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코프스키의 연인(1/2) 데지레아르토, 안토니나 밀류코바

차이코프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 1840~1893)는 백조의 호수와 호두까기 인형, 비창 교향곡, 사계의 작곡자로 러시아를 대표하는 작곡가이며 지휘자이다.

차이코프스키에게는 많지 않은 여인이 있었는데, 차이코프스키가 처음으로 사랑한 데지레 아르토와 안토니나 밀류코바가 있다. 그리고 음악활동에 있어 많은 후원을 한 나데츠다 폰 메크부인이 있다.

이번 편에서는 데지레 아르토와 안토니나 밀류코바를 살펴보고(1/2) 다음 편에서는 차이코프스키의 음악활동에 있어 많은 후원을 한 나데츠다 폰 메크 부인에 대해서 최대한 객관성을 확보하고 있는 자료들을 바탕으로 살펴 보도록 한다.

1.첫 번째 차이코프스키의 연인, 프리마돈나 데지레 아르토

차이코프스키는 우크라이나계의 정부 탄광 공학자며 하급 관료이던 아버지 일리야 페트로비치와 프랑스인과 독일인의 피가 섞인 러시아 혼혈인 여성 어머니 알렉산드라 사이에서 우랄지방의 외딴 시골 캄스코보스킨스크의 광산촌 숙소에서 태어났다.

차이코프스키는 1860년대 러시아를 방문한 이탈리아 오페라단의 프리마돈나인 데지레 아르토에게 빠졌다.그의 나이 20살 때인데 데지레는 5살 연상이었다.

데지레 아르토 ( Désirée Artôt,1835 – 1907)는 벨기에의 소프라노로, 독일과 이탈리아 오페라에서 유명했으며 주로 독일에서 활동했다.

그해 말까지 둘은 결혼을 고려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는 차이코프스키가 동성애 감성을 극복하려는 첫 번째 진지한 시도였다고 한다.

차이코프스키의 첫랑 데지레 아르토 이미지 사진

그러나 데지레 아르토와의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다. 데지레와 함께 여행하던 그녀의 어머니는 결혼을 극렬히 반대했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었는데 데지레의 모든 공연에서 앞 좌석에 앉아 관람할 만큼 그녀와 짝사랑에 빠진 아르메니아 남자가 있었다.

이남자는 데지레의 어머니에게 차이코프스키가 본인의 현재의 재정상태와 동성애 전력에 대해 알리지 않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일견 사실인 사항을 일러바치며 이간질을 했기 때문이다.

이런 고자질로 데지레와는 이루어지지 못하고 헤어지게 되었다. 결국 데지레는 1869년스페인의 바리톤가수 마리아노 라모스(Mariano Padillay Ramos)와 결혼한다. 그럼에도 차이코프스키는 데지레를 위해 그녀의 목소리가 가장 어울릴 듯한 범위를 염두에 두고 여섯 곡을 써서 데지레에게 헌정하였다.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과 로미오와 줄리엣 판타지 서곡과 같은 작품은 데지레에게 영감을 받아 작곡하였다.

데지레는 1884년에 오페라 배우에서 은퇴했고, 차이콥스키와 헤어진지 약 10년후인 1887년 12월, 베를린에서 베를리오즈의 ‘죽음의 대주’ 공연에서 우연히 기쁘게 재회하였으나 그들은 과거의 일에 대한 언급은 없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데지레 아르테는 남편인 라모스가 1907년 사망한 지 불과 4개월 후에 파리에서 사망했다.

2. 차이코프스키의 두번째 연인, 안토니나 밀류코바

1877년부터 차이코프스키가 사망할 때까지 법률적으로 그의 아내였던 안토니나 밀류코바 (Antonina Milyukova, 1848–1917)가 있다.

안토니나는 차이코프스키의 제자인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알려진 바는 그리 많지 않다.

안토니나 밀류코바의 이미지 사진

다만 그녀의 가족은 모스크바 지역에 거주했고 지역 상류층에 속했지만 가난하게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차이코프스키와 안토니나는 1865년 유명한 가수였던 아나스타샤 크보스토바(Anastasia Khvostova)의 모스크바집에서 처음 만났다.

