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센트 반 고흐의 연인,아고스티나 세가토리

빈센트 반고흐의 초상화

빈센트 반 고흐(Vincent Willem van Gogh, 1853.3.30~1890. 7.29)는 네덜란드의 후기 인상파 화가로 서양 미술사에서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인물이다.

그가 사랑했던 연인은 누가 있었을까? 괴팍한 성격과 평생 따라 다닌 고통스러운 정신세계 때문에 그가 사랑한 여인이 없었던 것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그에게도 사랑 했던 여인이 있었다.

빈센트가 17세 때 그의 큰아버지가 헤이그의 구필 앤 씨(Goupil & Cie)화랑에 취직을 시켜준다. 20세 때인 1873년에는 구필 앤 씨 런던 지점으로 옮긴다.


빈센트는 이때 아버지보다 더 많은 돈을 벌고 있을 정도로 일에서 성취감을 느꼈다. 성년을 넘어 성숙해진 빈센트는 하숙하던 집주인의 딸인 외제니 로이어(Eugénie Loyer) 에게 푹 빠졌다.


그러나 외제니 로이어는 이미 전에 하숙하던 사람과 비밀리에 약혼했던 탓에 빈센트의 고백을 거절했다. 거절에 충격을 받은 이후 빈센트는 자신을 홀로 자신의 세계에 가두고 종교에 심취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그만의 고통스런 정신세계가 본격적으로 나온 것이다.

외제니 로이어 이후의 여인이 있었는데, 그 여인은 유명한 모델이면서 카페 주인이었던 아고스티나 세가토리였다.

물론 그들은 결혼하지 않았고 고흐는 평생 결혼하지 않고 평생을 보낸다.

세월이 흘러 고흐가 권총으로 자살을 한 후 고흐의 작품과 편지를 관리하고 번역 출판을 한 여인이 있다. 그녀는 반 고흐의 동생 테오의 아내, 조안나 봉거이다.

비록 고흐가 죽고 난 후이지만 현대에 고흐의 작품과 편지를 온전히 대할 수 있는 건, 모두 그녀 덕분이다.

1. 고흐의 연인, 아고스티나 세가토리

아고스티나 세가토리(Agostina Segatori.1841-1910)는 이탈리아의 안코나에서 태어났다.
아고스티나는 유명한 모델이었다. 그녀는 화가 Jean-Baptiste-Camille Corot이 모델이 되어 주기도 했다.

1884년 파리의 화가 에드워드 단탄(Edward Dantan)과 관계를 맺을 때까지 그녀의 삶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은 없으며, 반 고흐를 만날 때는 파리에 있는 카페 탐부린(Café Tambourin)을 운영하고 있었다.

아고스티나 세가토리의 사진

빈센트는 파리에서 활동하면서 본인의 작품을 전시할 곳을 찾고 있었는데 마침내 그의 작품을 더 많은 청중에게 전시할 곳을 찾은 곳이 아고스티나의 카페 탐부린(Café Tambourin)이었다.


탐부린 카페는 예술가, 작가, 비평가들에게 인기를 끄는 곳이었고, 카페의 벽은 자주 드나드는 예술가들에 의해 작품으로 장식되었다. 빈센트는 카페에서 전시회를 열은 후 카페의 단골이 되었다.

아고스티나는 1886년부터 1888년까지 파리에 살았던 빈센트 반 고흐와의 관계로 1887년 봄에 오히려 유명해졌다.

빈센트는 이 기간 동안 그의 형제들과 함께 살았기 때문에 그녀와의 관계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다.


다만 당시 둘의 관계에 대한 정보는 빈센트의 가장 친한 친구 중 한 명인 화가 에밀과 폴 고갱(Paul Gauguin)에 따를 수 밖에 없는데,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빈센트는 아고스티나를 많이 사랑했다고 한다.

아고스티나는 화가인 빈센트에게 그림에 대한 영감을 주게 되어 빈센트는 아고스티나를 모델로 하여 초상화 두 점을 그렸다.

