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크의 연인, 밀리탈로, 다그니유엘, 툴라 라르센.

뭉크의 연인, 밀리탈로, 다그니유엘, 툴라 라르센.

표현주의의 거장인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1863 ~ 1944)는 노르웨이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1893년 작품 ‘절규(The Scream)는 서양 미술에서 가장 찬사를 받는 이미지 중 하나이다.

표현주의에 앞서 미술계를 지배했던 ‘인상주의’가 눈에 보이는 대로의 대상을 그리는 것이었다면 ‘표현주의’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미술가의 감정이 강하게 드러나도록 불안이나 공포, 기쁨과 슬픔등을 그린다는 것이 특징이다.

뭉크의 대표작, 수많은 변용과 변주의 모티브가 된 작품 ‘절규’를 모르는 사람 없을 만큼 유명하다.

뭉크는 여자를 사랑과 공포의 대상인 ‘팜므파탈’로 봤다. 마돈나는 상처와 사랑에 사로잡힌 죽음의 여신으로 그리고 있으며 사랑이 불안을 잉태하고 불안은 다시 죽음을 낳는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가 여자를 이와 같이 팜므파탈로 보고 마돈나를 상처와 죽음의 여신으로 그린것은 그의 여성과 관련이 깊다.
그에게 이러한 영향을 끼친 연인은 누가 있었을까?

1.뭉크의 첫 사랑 밀리 탈로

뭉크가 20살 되던 해인 1883년 그의 첫사랑인 ‘밀리 탈로'(Milly Thaulow)를 만나게 된다. 그녀는 당시 뭉크의 재능을 알아보고 후원해 주던 후원자(프리츠 탈로)의 형수이며 사교계의 여왕으로 불리던 유부녀였고 매우 자유분방한 여성으로 알려졌는데 뭉크도 여러 남자 중 한 명이었다. 뭉크는 그녀의 여러 남자 중 한 명에 불과했고 뭉크는 그녀의 사랑을 차지하기 위해 6년간 순정을 바쳤지만 끝내는 상처만을 입고 헤어지게 된다.

밀리 탈로 (Milly Thaulow)

뭉크는 이때의 좌절감을 표현하기 위하여 여러 작품을 남겼는데 대표적으로 ‘흡혈귀’라는 작품이다.
뭉크는 그림 속에 자신이 겪은 첫사랑의 느꼈던 감정과 기억을 을 표현했는데 흡혈귀로 보이는 여성에게 남자는 목을 내어주고 대신 그 품에 안기어 있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뭉크의 흡혈귀


이는 그의 첫사랑 탈로와의 관계가 마치 그림 속의 흡혈귀와 인간의 관계로 그려지는 끝이 정해진 파멸적인 관계였음을 보여주는 그러한 감정이었던 것으로 뭉크에게 큰 상처로 남는 첫사랑이었던 것이다.

2.두 번째 연인 다그니 유엘

뭉크와의 첫사랑의 상처를 다스리며 작품활동을 하던 중 베를린에서 개인전을 열기도 하였는데 이때 즐겨 찾던 술집에서 어렸을 때 소꿉장난을 하던 친구 다그니 유엘(Dagny Juel)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
다그니는 우아한 외모에 세련되고 지적인 매력을 가진 여성으로 음악을 공부하기 위해 베를린에 머물고 있었다.
다그니는 여러 남자의 눈에도 매력적인 여성으로 보였는데 뭉크의 친구들도 그녀에게 반해버리게 된다.
그들은 스웨전의 극작가인 스트린드베리(August Strindberg)와 프자비체프스키(Stanislaw Przybyszewski)들이다. 이들 셋은 동시에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된다.
세 친구 중 유엘을 차지한 남자는 폴란드 출신의 소설가 프자비체프스키였는데, 둘은 1893년 결혼을 했다.

뭉크는 유엘과 프자비체프스키에게 배신감과 질투심에 사로 잡혀 많은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 이때의 마음의 상처와 질투감을 표현한 여러 작품이 작품명 ‘질투’인데 자신의 절친인 소꿉친구와의 관계를 상상하며 그에 질투심을 느끼는 본인을 표현한 것이다.

Dagny Juel, Madonna

이 시기에 뭉크는 애증의 유엘을 모델로 ‘마돈나’를 그렸는데 그림 중 왼쪽 밑에 태아는 밝은 느낌보다는 어두운 느낌의 해골에 가깝게 표현했고 빨간 테두리는 자궁을 표현한 것으로 정자들이 돌아다니는 모습을 그려 넣는 성스러운 여인으로서의 마돈나가 아니라 팜므파탈로서 이미지를 그렸다.

훗날 뭉크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당시를 ‘생의 활기’가 빠져나갔다고 회상했다.

