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연인, 마리아 바르바라, 안나 막달레나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1685. 3. 31~1750. 7.28)는 독일 아이젠하흐에서 태어난 바로크 시대의 유명한 독일 작곡가이자 음악가이다.

바흐의 작품은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같은 관현악곡, 첼로 모음곡, 골드베르크 변주곡 등 다양한 장르에 걸쳐 있다. 19세기 유럽 르네상스 이후, 그는 서양 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곡가 중 하나로 인정받았다.

1.바흐의 첫 번째 부인 마리아 바르바라

바흐의 첫 번째 아내는 마리아 바르바라 바흐(Maria Barbara Bach,1684~1720)로, 독일 슈바르츠부르크에서 태어났으며, 부모는 카타리나와 미하엘 바흐였다. 요한 세바스찬 바흐와는 육촌간이다.

마리아 바바라 바흐의 초상

그녀의 아버지는 게렌(Gehren)의 오르간 연주자이자 마을 서기관이었다.

바흐는 당시 뮐하우젠의 교회에서 오르간 연주자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게이어스바흐(Geyersbach)라는 학생이 바흐에게 얼굴을 때리며 공격하자 바흐는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칼을 뽑았다.

바흐는 칼을 휘두르지 않았지만, 칼을 뽑아 자신을 방어했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 사건은 게이어스바흐사건이라 칭하며, 기록되어 있는데, 이런 바흐의 인간적인 측면의 성격표현은 전설적인 음악가로서의 이미지와 함께 바흐의 생애에 대하여 흥미로운 이야기 중 하나로 전해져 왔다.

이 사건의 증인으로서 이때의 상황을 바흐에게 유리하게 증언을 해준 사람이 마리아의 언니 카타리나였다.

바흐 가족은 서로가 긴밀하게 얽혀 있었다. 마리아 바르바라가 바흐의 육촌 간이기 때문에 적어도 어릴 적에 서로를 가볍게 알았을 것이고 친밀하였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어느 정도의 교류는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바흐가 자라서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로 일하게 되면서 더 가까워지게 되었고, 이때의 언니 카타리나가 바흐에게 유리한 증언의 덕분에 위기를 모면한 바흐는 사촌간이지만, 한 살 위의 누나, 마리아와 자주 만나게 된다.

둘의 잦은 만남은 이성의 관심으로 사랑에 빠지게 되었고, 급기야 상속받은 작은 재산을 가지고 결혼을 하게 된다. 1707년 10월 17일의 일이다. 이때의 나이 바흐는 22세, 마리아의 나이 23세 때의 일이다.

2.마리아 바르바라의 급작스러운 죽음

마리아 바르바라의 삶이나 바흐와의 결혼에 대해서는 정보가 많지 않지만, 둘은 행복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흐와 마리아 바르바라는 라이프치히에서의 결혼생활은 했고, 바흐가 다양한 작품을 창작하고 연주하는 동안 마리아는 남편의 예술적인 활동을 내조했다.

이들 사이에는 세명의 아들과 네 명의 딸이 태어났다. 첫째 아들은 카타리나 도로테아(Catharina Dorothea)로, 나머지 세 아들은 빌헬름 프리데만(Wilhelm Friedemann), 칼 필립 에마뉴엘(Carl Philipp Emanuel), 요한 고프리트 베른하르트(Johann Gottfried Bernhard)이다.

바흐와 마리아 바르바라의 아이들

이렇게 평탄하게 행복하게 살던 바흐집안에 갑작스러운 변화가 찾아왔다. 1720년 7월 7일 바흐의 음악활동을 도와주기 위하여 여행하던 마리아 바바라가 칼스바트에 있는 스파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만다.

바흐가 칼스바트를 떠나 있는 동안 마리아는 건강한 상태였지만, 바흐가 두 달 후 돌아왔을 때, 마리아는 이미 사망하고 장례까지 치른 상태였다.

사망 원인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당시의 의학적 기록이나 바흐 자신의 기록에도 이에 대한 언급이 없다. 따라서 그녀의 갑작스러운 사망에 대한 이유는 여전히 미스터리한 측면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심장질환이 아니었나 하는 판단을 후대의 연구가들은 조심스럽게 추측하기도 한다.

