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타프 말러의 연인(3/3), 앨마 쉰들러

사랑꾼 말러와 연애에 일가견 있는 앨마 쉰들러의 러브스토리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1860. 7. 7. – 1911. 5. 18)는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고전음악과 모더니즘 음악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한 낭만주의 작곡가이자 지휘자이다.

지난 두 글에서 말러의 첫사랑은 짝사랑으로 끝을 맺은 요한나 리히터와의 사랑이야기와 친구인 베버의 아내를 넘보다 겨우 체면을 유지한 채, 라이프치히를 떠나 비엔나로 오게 된 사연을 살펴보았다.

타고난 음악적 재능에다가 준수한 외모와 독특한 지휘 스타일, 그리고 그동안 익혀진 연애 테크닉은 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그의 러브스토리 속으로 들어가 보자.

말러의 독특한 지휘 스타일 이미지

1901년 11월, 비엔나의 한 사교 모임에서 화가 칼 몰(Carl Moll)의 의붓딸인 앨마 쉰들러(Alma Schindler)를 만나게 된다.

앨마 쉰들러는 말러만큼이나 연애에는 일가견이 있던 여성이었다. 그녀는 유명한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와 사랑에 빠지게 되지만 곧바로 헤어지게 된다.이유는 간단했다. 독특한 화가 클림트가 지루했다는 이유이다.

그런 앨마에게 말러가 접근한 것이다. 말러는 육감적인 몸매를 가진 앨마를 보고 한눈에 반했다. 말러는 단도직입적으로 앨마에게 데이트요청을 했다.

앨마는 말러를 경계했다. “그와 오페라에서 노래하기를 열망하는 모든 젊은 여성에 대한 스캔들” 때문에 처음에는 말러를 만나는 것을 꺼려했다”고 나중에 회상했다.

이런 경계심을 가지고 말러를 대했지만 앨마는 말러에게 호기심이 발동하여 그를 만나기로 동의했다. 이 만남은 말러의 급속한 구애로 이어지게 된다.

1. 말러와 연애꾼 앨마 쉰들러와의 만남

앨마 쉰들러(Alma Maria Schindler, 1879–1964 )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작가, 편집자 및 사교계 명사였다. 어린 시절부터 음악적으로 활동한 그녀는 성악과 피아노를 위한 약 50곡을 작곡한 실력있는 작곡가였으며 다른 장르에서도 탁월한 실력을 발휘했다.

알마 쉰들러는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부유한 카톨릭 집안에서 음악과 미술가정교사를 받으며 자라났다.

앨마 쉰들러의 이미지 사진

앨마는 말러를 만나기 전에 칼 몰(Carl Moll)을 통해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를 만났다. 클림트와 앨마는 사랑에 빠졌다. 처음에는 앨마가 클림트에 관심이 있었지만 사랑의 열정은 금방 식어버렸다. 결국 둘은 친구로 지내기로 했고 클림트가 죽을 때까지 친구사이로 지냈다.

1900년 가을, 앨마는 알렉산더 폰 젬린스키(Alexander von Zemlinsky)와 함께 작곡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젬린스키와 앨마는 사랑에 빠졌고 그들의 관계를 비밀로 유지하기로 하며 연애관계를 유지했다.

앨마는 잼린스키와의 관계가 비밀이어서인지 다소 못생긴 잼린스키의 특징에 대해 놀리면서 그를 대신할 “다른 남자 열 명은 쉽게 구할 수 있다고 말을 자주 했다

또 잼린스키와 결혼한다는 것은 “키가 작고 타락한 유대인 아이들을 세상에 데려온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하며 놀렸다.

장난도 자주 하면 진실이 되는 듯 둘의 관계가 긴장되면서 젬린스키는 그녀를 점점 멀리하기 시작했다.

이런 상태이던 1901년 11월 7일, 에밀 주커칸들(Zuckerkandl)의 살롱에서 장난스럽게 말러를 처음 만나게 된 것이다.

앨마는 이미 잼린스키와의 연인관계가 있고 들은 소문이 있어 말러를 경계하였지만, 장난스럽게 말러를 만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장난으로 끝나지 않는다.

앨마는 말러와 본격적으로 연애를 시작했다. 연애꾼은 연애꾼을 알아본다고 했던가. 말러는 준수한 외모와 애정행각의 경력으로 여자를 다룰 줄 알았다.

여성 편력에 남주기 아까울 정도로 능력을 갖고 있었으며 남자로서의 매력은 앨마를 비롯한 뭇 여성을 매혹시키기에 충분했다.

이에 못지않게 타고난 음악실력에다 구스타프 클림트와 구애를 저버리고 잼린스키를 가지고 놀 정도의 연애실력을 갖춘 앨마 쉰들러였다.

둘은 12월 8일, 비밀리에 약혼했다. 그리고 12월 12일이 되어서야 약혼사실을 잼린스키에게 편지로 알리고 이별을 통고했다.  

12월 23일에 공식적으로 약혼을 발표했다. 그리고 만난 지 5개월 만인 1902년 3월 9일, 앨마 쉰들러는 비엔나 궁정 오페라의 감독이었던 구스타프 말러와 결혼했다.

앨마 쉰들러의 이미지 사진

당시 앨마는 이미 첫 아이인 딸 마리아 안나를 임신하고 있었다. 둘째 딸인 안나는 1904년에 태어났다. 첫째 딸 마리아는 1907년 디프테리아로 사망한다.

말러와 앨마를 아는 사람들은 둘의 결혼한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리고 두 사람의 정신을 의심했다. 어떤 이는 말러를“타락한 장애 유대인”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말러의 가족은 앨마를 “경솔하고 신뢰할 수 없으며 젊은 남자를 좋아하는 바람기 많은 여자”라며 탐탁지 않아 했다. 나중의 앨마의 행동을 보면 일면 이해가 가는 예측이었다.

