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타프 말러의 연인(2/3) 매리언 마틸데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1860. 7. 7. – 1911. 5. 18)는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고전음악과 모더니즘 음악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한 낭만주의 작곡가이자 지휘자이다.

말러는 23살의 어린 나이에 요한나 리히터와의 짝사랑의 아픔과 함께 어설픈 관계가 괴로워 카젤의 지휘자직을 사임하고 라이프치히 오페라단으로 오게 된다.

1. 친구의 아내 매리언 마틸데의 만남

말러는 1887년 4월 라이프치히 오페라단에서 지휘자로 일하게 되었다. 그러나 오랜 기간 동안 지휘자의 직을 맡아하긴 했지만 그의 지위는 하급직에 머물렀다.

그러던 중 말러는 <마탄의 사수> 작곡가인 칼 마리아 폰 베버(Carl Maria von Weber)의 손자인 칼 폰 베버 대위(1849–1897)와 친구가 되었고, 이를 계기로 작곡가 베버의 미완성 오페라인 를 완성하는 작업을 도와주게 되었다.


1888년 1월 20일 이 오페라의 초연은 독일 오페라 하우스의 중요한 행사였으며 여러 음악가가 참석한 가운데 호평을 받았다.

이 오페라의 성공은 베버의 명성과 함께 그를 도와주며 지휘까지 맡아준 말러의 대중적 인지도를 높이는 데 큰 도움이 되었고, 재정적 보상도 가져다주었다

그런데 말러는 베버의 집에 머물면서 베버의 오페라 완성을 도와주는 과정에서 도를 넘는 애정행각을 벌이는 결정적인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요한나를 짝사랑하며 아픔만을 겪은 말러지만 요한나를 통해 이성에 눈뜬 말러는 친구 베버의 아내 매리언 마틸데와 불륜의 관계에 빠져 버린 것이다. 매리언은 세 아이의 엄마이기도 했다.

매리언 마틸데의 이미지 사진

요한나였을 때와는 달리 둘의 사랑은 강렬했다. 사랑에 빠진 말러의 눈에는 보이는 것이 없었다. 말러는 매리언에게 함께 떠나서 함께 지내자고 요청했고, 갑작스러운 제안에 대답할 시간을 달라고 요청했다.

말러는 매리언의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그의 첫 번째 교향곡을 썼다. 그 곡이 그의 교향곡 1번 <거인>이다.

고민에 빠졌던 매리언이 말러의 뜻에 따라 떠나기로 한다. 드디어 둘이 약속한 날의 어두운 밤을 지나 자정이 되자 말러는 기차역 플랫폼에서 매리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같이 떠나려 한다는 정보가 매리언의 남편 베버의 귀에 뒤늦게 들어가게 된다. 베버는 권총을 들고 출발하려는 열차를 추적하여 그의 아내 매리언을 붙잡았다.

베버는 말러의 배신에 분노했지만 인내력을 발휘하기로 했다. 할아버지 베버의 명성과 본인의 체면에 손상이 가는 일인지라 주위의 눈을 의식해 말러에게는 불문에 부치기로 한다.

그러나 비밀은 오래가지 않는다. 이 일은 나중에 영국작곡가 에델 스미스( Ethel Smyth)에 의해 소문이 돌아 알려지게 되었다.

매리언 마틸데(Marion Mathilde Schwabe, 1865~1931)은 독일 출신이 아닌 잉글랜드의 맨체스터에서 독일계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 아돌프는 인쇄업자였다.

매리언이 잉글랜드 출신인 것은 베버가 불문에 부치기로 해줬던 사실이 나중에 영국인 에델에 의해 대외에 알려지게 된 원인이 된 것이다.

말러는 베버의 배려(?) 덕분에 라이프치히에 머물 수 있었지만 라이프치히에서의 생활은 길지 않았다.

베버에게 발각된 이후의 말러와 매리언의 일은 자세히 알려지지 않는다. 특히 매리언이 어떤 일을 겪게 되었는지도 알려지지 않는다.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든 세상은 이일에 관심이 없었다. 영국 작곡가 에델이 이들의 스캔들에 대해서 알렸지만 이슈가 되지 않았다.

이 일이 알려질 때까지는 시간이 많이 흘렀기 때문이기도 했고, 말러가 매리언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교향곡 1번 <거인>이 1888년 4월에 만들어졌다는 사실만을 기록에 남기고 있다.

이후의 메리언의 삶을 조사했지만, 말러가 매리언의 곁을 떠난 날부터 1931년 그녀가 사망할 때까지 알려진 것은 없다.

이것으로 말러의 두 번째 사랑은 끝이 났다. 말러는 이후에 결혼을 하게 된다.

2. 또 다른 만남을 준비하는 구스타프 말러

1888년 1월 20일 베버의 오페라의 초연의 지휘는 말러의 대중적 인지도를 높이는 데 큰 도움이 되었고, 재정적 보상도 가져다주었다

재정적으로 나름 안정을 취하게 된 말러는 1888년 5월 수석 무대 감독과의 갈등으로 라이프치히를 떠났다. 그러나 이는 표면적인 원인이었다. 사실은 베버의 아내 매리언 마틸데와의 스캔들로 친구인 베버의 얼굴을 계속보기가 민망했다.

말러는 비엔나의 오랜 친구인 귀도 아들러(Guido Adler)와 첼리스트 데이비드 포퍼(David Popper)의 알선과 노력으로 헝가리 부다페스트 왕립오페라단의 잠재적인 감독으로 지명되었다.

그러던 중 1889년 2월 18일 말러의 아버지 베른하르트가 죽고 연말에는 여동생 레오폴디네와 그의 어머니가 모두 사망하면서 10월부터 말러는 네 명의 남동생을 부양하게 된다.

이때까지도 말러는 매리언과의 이별의 아픔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다른 여인과의 관계를 맺지 못했다. 그리고 그해 말에는 작곡에 전념하여, 뮌헨에서 그의 교향곡 4번 초연을 지휘했다.

구스타프 말러의 이미지 사진

마음의 안정을 얻고자 비엔나에서의 두 번째 시즌동안 넓고 현대적인 아파트를 구입하고, 작곡 스튜디오 옆에 새롭게 땅을 구입해 여름별장을 짓고 생활하며 작곡에 전념했다.

그의 금욕생활은 길지 않았다. 1901년 11월, 연극 감독인 맥스 부르크하르트(Max Burckhard)와 함께한 사교 모임에서 화가 칼 몰(Carl Moll)의 의붓딸인 앨마 쉰들러(Alma Schindler)를 만나게 된다.

구스타프 말러는 어린 나이에 재정적 안정을 이루지 못해 그의 첫사랑은 짝사랑으로 끝을 맺었다.
그리고 친구의 아내를 넘보고 도망까지 가려고 했지만 실패하고, 친구의 배려로 불문에 부치고 음악가의 생활을 계속하지만, 이제 익숙해진 여인의 향기다.

타고난 음악적 재능에다가 익혀진 연애 테크닉은 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다음 편에서 그의 러브스토리 속으로 들어가 보자.

이 게시물이 얼마나 유용했습니까?

평점을 매겨주세요.

평균 평점 5 / 5. 투표수 1

지금까지 투표한 사람이 없습니다. 가장 먼저 게시물을 평가해 주세요.

error: Content is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