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타프 말러의 연인(1/3), 요한나 리히터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1860. 7. 7. – 1911. 5. 18)는 오스트리아 보헤미아 출신의 낭만주의 작곡가이자 유명한 지휘자 중 한 명이다. 작곡가로서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으로 대표되는 19세기 고전학파 음악과 20세기 초의 모더니즘 음악사이의 중간 가교 역할을 했다.

구스타프의 아버지인 베른하르트 말러(Bernhard Mahler)는 행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마부가 되었고, 나중에는 돈을 많이 벌어 여관의 주인이 됨으로써 작은 부르주아 계급의 지위에 올랐다.

이런 가난한 유대인 출신의 부모에게서 태어난 말러는 어린 나이에 음악적 재능을 보여주었고, 자수성가한 아버지 덕에 조기에 음악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한때 한국 클래식 애호가들이 사랑했던 구스타프 말러가 20살의 어린나이에 사랑을 시작하였지만 실패하고, 음악적 성장과 함께 이성에 대한 연애기술도 같이 성장하게 되어 그 깊이를 더해간다.

그의 연인들이 그의 음악에 어떤 영향을 끼쳐며 무게를 더해가는지, 구스타프 말러의 러브스토리 속으로 들어가 보자.

1. 말러의 첫 번째 사랑 요한나 리히터

구스타프 말러의 음악 작품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건은 육감적으로 매력 있는 가수 요한나 리히터(Johanna Richter)와의 만남으로부터 시작된다.

구스타프의 음악적 성장의 과정을 우선 살펴보면, 네 살의 어린 구스타프가 어느 날 할아버지 집에 있는 피아노를 우연히 발견하고 신이 나서 연주해 보게 되는데 피아노 신동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그의 재능을 키워보겠다고 마음먹은 구스타프의 부모들은 지역학교에서 음악 조기교육을 시키게 되고 10살 때에는 마을극장에서 대중 앞에서 첫 공개연주를 했다.

급기야 그의 천재성은 18세의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비엔나음악원을 졸업한 후에는 비록 보조직이지만 오페라 극장에서 지휘자직을 잇달아 맡게 된다.

1883년 그의 나이 23세, 그가 처음으로 여인을 만나게 되는 계기가 생긴다. 1월 초 체코의 올로모우츠에 있는 시 왕립극장의 지휘자를 맡아 훌륭히 역할을 마무리하고, 8월부터는 독일 중부에 있는 카셀시의 헤센 마을에 있는 왕립 극장의 음악 및 합창 감독과 함께 악단의 부지휘자 역할을 맡게 된다.

말러가 카셀에 도착하여 부지휘자의 역할을 맡자마자 육체적으로 매력적인 요한나 리히터(Johanna Richter)를 만나게 된다.

둘은 육감적인 사랑에 빠져 말러는 가장 격동적인 감정적 격변의 시기를 맞이하게 된다.

어린 말러는 자신이 음악적으로 챙겨야 할 관능적인 두 명의 소프라노 가수에게 마음이 끌렸다.
버지니아 나우만-궁글(Virginia Naumann-Gungl)과 요한나 리히터(Johanna Richter)였는데 버지니아는 이미 유부녀인 데다 나이도 말러보다 많았다.

자연스럽게 말러의 눈은 요한나에게로 향했다. 23살의 어린 말러가 최초로 알게 된 강렬한 사랑의 경험이자 동시에 즐거움을 주었지만 더 많은 고통을 안겨준 만남이었다.

말러와 같은 나이인 요한나는 여성의 아름다움에 특히 육감적인 여성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말러를 교묘하게 잘 다루었다.

폴란드 단치히(Danzig) 출신인 요한나 리히터(Johanna Richter.1860-1944)는 육체적으로 매력적인 여성이었다. 이런 육감적인 여인에게 말러는 음악적으로 도움을 주며 접근하며 요한나와 친해졌다.

2. 현실적인 요한나 리히터와 말러의 아픔

요한나는 음악적 재능은 좋았지만 성악적인 기술에 있어서는 악단이 필요로 하는 실력에 있어서는 부족했다.

말러는 요한나는 음악이라는 매개체를 이용하여 또한 에로틱하게 접근하는 요한나에게 음악적 기예, 특히 악단에서 필요로 하는 기술등을 가르쳐주었다.

요한나는 음악적 도움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이성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는 말러에게 여성스러우며 요염함의 모든 책략과 유혹을 쏟아 부는 것으로 말러를 완전히 무력하게 만들었다.

말러의 친밀한 지도 아래 남들이 우려했던 요한나의 성악기술은 빠른 시간 내에 좋아졌다. 요한나는 반복적으로 계속 연습했고 이런 연습의 결과로 요한나는 탁월한 소프라노로 거듭나게 된다.

Photo image of Johanna Richter in old age

특히 요한나는 모차르트의 ”콘스탄체“, ”밤의 여왕“의 작품에서 탁월한 실력을 발휘했으며, 이러한 실력발휘로 카셀의 청중과 지역 비평가들 사이에서 인기가 점차 높아졌다.

그러나 소프라노 가수로서 경력을 쌓는 것에 목적을 둔 요한나와 말러와의 사랑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런 목적 있는 애정관계는 요한나를 도덕적으로 힘들게 했다. 한 악단 내에서 부지휘자와 가수로서의 균형 있는 행동은 어려웠고, 이런 상황에서 요한나의 계산된 애정관계를 적절히 조화시킨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웠다.