당시 안토니나의 나이 16세였고 차이코프스키는 25세 였는데 차이코프스키는 이 만남을 기억하지 못했지만, 안토니나는 그에게 첫눈에 반해 버렸다.

안토니나가 그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되자 차이콥스키는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알고 있었기에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거짓 이유를 들어 거절하다. 그리고 그녀와 헤어진 다음에는 안토니나를 “내가 조금도 사랑하지 않는 여성”이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어쨌든 당시 러시아에서는 동성애자들에 대한 시선이 굉장히 부정적이었기 때문에 차이콥스키는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1877년 7월 사랑하지도 않는 여인 안토니나 밀류코바와 억지로 결혼을 하게 된다.

결혼 생활은 차이코프스키에게 비참했다. 불과 6주 만에 영구적인 별거가 뒤따랐고, 이에 대해 차이코프스키의 가족들은 안토니나의 성격을 “반쯤 미친 지혜로운 여자” 라고 묘사하며 비난을 했다.

“안토니나는 다른 여성과 마찬가지로 차이코프스키에게 적합한 여성이다 그러나 안토닌나와의 결혼은 잘못 된 것이다.” 라며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을, 안토니나를 반대했다.

안토니나는 두사람의 결혼 생활을 끝내려는 가족들의 음모에 의한 희생자라고 믿었다. 그리고 차이코프스키에게 당신 가족들이 당신의 재능을 죽일 것이라고 끊임없이 속삭였다.

처음에 그는 이 속삭임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지만, 나중에는 점점 더 주의 깊게 듣기 시작했다. 그의 재능을 잃는 것은 차이코프스키에게는 가장 무서운 일이었다. 그는 안토니나와 가족들의 비방을 믿기 시작했다.

1877년 10월 차이코프스키는 가족과 안토니나의 비방전을 중단시키고자 서로 떨어지게 했다. 동생은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정착시키고 그런 다음 모스크바로 가서 안토니나에게 이혼에 동의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녀는 동의하지 않고 펄쩍 뛰었지만 차이코프스키와 안토니나는 다시 함께 살지는 않았다. 그러나 차이코프스키가 심각한 신경쇠약 증세를 보여 정신과 의사는 차이코프스키에게 안토니나와 다시 동거하거나 만나지는 말라고 권했다.

러시아의 이혼에 관한 법률로 인해 차이코프스키가 사망할 때까지 두 사람은 합법적으로 결혼 생활을 유지했다. 이것은 1878년과 1879년, 차이코프스키는 두 번의 이혼시도를 하였는데 이혼의 유일한 법적 근거는 안토니나의 간통죄였으며 안토니나는 인정하지 않았다.

1880년 7월, 안토니나는 “왜 차이코프스키 자신의 끔찍한 악덕에 대해 말하지는 않고 자신만을 비난하느냐“면서 차이코프스키를 비난했다.

1881년 3월, 안토니나는 혼외 아이를 낳았다. 차이코프스키는 이제 이혼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있었지만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가 법적 조처를 취하면 잊혀지거나 적어도 묻히기를 바라는 문제들, 특히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부분이 노출될 것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는 계속해서 그녀에게 정기적인 생활비를 보냈는데, 이는 그녀의 침묵을 사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이혼은 차이코프스키가 그녀에 대한 재정적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의미했지만 이혼하지 않았다.

결국 안토니나와 차이코프스키가 2달 밖에 살지 않았지만 안토니나는 세 자녀를 낳았다.

차이코프스키 자신은 자신의 후원자이던 나데즈다 폰 메크(Nadezhda von Meck)에게 “내 아내를 비난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도 안토니나를 폄하하고 비난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이성이 감정을 이기지 못한 것이다.

2022년 러시아에서 제작된 영화 “차이코프스키의 아내” (Zhena Chaikovskogo)는 남편의 동성애를 받아들일 수 없어 고통스런 삶을 그린 안토니나에 관한 것이다.

차이코프스키의 아내라는 영화의 이미지

안토니나는 차이코프스키보다 24년을 더 살았지만, 마지막 20년을 정신 병원에서 보냈으며 1917 년 3월 1일 모스크바에서 68 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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