.
결국 아무런 대책도 없이 고갱이 전업화가로서 그림작업에 몰두하게 되면서 경제적으로 주저앉을 수 밖에 없었다.

가드의 프랑스어 강사수입으로는 생활이 어림없었다. 결국 살림이 급격히 기울게 되면서 가드는 더이상은 참지 못하고 손을 들면서 고갱에게 떠나달라 요구하게 된다. 결국 고갱은 1885년 파리로 돌아갔다.

이렇게 헤어지게 된 고갱부부가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1891년이었다.
게다가 1892년 폴 고갱이 남태평양의 타이티로 떠나서 그림작업에 몰두하게 되자 가드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1894년 폴 고갱에게 결별을 선언한다.
1895년 타이티에서 돌아온 고갱은 아내 메테와 정식 이혼 절차를 밟게 된다.

3.첫 번째 타이티에서 만난 여인, 테하아마나

1892년 고갱은 그리미작업에 몰두하고자 남태평양의 프랑스 식민지인 타이티를 처음으로 방문하였다.
고갱의 나이 44세 때인데, 원주민 소녀와 결혼을 한다. 어이없게도 소녀의 나이는 13세였다.

그런데다 고갱은 메테와 정식으로 이혼한 것도 아니다. 이는 당시 법률상 중혼죄에 해당할 뿐만 아니라 미성년자 약취에 해당하기 때문에 본국 프랑스라면 중형을 선고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유럽 남성이 식민지에서 벌이는 성적방종은 불문에 부치는 경우가 많았다. 일종의 도덕적 해이이다.
게다가 고갱이 타히티로 떠나갈 당시 매독에 걸려 있었는데, 19세기인 당시로서는 별다른 치료약이 없었다.
그러나 고갱은 이를 뻔히 알면서도 10대 소녀들과 성관계를 가졌으며 심지어 어린 소녀와 결혼까지 했다.

빛나는 땅. 1892

고갱은 현지에서 어린 13살의 아내를 모델로 한 누드화 <유령이 그녀를 지켜본다>를 그리는 등 그림활동을 계속했다.
그러다 고갱은 어린 원주민 아내를 아무 죄책감 없이 버리고 파리로 돌아왔다.

첫 번째로 타히티 생활을 하고 프랑스로 돌아온 고갱은 프랑스에 머물면서도 미성년자들과의 성적관계가 심각했다. 파리에서 안나 자바네스라는 동남아계 미성년자 소녀와 애인으로 동거하기도 했다.

고갱이 프랑스로 떠난 후, 테하마나는 타이티 마타이에아에 남아 타히티 남자와 결혼하여 두 자녀를 더 낳았다. 그녀는 1918 년 스페인 독감 전염병으로 사망했다.

순진한 타이티의 원주민인 그녀의 생애 동안 고갱의 아내였지만, 그와 같은 사실로 고갱의 전 아내로서 고갱의 금전이나 유산을 주장하기 위해 나서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4.두 번째 타이티방문에서 만난 연인, 파우라, 베히네, 배오호

1895년 6월 28일 고갱은 또다시 타히티로 갔다.
고갱은 두 번째 타히티 생활을 시작하며 이웃집에 거주하던 열네 살의 파우라와 동 파우라는 두 아이를 낳았는데 첫째는 딸이었고 아기였을 때 죽었다. 둘째 아들은 파우라가 홀로 길렀다.

훗날 전기작가 메튜가 타이티를 방문했을 때에도 파우라가 낳은 아들의 후손이 그곳에 살고 있었다. 고갱은 파우라에게도 아무런 금전적 유산도 남기지 않고 책임감 없이 애들을 남겨 놓고 프랑스로 떠났다.

남 태평양 타이티에선 사이클론이라는 태풍이 잦았다. 변변한 건물이 없는 섬의 원주민들은 자주 이재민이 되게 되었고 비교적 튼튼한 벽돌로 지어진 교회에 대피하기 위해 찾아왔다.

원주민과 달리 교회와 친숙했던 고갱은 태풍을 피해 임시 거주하고 있던 원주민의 미성년 딸들을 건드렸다. 식민 지배국 프랑스의 국민이 원주민에게 부린 횡포였다.
이때 베히네, 배오호(마리-로즈)와 같은 원주민 소녀들을 만났다.

고갱의 매독병은 그대로였지만 스스럼없이 성관계를 갖었으며 열네 살 소녀였던 배히네는 건강한 딸을 낳았다.

11월이 되자 고갱은 배히네가 아닌 배오호와 동거하였고 요리사와 하인을 두고 풍족한 생활을 하였다.
고갱은 타이티의 풍경과 인물을 그리고 여러 습작을 그리며 작품활동을 하며 시간을 보냈고 마르키즈의 이웃 소녀들과 사람들을 그려 나갔지만 갖고 있던 매독의 병마는 심해져 갔다.

고갱에게 항상 좋은 세월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고갱의 이런 밉다면 미운 행동을 계속하는 생활에 시샘이었던지 1902년 3월, 아마추어 화가 찰리가 주거 침입을 이유로 고갱을 고소하게 된다.

이러한 송사로 어려움을 겪는 등의 일이 벌어지게 되면서 고갱의 병세는 계속 악화되었다.
결국 고갱은 고통을 덜기 위해 모르핀에 손을 대게 되면서 약물에 중독되게 된다.
이렇게 약물에 중독된 고갱의 병세는 점점 심해져 가고 1902년 7월 동거하던 베오호는 고갱의 집을 떠나 그녀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임신 7개월인 상태였는데 11월에는 건강한 아이를 낳았지만 고갱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낮잠.1894

오랜 병마와 약물 중독에 시달리던 폴 고갱은 1903년 5월 8일 사망하였다.

고갱은 상당한 허세의 소유자였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들은 많은 감안을 해서 들을 필요가 있다.
그의 작품에 대한 설명, 그의 행동에 대한 것들은 상당히 과장된 것들이 많았고 특히 그의 미성년 어린 소녀들과의 성관계 탐닉등에 관한 것들은 많이 걸러 들을 필요가 있다.

당시 식민지의 원주민에게 대했던 비인간적인 행태등은 자랑거리였는지는 모르지만, 그렇더라도 최소한의 인본주의적인 사고방식을 갖었더라면 이와 같은 행동은 못하였을 것이다.

자기중심적이고 자기 과시욕에 뻔뻔함까지 있었던 고갱은 당시의 제국주의의 식민지에 대한 사회적 분위기가 있었다 하더라도 타히티에서 미성년 소녀들에게 했던 못된 행태들은 비난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이러한 고갱의 부족한 인성 때문에 그림의 작품성에 비해 작품의 가치와 유명도도 떨어지는 것이 당연하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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