요한나는 두려웠다. 자신은 직업의 안정성이 부족한 악단소속의 가수에 불과한 데다, 그마저도 경력을 끝낼 수 있는 원치 않는 임신의 위험이 있다.

구스타프는 아직 부지휘자라는 불확실한 지위에 있다. 이런 것들을 모두 고려하면 말러와의 관계는 적당한 관계에서 끝내는 게 현명한 것이라는 판단이 든 것이다.

그러나 말러는 달랐다. 순수한 의도로 요한나를 사랑했다. 23살이라는 아직 어린 나이였지만 요한나와의 사랑을 지켜낼 자신도 있었다.

그러나 이미 적당한 거리를 두기로 작정한 요한나에게 말러의 격정적 감정은 컨트롤해야 하는 대상이었던 것이다.

요한나와의 애정관계에 있어 구스타프 말러의 감정은 그의 친구 뢰르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을 보면 이해될 수 있다.

1884년 여름 방학 후 카셀로 돌아온 말러는 친구인 뢰르(Löhr)에게 자신이 다시 한번 ‘끔찍한 주문에 사로잡혀 있다’라고 말했던 적이 있다. 끔찍한 주문은 요한나의 예전과 같지 않은 태도였을 것이다.

1884년 12월 31일 말러는 요한나와 함께 새해 전야를 보냈다. 이때 둘이 밤을 보내며 사랑과 이별했던 상황에 대해서 말러가 뢰르에게 편지를 보낸 것이다.

어제저녁에는 그녀와 함께 조용히 시간을 보내며 새해가 밝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요한나의 생각은 현재에 머무르지만은 않았고, 시계가 자정을 알리고, 새해가 밝으며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을 때 나는 그녀의 생각을 말릴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내 마음은 그저 끔찍했다.

요한나는 옆방으로 들어가서 잠시 말없이 창가에 서 있다가 말없이 울면서 돌아왔을 때, 우리 사이에는 영원한 허물 수 없는 벽처럼 말로 표현하기 힘든 괴로움이 솟아올랐다,

나는 그녀를 누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나는 꿈속에서 밤새 울면서 지샜다. 그러나 그러한 눈물은 우리들 관계를 발전시키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나는 요한나에 의해 찢겨졌고, 내 심장은 피를 흘리며, 나는 모든 것을 잃었다.

밖의 종탑에서는 새해의 종소리가 울려 퍼졌고, 교회에서는 엄숙한 새해의 합창이 들려왔다. 말러는 눈물 흘리도록 방에 혼자 남겨졌다. 그 밤으로 구스타프와 요한나의 연인 관계는 정리됐다.

이후에도 말러와 요한나는 그해 6월의 어느 날까지 케셀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지만 다시 사랑의 연인관계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분명한 것은 둘은 격정적으로 사랑에 빠진 것은 아니었다. 구스타프는 아직 이성에 대해 경험이 부족하고 순수했다.

둘의 관계는 육감적인 여인을 좋아하며 짝사랑한 젊은 말러의 의지보다는, 현실적인 억지력을 발휘한 요한나의 의지가 더 큰 탓이었다.

이 고통스러운 과거 연인사이 관계는 말러가 카셀을 떠날 때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말러가 원했던 연인관계로의 복원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형식적이고 예의 바른 행동의 경계를 넘지 않았다.

말러는 결국 요한나의 마음을 돌려 절망적인 짝사랑의 위기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지 못하고 요한나를 포기한다.

말러의 끝내 이루어지지 못한 짝사랑의 감정은 그의 가곡 “나그네의 노래”(Lieder eines fahrenden Gesellen)의 가사가 되는 일련의 사랑의 시를 쓰게 되었고, 이 곡들은 요한나에게 헌정된다.

나그네의 노래(Lieder eines fahrenden Gesellen) 악보

말러가 카젤을 떠나 프라그로 떠난 지 1년 후, 요한나도 카셀을 떠나 로테르담에서 소프라노 가수로활동을 이어갔고, 이후에는 수년간 쾰른지역 앙상블악단의 멤버로 활동했다.

이후에 요한나가 말러에게 쓴 유일한 편지 한장을 남겼는데 이 편지에서 말러를 ‘친애하는 좋은 친구’라고 호칭하며 존경심만을 표현했다.

요한나는 1905년에 가수로서의 직업경력을 마감하고 음악 교사로서 활동하다가 1943년, 83세의 나이로 고향 폴란드 단치히에서 사망했다.

한편 요한나와의 짝사랑의 아픔과 함께 어설픈 관계가 괴로웠다. 계속해서 지휘자직을 맡아달라는 악단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1885년 지휘자직을 사임하고 오페라단에 지원하여 라이프치히로 오게 된다.

구스타프 말러는 라이프치히에서 또 다른 여인을 만나게 되는데 그 여인은 친구의 아내였다. 말러의 다음 사랑을 맞이하게 될 라이프치히에서의 러브스토리는 다음 편에서 보기로 한다.

**말러의 요한나를 짝사랑하며 지은 사랑의 시를 담은 가곡 “나그네의 노래”를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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