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얀의 연인들,엘미, 아니타 귀터만, 에리에트 무레

카라얀에게는 첫 번째 아내 엘미 호르가레프가 있다.  두 번째로는 이혼녀였던 아니타 귀터만, 세 번째 아내로 오랫동안 카라얀을 지켰던 엘리에트 무레가 있다. 위대한 음악가로서 고인이 된 카라얀의 연인들에 대해서 최대한 객관적인 사항들을 정리해서 알아본다.

1. 위대한 지위자 카라얀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Herbert von Karajan, 1908년 4월 5일 ~ 1989년 7월 16일)은 오스트리아의 지휘자이다. 그는 35년간 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로 재직했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은 그리스계의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중상류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가 음악과 피아노를 시작한 것은 본인보다 상대적으로 덩치가 큰 형 볼프강 폰 카라얀과의 경쟁심 때문이라고 한다. 카라얀은 대학에 들어가기 전에 잘츠부르크의 모차르테움에서 공부했지만 건초염으로 손가락 기능 이상 등으로 어려움을 겪다가 1926년 공대에 진학하였다.

기술에 관심이 많아 엔진을 개발하는 것에 관심을 가졌지만 공대를 그만두고 빈 음대(University of Music and Performing Arts, Vienna)에 들어가게 된다.
손가락 기능문제로 피아니스트로 성공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은사인 베른하르트 파움가르트너의 조언을 받아들여 지휘자의 길을 택한 것이다.

2. 첫 번째 아내, 엘미 호르가레프

1933년 4월 나치에 입당하고 5월 두 번째 입당 절차를 밟은 후, 1934년 아헨 독일 가극장과 아헨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독일 최연소 음악 감독이 된다.
당시 상당수의 지휘자들이 나치 집권을 피해서 또는 경제난을 겪고 있던 독일을 떠난 덕을 좀 봤다고 할 수 있다.
독일을 떠난 많은 지휘자들 중에 유태인의 혈통을 갖고 있어 박해를 피해 독일을 떠난 이도 있고, 유태인이 아니더라도 나치에 반대하거나 21차 대전 후 최악의 경제 상황에 있던 독일을 떠나 경제적으로 훨씬 나은 처우를 받았던 미국 등지로 떠난 이 역시 많았다.
큰 도시였던 아헨은 음악적 환경이 좋은 곳 이었기 때문에 카라얀이 본격적으로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었으며 카라얀은 훗날 아헨에서의 시절을 자신의 생애에서 가장 행복했던 기간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는 70명이 넘는 규모의 오케스트라와 대편성 합창단도 지휘할 수 있었기 때문에 독일에서 카라얀의 이름도 빠르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같은해 여름에는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처음으로 빈 필을 지휘하게 되었다.
1937년에는 오페라 극장 최고의 빈 국립 가극장에서 지휘하였고, 이듬해에는 베를린 국립 가극장에 초빙되어 성공을 거두어 그의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1938년 드디어 독일 제국의 수도 베를린에서 국립가극장과 베를린 필에 각각 데뷔했다. 특히 베를린 국립가극장에 데뷔하면서 지휘한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어 신문에 대서특필되었다.

이 신문에서 지칭한 ‘분더 카라얀’ 즉 ‘기적의 카라얀’은 이후부터 카라얀을 따라다니는 수식어가 되었으며 이 기사는 노장 지휘자들도 카라얀에게 배워야 한다라고 오버하여 표현했는데, 이런 기사들과 발언은 당시 최고의 지휘자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등을 분노하게 하여 평생 카라얀과 라이벌 아닌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게 하여 카랴얀이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가 되는데 있어 상당한 걸림돌이 되었다.
당시 카랴얀의 이 성공을 발판으로 베를린 국립 가극장의 정식 음악 감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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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4월 메이저 무대에서는 신인이나 다름없는 카라얀이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도 데뷔하였다.
카라얀은 베를린 필을 처음 지휘한 순간 베를린 필이야말로 자신이 원하는 이상적인 소리를 낼 수 있는 유일한 악단임을 느꼈다고 훗날 술회했다.

 

그해 7월, 아헨에서 알게된 11살 연상의 오페레타 가수 엘미 호르가레프와 결혼하며 그녀는 카라얀의 첫 번째 아내가 된다. 1935년에 슈트라우스의 “박쥐” 공연을 통해 처음 만난 3년 후의 일이지만 1942년에 이혼한다
엘미는 카라얀이 아니타와 두 번째 결혼한 이후에도 그녀는 재혼하지 않고 혼자 살다가 심부전증으로 1983년에 사망했다.