2. 권위주의적 성격의 말러와 자존심의 앨마

두 사람은 태생부터 달랐다. 그리고 두 사람은 음악적 견해에도 의견 차이를 보이며 갈등을 빚었다.
말러는 천성적으로 변덕스럽고 권위주의적이었다. 구스타프는 앨마의 작곡에 관심이 없었고 음악적 재능에도 관심이 없었다. 이미 그는 사회적 음악적 명성으로 재정적 안정을 이룬 상태였다.

말러는 앨마가 작곡을 그만두기를 바랐다. 말러는 앨마의 가족 중에 작곡가는 앨마 한 명뿐이므로 재능에는 한계가 있다며 음악 공부를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앨마는 말러의 주장에 분개했다.

앨마를 말러에게 강하게 어필했다. “작곡가의 역할, 노동자의 역할은 모두 본인에게 달려 있다. 당신의 역할은 사랑으로 감싸주어야 할 동반자이자 이해심 많아야 할 파트너다. 나는 아주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지 않다.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성공할 수 있다.”

결혼 생활이 자신의 창작 활동을 중심으로 되어야 한다는 말러의 요구는 앨마의 반감을 사서 긴장을 불러일으켰고 갈등을 촉발시켰다.

이런 갈등에도 불구하고 둘의 결혼생활은 말러의 앨마에 대한 상당한 애정으로 표현되며 앨마를 달랬다.

이같은 표현의 방법으로 부부간의 갈등을 해소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그들의 가족을 그가 마련한 작곡 오두막집으로 휴가를 데리고 갔다. 그런데 도착하자마자 두 딸은 성홍열과 디프테리아에 걸리게 되어 큰 딸 마리아는 결국 사망하고 만다.

딸의 사망으로 둘은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 이때의 심적 타격으로 말러는 자신의 심장에 결함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앨마는 심한 우울증에 걸린다.

앨마와 그녀의 두딸 사진

마리아의 죽음으로 우울증에 빠진 앨마는 1910년 6월, 스파에서 휴식을 취하던 중 젊은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를 만나 불륜을 시작한다.

그러나 얼마안가 말러가 앨마와 그로피우스의 관계를 알게 되어 충격을 받지만, 앨마의 우울증의 심각성과 발터의 위로가 앨마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결국 말러는 앨마의 음악적 창작활동에 진지한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그리고 결혼 초기에 가졌던 앨마의 음악창작활동에 자신이 보여줬던 경멸적인 태도를 후회하고, 본격적으로 앨마의 작곡한 음악에 대해 홍보하는 등의 조치를 취한다

어느 정도 관계를 회복한 말러와 앨마는 1910년 10월 말 뉴욕으로 돌아왔고, 그곳에서 콘서트와 투어로 바쁜 필하모닉 악단일에 전념했다.

3. 말러의 급작스러운 죽음과 앨마의 예술적 활동

그러나 1910년 크리스마스 무렵부터 말러는 건강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했다. 목이 아프기 시작했고, 그 증상은 그치지 않고 계속되었다.

다음 해인 1911년 2월, 몇 년 전에 진단된 심장 결함과 관련된 감염으로 중병에 걸리게 된다. 결국 구스타프 말러는 5월 18일에 사망했다. 그의 나이 51세의 짧은 인생이었다.

말러는 그가 요청한 대로 그린징 묘지에 그의 딸 마리아 옆에 묻혔다. 그의 묘비에는 그의 이름만이 새겨졌다. “나를 찾으러 오는 사람은 내가 누구인지 알 것이고 나머지는 알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라는 이유다. 의사의 권고에 따라 앨마는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구스타프가 죽은 후 앨마 쉰들러(Alma Maria Schindler)는 불륜의 연인이었던 그로피우스와 즉시 연락은 재개하지 않는다.

대신 1912년에서 1914년 사이에 그녀는 그의 그림인 를 포함하여 그들의 관계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을 만든 예술가 오스카 코코슈카(Oskar Kokoschka)와 또 다른 불륜관계를 시작한다.

오스카가 그린 앨마 쉰들러

그러나 코코슈카의 소유욕은 앨마에게 마음에 상처를 입혔고 두 사람의 감정적 변덕은 모두를 지치게 했고, 제1차 대전이 발발하자 코코슈카는 입대를 한다.

앨마는 그로피우스에게 다시 연락하여 만나게 되어 1915년에 결혼한다. 앨마는 이에 그치지 않고 그로피우스가 군복무로 집을 비우자 앨마는 프란츠 베르펠(Franz Werfel)을 만나 또 다른 관계를 시작했다. 놀라운 애정 행각이다.

1918년 앨마는 임신을 하게 되는데 아이의 생부가 누구인지 그로피우스와 다투며 이혼에 합의한다. 그리고 베르펠과 공개적으로 동거를 시작하여 1929년에 둘은 결혼하게 된다.

이후 그들은 로스앤젤레스에 정착했고, 그곳에서 앨마는 많은 예술가들과 함께 교류했다. 미국에서 작가로서 어느 정도 명성을 누렸던 베르펠은 소설을 출간하여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었지만 심장질환으로 1945년 캘리포니아에서 사망했다.

앨마 쉰들러는 1964년 12월 11일 뉴욕에서 사망했다. 그녀의 나이 85세였다. 1965년 2월 8일에는 그린칭 공동묘지의 말러와 몇 발짝 떨어진 곳에 있는 딸 마농 그로피우스와 같은 무덤으로 이장하여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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