3.세 번째 여인 툴라 라르센

뭉크가 원하는 것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유엘과 결혼을 했던 프자비체프스키는 34살 생일을 앞두고 호텔방에서 총에 맞아 죽었다.
뭉크가 그린 ‘붉은 담쟁이’ 그림은 유엘 남편을 살해한 자를 기념(?)하는 상징적인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어쨌든 뭉크가 사랑했던 두 번째 여인과의 관계가 유엘의 결혼으로 얼마나 큰 실망과 좌절을 했다는 걸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뭉크는 유엘과의 사랑의 상처로 좌절을 했지만 1899년 툴라 라르센(Tulla Larsen)을 만나게 된다.
그동안 만났던 뭉크의 연인들은 여러 남자들과의 복잡한 관계로 뭉크를 힘들게 했지만 툴라는 달랐다. 툴라는 뭉크보다 4살이나 많은 연상녀로 엄청나게 부유한집의 딸이었는데, 예술적으로도 해박한 지식을 가진 이지적인 여성으로 성격 또한, 적극적이었다.

툴라 라르센

그런데 툴라는 뭉크에게 지나치게 집착하며 결혼까지 요구하였으며 뭉크가 툴라에게 거의 굴복할 뻔했으나 1900년 그녀의 상당한 재산을 외면하고 그녀에게서 도망쳤고 베를린으로 이사를 해 버렸다.

결혼하고 싶어 하지 않은 뭉크는 그녀에게 4년 만에 이별을 통보했다. 뭉크와 헤어지기 싫었던 툴라는 뭉크의 친구들에게 그녀가 자살로 죽어가고 있다고 거짓으로 뭉크에게 말해 달라고 하는 작전을 짜고 뭉크를 불렀다.
놀란 뭉크가 그녀의 별장으로 갔다가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고 배신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툴라는 권총을 들고 자살하겠다는 협박을 하며 뭉크를 압박했다.

툴라의 자살협박에 이를 말리는 뭉크가 서로 실랑이하다 툴라의 손에 든 권총이 발사되어 뭉크가 왼손중지를 잃고 만다.

툴라 라르센은 결혼을 열망했지만 뭉크는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뭉크는 충격을 받기도 했지만 툴라의 행위에 크게 화가 나 나중에 자신과 툴라 라르센을 묘사한 자화상을 반으로 쪼개 버리는 분노를 표현하기도 했다.

툴라 라르센과 뭉크

뭉크의 진심을 알게 된 툴라는 마침내 뭉크를 떠날 결심을 하고 뭉크의 젊은 동료와 결혼을 해버렸다.

뭉크는 또 한 번의 충격을 받았다. 툴라의 결혼을 또 다른 배신으로 받아들였고, 그 굴욕을 한동안 곱씹으며 그 괴로움을 새로운 그림으로 쏟아냈다.

뭉크는 이때의 충격적인 기억을 1906년’ 살인녀’라는 그림으로 표현했는데, 남자는 심장을 다쳐 피를 흘리고 죽어 있고 남자를 죽인 살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앞을 응시하고 있다. 총격 사건까지 일으키며 본인에게 집착했던 툴라가 다른 남자와 결혼을 했다는 것에 대한 배신감과 감정적 후유증을 표현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뭉크의 살인녀

뭉크는 앞서의 두 여인에 비해서 툴라를 많이 사랑하지는 않았던 것 같으나 툴라가 다른 남자와 결혼한 것은 마음에 상처를 준 것이다.

뭉크는 결혼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잦은 음주로 건강이 좋지 않았던 것도 결혼에 대한 우려감과 두려움을 더욱 심화시켰다.
또 이전 두여인에 대한 배신감들이 여자를 부정적으로 인식하게 했고 또, 툴라의 결혼요구가 부담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두 번에 이른 여인의 배신, 다른 여인 툴라와의 총이 오발되어 뭉크의 왼쪽 손가락이 절단되는 사고, 툴라의 결혼, 뭉크는 그 이후, 점점 여자를 증오하게 되었다.
뭉크는 여자에 대해 남자의 피를 빨아먹는 뱀파이어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여 그림을 그릴 때도 여자를 뱀파이어로 표현하는 등 두려움의 존재로 인식하게 되어 결국, 뭉크는 죽을 때까지 결혼은 하지 않는다.

4.뭉크의 절규

뭉크의 절규는 현대인들의 불안한 영혼과 고통을 상징하는 그림으로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 중 하나이며 크게 놀라거나 절규할 때 패러디되는 대표적인 그림이다.

뭉크의 절규

뭉크는 이 절규를 50개 정도의 다양한 버전으로 그렸다.

뭉크가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한 영감은 받을 때를 다음과 같이 일기에 표현했다.
“친구와 해질녘 친구 둘과 함께 길을 걸어가고 있을 때 약간의 우울함을 느꼈다. 그때 갑자기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는데 죽을 것만 같은 피로감에 그 자리에 멈춰 난간에 기대섰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두려움으로 떨고 있었는데 그때 커다란 비명 소리가 들렸다”.

뭉크의 자화상

1940년, 독일이 노르웨이를 침공하자 나치당이 노르웨이 정부를 장악했다. 뭉크의 나이 76세였다. 뭉크는 자신의 집 2층에 거의 모든 미술품을 소장하고 있었는데 나치의 압수를 두려워하며 살았다.
이전에 나치가 가져갔던 그림 중 71점은 수집가들의 구입을 통해 노르웨이로 반환되었다.

뭉크는 1944년 1월 23일, 80세 생일 한 달 후인 1944년 1월 23일 오슬로 근교의 에켈리에 있는 자택에서 홀로 죽음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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