3.두 번째 아내, 아니타 귀터만

아헨의 수석 지휘자 자리를 그만 두게 되는 1942년, 재봉틀용 원사를 제조하는 재력자 집안 출신의 이혼녀 아니타 귀터만과 두 번째 결혼을 하게 되며 둘은 15년간 부부로 살다가 1958년에 이혼했다.

그녀는 카라얀 보다 9살이 어리고 할아버지가 유태인이었다고 한다.

카라얀은 후에 아니타와 결혼하기 위해서 나치당에서 탈퇴했다고 주장했으며 그녀 때문에 카라얀은 나치당 내부에서 활동에 일부 제약을 받기도 했다.
카라얀을 격찬했던 괴벨스(나치정권의 최고의 선전가)는 카라얀이 결혼할 당시 혈통조사를 방해했다고 한다.

2차 대전 직후 묘하게도 아내의 유대인 혈통이 카라얀에 대한 나쁜 여론을 어느 정도 희석시켜 주는 전화위복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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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얀은 나치 덕택으로 출세 하였지만, 1945년 5월 독일이 패망하자 결국 나치의 희생물이 된다.

카라얀 부부는 전쟁이 끝날 즈음 밀라노에서의 콘서트를 핑계로 아내와 베를린을 떠난 후 종전 할 때까지 귀국하지 않고 밀라노와 인근 북부에서 거의 감금된 상태로 지내게 된다.

카라얀 부부가 감금되다 시피하며 투숙했던 밀라노의 호텔에 민병대가 호텔을 습격하는 바람에 거의 알거지가 되어 거리에 나앉을 위기에 이탈리아 음악 애호가의 호의로 그의 집에 머물게 되며 아니타가 영어 통역을 하면서 겨우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카라얀은 이탈리아어와 음악 악보를 매우 열심히 공부하면서, 지휘 자리를 알아봤는데 여의치 않았으며.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꽤나 능숙하게 이탈리아어를 구사할 수 있을 정도로 열심히 공부하였다고 한다.
종전 후 카라얀 부부는 고향인 잘츠부르크로 향했는데, 기차 안에서도 통역을 하여 여비를 벌기도 하고, 중간 경유지의 극장에서 지휘를 해서 여비를 마련하기도 했을 정도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이러한 어려움을 겪으며 아니타와의 두 번째 결혼 생활도 비교적 원만했지만, 1958년 이혼하게 되는데, 아니타가 아이를 갖지 못하는 이유가 크게 작용했고, 새로운 연인 엘리에트 무레를 만났기 때문이 가장크게 작용했다.

이후에 다루어지게 되는데 엘리어트 무레는 언젠가는 카라얀과 이어질 것이라고 믿으며 수 년간 기다려왔는데 무레의 이러한 노력도 이혼에 크게 작용했다 한다.

4.세 번째 아내, 엘리에트 무레

1958년 10월 카라얀은 프랑스 모델 출신의 금발 여성 엘리에트 무레(Eliette Mouret, 1939~ )와 세 번째로 결혼하였다.


그녀는 18세 때 크리스챤 디올(Christian Dior)의 눈에 띄어 국제 모델 경력의 토대를 마련했으며 모델이 되기 전까지 프로방스에서 평온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크리스찬 디올에 의해 그녀의 긴 다리로 알려져, 디올의 하이 패션 사진 촬영과 패션 쇼에서 유럽의 여러 패션 중심지에서 모델로 활동했다.

디올을 만나기 1년전 친구의 요트에서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을 처음 만났것으로 알려졌는데 이 날, 무레는 연이은 멀미를 일으키는 감기를 앓아 해변으로 호송하는데 무레에 반한 카라얀이 이 일을 도맡아 처리했다.


오랜 후 1955년에 런던 음악회에서 다시 만났을 때 쯤 무레는 그대로 마에스트로 카라얀에게 마음을 빼았겼는데 이 때의 무레는 안나 즈아우스트와 결혼 생활 중이었다.
이 후부터 무레는 결혼생활중 임에도 카라얀의 음악여행을 동행하기 시작했으며, 무레와 남편 즈아우스트와의 이혼이 1958년에 이루어지지자 마자, 허베르트 폰 카라얀과 10월 결혼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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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그녀의 패션 모델로서의 경력은 끝나고 ‘마에스트로 아내’로서의 삶이 시작되었으며, 둘 사이에서는 두 딸인 이자벨(1960)과 아라벨(1964)이 태어 났다.