하나는 탬버린을 가진 여인이고 다른 하나는 이탈리아 여인이다.

이탈리아 여인

아고스티나는 그녀의 시대에 진보적이고 현대적인 여성이었다. 카페운영으로 돈을 벌면서 재정적 자랍을 함으로써 독립심이 강했고, 그 당시 예술가들에게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작품을 전시할 수 있는 장소를 제공했다.

그 중 빈센트 반 고흐에게도 장소를 제공하게 된 것을 계기로 두 사람은 잠시 교제했으며, 관계는 급속히 진전되었다.

빈센트가 그린 아고스티나의 초상화를 보면 아고스티나의 생활상을 알 수 있다.

아고스티나는 탬버린 모양의 테이블의 의자에 앉아 있다. 탁자 위에는 맥주잔이 있고 맥주잔 밑의 접시들이 있는 것은 그녀가 술을 즐겨 마신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손에는 피우던 담배를 들고 있는 걸로 봐서 흡연을 하는 여성이었던 것이다.

반 고흐가 그린 카페에 앉아 있는 아고스티나

지금과 달리 당시에는 여성의 음주와 흡연은 예술가나 매춘부들이 하는 것으로 치부되고 있어 보편적이지 않았고 적절하지 않는 행위라고 여겨졌다.

그림에서 나타난 것과 같이 아고스티나는 그 시대에 보편적으로 볼 수 있는 그런 여성이 아닌 개방적인 성격을 가진 여성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아고스티나의 성격은 빈센트와의 짧은 기간 동안의 만남이지만 보수적인 빈센트와 헤어지는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한 것이다.

불행하게도 이러한 인식의 차이와 같은 이유들로 둘은 사이가 나빠졌고, 1887년 7월 헤어졌다. 불과 1년도 되지 않은 짧은 기간동안의 만남이었다.

이후 아고스티나는 재정적 상태가 어려워져서 카페가 파산되게 되었다.

이때 빈센트는 카페에 보관되어 있는 본인의 그림을 돌려받기를 원했지만 아고스티나는 이미 빈센트의 그림까지 포함해서 팔아버렸고, 빈센트는 그림을 돌려 받지 못하게 되자 아고스티나에게 크게 실망했다.

빈센트에게 있어 짧은 기간동안의 만남이었지만 유일한 여인었던 아고스티나 세가토리는 카페 르 탬부린이 파산하는 등 여러 차례 좌절을 겪은 후 1910년 파리에서 사망했다.

한편, 빈센트는 아고스티나와 헤어진 그해 가을, 새로운 예술촌 건설을 꿈꾸고 폴 고갱과의 공동생활이 시작되었으나 성격차이가 심하여 자주 다투고 순조롭지 못하였다.


12월 빈센트는 급기야 정신병 발작을 일으켜 고갱과 다툰 끝에 면도칼로 자신의 귀를 잘라버리는 충격적인 자해를 가했다.


심지어 그는 사창가에 있는 매춘부에게 자신의 왼쪽 귀 조각을 건네 매춘부를 깜짝 놀라게 했다.
매춘부의 신고를 받은 경찰은 고흐를 생 레미의 한 정신병원으로 이송하여 치료를 받게 했다.

1890년 봄 파리 근교의 오베르에 정착해서 한때 건강이 회복되어 그림을 그리는 등, 발작의 불안에서 벗어나는 듯하였으나 1890년 7월 27일 다시 정신병이 도져 결국, 권총으로 자살을 시도했는데 이틀 후인 29일 사망했다.

일각에서는 의문을 제기하며 타살설을 주장하기도 하는데 근거가 빈약하다.

2.빈센트 반 고흐의 여인, 조안나 봉거

조안나 봉거(Johana(jo) Van-Gogh Bonger,1862~1925)는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났으며 빈센트가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빈센트의 동생 테오도 죽었다.