바흐는 충격에 빠졌다. 바흐의 유명한 바이올린 파르티타 No. 2(특히 마지막 “샤콘” 부분)가 마리아 바르바라를 위한 묘지음악으로 쓰였다고 주장도 있지만 정확하지 않다.

3. 바흐의 두 번째 부인 안나 막달레나 빌케(Anna Magdalena Wilcke)

막달레나 빌케(Anna Magdalena Wilcke, 1721–1750 )는 독인 작센공화국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 요한 카스파르 빌케는 궁정의 트럼펫 연주자였으며 어머니는 오르간 연주자였다.

1717년 12월, 바흐는 안할트-케텐의 음악 지휘자로 임명되었고, 이후 수년 동안 이곳에서 지휘자로서 음악활동을 했다. 바흐는 궁전음악을 담당하고 있었고, 안나 막달레나는 궁전에서 소프라노 가수로 일하고 있었으므로 자연스럽게 친하게 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바흐는 그의 아내 마리아와 결혼생활을 하고 있었으므로 이성으로서의 호감보다는 직장 동료로서의 호감을 갖고 지냈다고 추측된다.

마리아 막달레나의 초상

안할트-케텐 궁전에서의 음악활동을 통해 두 사람은 서로에게 가까워지고, 음악적인 활동과 협력을 통해 관계는 좋았다. 그런데 갑자기 바흐의 첫 번째 아내인 마리아 바바라가 사망하자 둘은 사이는 갑자기 가까워졌다. 그리고 1년 후인 1721년 12월 3일에 둘은 결혼했다.

바흐와 안나 막달레나는 1721년에 결혼한 직후에 라이프치히로 이사했으며, 그곳에서 바흐는 토마스 학교의 교향악단지휘자 및 음악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안나 막달레나는 결혼 후에도 전문적으로 노래를 불렀으며, 많은 자녀를 낳았고 가정생활도 충실했다.
안나 막달레나는 결혼생활과 함께 왕성한 음악활동을 통해 “여성음악지휘자 바흐부인”(Frau Capellmeisterin Bach)이라는 지위를 얻었다.

이 지위는 그녀가 바흐와 함께 음악적인 활동과 가정 운영에 참여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음을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은 것을 의미한다.

4. 바흐의 안과 치료실패로 인한 죽음

바흐와 안나의 결혼생활은 가사생활뿐만 아니라 자녀들 교육까지 전부 전문가에 맡길정도로 바흐의 음악활동으로 인한 수입은 좋았다. 안나는 이 모두의 관리를 완벽히 했다.

둘은 총 13명의 자녀를 낳았다. 그중 7명의 자녀는 유아 때 사망했고 성인으로 자란 자녀는 6명에 불과했다. 그들은 고트프리트 하인리히, 엘리자베스 율리아네 프리데리카, 요한 크리스토프 프리드리히, 요한 크리스티안, 요한나 카롤리나, 레지나 수잔나이다.

마리아 막달레나의 초상

이 가족은 바흐의 음악적 유산과 함께 안나 막달레나의 라이프치히 시절을 함께했다.

1749년 바흐의 건강은 악화되고 있었다. 특히 그의 눈이 안 좋았다. 시력이 점점 더 안좋아지자 영국의 안과의사 존 테일러에게 눈 수술을 받았다. 그런데 존 테일러는 형편없는 의사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실명을 안겨준 사람이었다. 결국 1750년 7월 28일 치료실패에 따른 합병증으로 사망하고 만다.

바흐가 사망한 후에는 유산 분배 과정에서 본인의 자매의 빚을 갚았다. 그리고 다른 상속인들에게 일 년 치의 급여에 해당하는 금액을 지불하는 등 여러 가지 책임을 맡아 일을 처리했다.

또한 안나 막달레나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다양한 국가기관들로부터 지원을 받았으며, 바흐의 작품을 판매하고 대여하는 등 음악 거래에도 참여했다. 그리고 1760년 2월 27일에 사망했다. 사망원인은 알려지지 않았으며. 29일에 라이프치히의 성 요한 묘지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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