그녀는 허베르트 폰 카라얀의 세 번째 아내로, 그들은 그가 사망할 때까지 결혼 생활을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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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에트와의 세 번째 결혼은 적어도 겉으로는 화목하게 유지되었고, 엘리에트는 비록 음악에 대한 깊은 지식은 없었지만 카라얀을 열심히 내조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이혼한 아니타와도 계속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것 같다.


이후 결혼 생활 대부분인 30년동안 카라얀의 일에 연관된 여행을 하는 데 시간을 보냈는데 그의 여행 일정과 공연을 맞추며 가능한 한 그를 음악계의 부담스러운 측면으로부터 보호하려 노력했다.
카라얀은 그녀의 이러한 판단을 높이 평가했는데, 훈련받은 음악가나 전문 음악가가 아니었음에도 “단순한 음악 애호가”로서, 그녀가 음악대중과 음악 소비자를 더 잘 파악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카라얀이 사망한 후, 엘리에트는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센터(Herbert von Karajan Centre)를 비엔나에 설립하여 카라얀의 음악적 유산을 이어갔고, 현재는 잘츠부르크에서 엘리에트 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인스티튜트(Eliette and Herbert von Karajan Institute)를 운영하며 젊은이들의 음악적 발전을 위한 후진양성을 하고 있으며, 잘츠부르크 부활절 축제의 후원자인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5.지휘자인 인간으로서의 카라얀

카라얀은 평생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 자리를 염원해왔으며 이를 놓치지 않기 위해 기를 쓰고 노력했다. 카라얀은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살인이라도 저질렀을 것이라고 훗날 말한 적도 있다.

그토록 염원했던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가 될 수 있는 기회였던 베를린 필과 미국 순회공연을 떠나기 직전에 카라얀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카라얀은 상임지휘자의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촌각을 다투면서 노력하고 있었던 중이었을 때 위중한 어머니를 한 번도 찾지 못했다.

카라얀은 종종 아주 가까운 지인들에게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얼마나 슬펐는지에 대해 훗날 이야기했다고 전해진다.

카라얀은 1984년 11월 일본을 거쳐 내한 공연을 가졌다.

내한 당시에 카라얀 부인인 엘리에트가 지갑을 잃어버렸는데, 예상치 않게도 지갑을 되찾게 되어 한국에 대해 매우 호의적인 감정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반면 내한 당시 카라얀은 리허설을 외부인이 몰래 참관하는 일이 발생하게 되면 공연을 취소하겠다고 엄포를 놨다고 한다.

카라얀은 1989년 4월 24일 건강상의 이유로 베를린 필의 종신 상임지휘자직에 대해 사의를 표명했는데 이는 카라얀 특유의 승부수로 보는 시각이 많다.

하지만, 카라얀이 사표를 던진 바로 다음날 베를린 주정부는 언론을 통해 카라얀의 사임을 공식 발표하며 뜻밖에 사표를 수리해 버렸다.

카라얀이 사표를 던진 직후 카라얀을 지지하는 일부 베를린 필 단원들이 카라얀 자택까지 찾아왔지만 끝내 카라얀은 그들을 만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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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같은 해 7월 16일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의 가면무도회 공연을 위한 리허설 기간 중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숨을 거둔다.
이 때 그의 자택에는 부인 엘리에트는 산책을 나갔다가 들어와 씻던 중이고, 그는 절친한 친구와 음반 발매와 CD 공장에 대한 논의를 하고 있었으나 전날부터 좋지 않던 심장을 걱정한 주치의가 심전도계를 가지고 왔음에도 “중국 황제가 와도 방해할 수 없다”며 돌려보냈고, 이게 화근이 되어 심장마비로 사망하였으며 며칠 후 자택이 있는 아니프 인근 성당에 매장되었다.

카라얀의 지휘를 최고라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다. 그의 상업주의나 나치전력등을 이유와 그의 다이나믹한 음향 또는 세련된 음향. 그리고 청중을 사로잡는, 현악의 마술사 등과 같은 이유등이다.

카라얀은 클래식계에서 내로라 할 만한 거장이었다.

카라얀-크랑크로 불리는 극도의 팬들과 극도의 안티가 공존한 거장으로서 음의 세공사 정도로 비유가 맞을 것이다.


즉 카라얀은 베토벤, 브람스, 바그너, 차이코프스키, 비발디, 모차르트, 말러 등 대부분의 오페라와 교향곡들을 본인이 설정한 가장 표준적 규범에 맞춰서 연주한 지휘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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