조안나가 테오와 결혼(1889.4.17)한지 2년후 의 일이다.
그녀는 갑자기 자신과 아들을 부양해야 했다. 그녀에게는 한 살이 안 된 아들과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 수백점이 남았다.


요한나는 테오를 만나기 전,고등학교에서 영어교사를 했으며, 프랑스어, 네덜란드어를 할 수 있는 재원이었다.

 조봉고의 이미지

그녀는 빈센트의 그림을 팔고, 사람들에게 빈센트의 그림이 훌륭함을 알리기 시작했다.
테오와 친분이 있던 미술계 사람들에게 빈센트의 작품을 소개했고, 급기야1892년 네덜란드의 큰 화랑에 빈센트의 그림을 전시하는데 성공한다.


빈센트가 죽은지 15년째인 1905년, 스데델리크 뮤지엄에서 무려 484점의 작품을 전시한 대규모 회고전이 열렸다.
이 회고전에는 유럽 전역에서 많은 평론가들이 찾아왔고 고흐는 화가로서 거장의 반열에 올랐다. 이 회고전이 열린 다음부터 빈센트의 작품 가격이 2~3배 올랐다고 한다.

1914년, 그녀는 빈센트가 테오에게 보낸 편지를 모은 편지집을 출판했다. 이제 모든 사람들이 빈센트의 생각, 빈센트의 꿈에 대해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더 많은 사람들이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을 감상하기 시작했으며 그녀가 1925년, 죽었을 때 빈센트의 작품은 세계적으로 유명해져 있었다.

​3. 빈센트 반 고흐의 어머니


빈센트의 어머니는 아나 코르넬리아 반 고흐가르벤튀스(Anna Cornelia van Gogh-Carbentus, 1819~1907)이다. 빈센트의 어머니는 헤이그의 부유한 가정 출신이었고, 신앙심이 깊은 여성으로, 주변에 항상 가족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빈센트의 아버지는 목사였기 때문에 적은 봉급을 받았지만, 부임한 교회에서 가족에게 집, 하녀, 요리사, 정원사, 마차, 말등을 제공했다.

이런 비교적 풍족한 생활여건은 빈센트의 어머니가 자녀에 대한 양질의 교육을 할 여유가 되었다. 그녀는 아이들이 노래하고 공예품을 만들고, 책을 많이 읽도록 격려하고 교육했다.


빈센트는 어린 나이부터 그림에 관심을 가졌는데 어머니로부터 집에서 첫 그림 수업을 받았다. 화가로서의 자질을 발견한 그의 어머니는 빈센트에게 그림을 그리라고 권유했는데, 그 권유에 따라서 빈센트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빈센트의 초기 그림들은 후대의 그림에 많이 미치지는 못하지만 표현력이 풍부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빈센트가 그림에 대한 기초를 닦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빈센트가 점점 커가면서 화랑에 취업을 하게 되는데 빈센트는 잘못된 여성들에 빠진다.
즉 빈센트가 하숙하던 집주인 딸, 그의 친조카, 그리고 전직 매춘부에게 빠져들었다. 그래도 빈센트의 어머니는 빈센트를 포기하지 않았고 그를 돌보았다.


1884년, 빈센트의 나이 21살 때 그의 어머니가 다리가 부러져 병상에 있을 때에는 어머니의 기운을 북돋우기 위해 마을에 있는 교회에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빈센트는 프랑스로 이사한 후에는 그의 어머니에게 안부 편지를 자주 보내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걱정을 덜어주고자 했고 1889년에는 어머니에게 몇 개의 그림작품들과 예술품을 우편으로 보냈기도 했지만 불행하게도 빈센트와 그의 어머니는 다시는 서로 만나지 못했다.

그의 어머니가 방문하기 전에 빈센트는 자살로서 생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빈센트의 어머니 아나 코르넬리아 가르벤튀스는 빈센트가 어릴 때부터 그를 후원하고 보살폈지만 빈센트는 그의 어머니의 바램과 달리 결국 자살로서 생을 마감하게 되면서 그녀의 가슴에 짙은 멍을 남기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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