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의 연인(1/3), 미아 베르누이

“헤르만 헤세( Hermann Hesse. 1877~1962)는 독일계 스위스의 소설가이다. 그의 유명한 작품은 <싯다르타>, <수선화와 골드문트>, <데미안>이 있으며, 1946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다.

1. 헤르만 헤세의 어린시절과 성장

개신교 선교사인 부친 요하네스와 모친 마리사이에서 장남으로, 독일의 소도시 칼브(Calw)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헤세는 고집이 세고 가족이 다루기 힘든 아이였다. 복잡한 정신세계를 가진 헤세는 정규 학교에 입학했을 때부터 반항적인 성격을 보였고, 심각한 우울증 증세도 보였다.

심지어 15살 때에는 신학교에서 도망쳐 하루 뒤 들판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이런 이유들로 여러 학교를 거치게 되었고, 부모와는 극심한 갈등을 겪었다.

심지어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른 나이에 술과 담배도 시작했다.

젊은 시절의 헤르만 헤세

불안정한 학교생활은 그를 일찍 사회생활의 세계로 이끌었다. 그의 나이 18세 때인 1895년, 시계탑공장에서 일하며, 단조로운 작업에 영적인 활동인 깊은 사색을 하는 습관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다음에 취직한 서점에서도 단순하게 책을 정리하고 포장하는 단순한 업무는 많은 사색과 이에 따른 많은 책들을 읽게 되는 환경이 주어졌다.

이런 환경의 효과로 헤세는 신학, 괴테, 그리스 신화를 공부하게 되었고, <니체>를 읽기 시작하여 본격적으로 정신세계에 대한 사색이 깊어지게 된다.

1899년 말부터는 바젤의 유명한 골동품 서점에서 일하게 된다. 서점에 있는 오래된 서적들은 영적인 세계들에 대한 헤세의 호기심을 더더욱 자극하였고, 이에 대한 탐구로 정신적으로나 예술적으로 더욱 발전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이러한 집중적인 눈의 혹사로 눈질환이 생겼는데, 전화위복으로 눈질환은 병역을 면제받게 한다. 이런 시간적 여유로 오랫동안 꿈꾸어왔던 이탈리아의 여행도 하게 되었다.

이듬해인 1902년 헤세의 어머니는 긴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 헤세는 어머니를 사랑하였지만 아버지와의 사이를 위해서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겠다는 편지를 아버지에게 보내고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리고 예술적 탐구심은 운명적으로 그의 첫 번째 아내가 될 마리아가 운영하는 스튜디오에 방문하게 되고, 마리가 골동품 서점에 자주 찾아오게 되면서 헤세와 마리아는 인연을 맺게 된다.

2. 헤세의 첫 번째 부인 미아 베르누이

헤르만 헤세와 처음 결혼했던 마리아 베르누이(Maria Bernoulli, 1868~1963)는 약칭해서 미아(Mia)로 불렸으며 헤세보다 9살이나 많은 연상의 여인이었다.

마리아는 음악을 좋아했고 재능 있고, 열정적인 피아니스트이자 산악인이었다.

미아의 아버지는 공증인이었으며 비교적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미아의 부모들은 아이들이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훌륭한 교육환경을 제공했다.

미아는 스위스에서 사진작가가 되기 위해 직업 훈련을 받은 스위스 최초의 전문 사진작가가 되어 활동했으며, 사진 스튜디오를 운영하며 상업적인 사진작가로도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헤르만 헤세의 여인, 미아 베르누이의 사진

그녀는 실험적인 예술사진 촬영에도 관심을 갖고 촬영했으며, 이런 예술적 작품활동으로 미아의 사진 스튜디오는 젊은 예술가들의 만남의 장소가 되었다.

1902년, 그 스튜디오에서 자신보다 9살 어린 서점 직원이었던 헤르만 헤세를 만나게 된 것이다. 둘의 예술적 갈구심은 두 사람의 눈을 빛나게 했고, 첫 눈에 인연이라는 것을 눈치 챘다.

그러나 어린 연하의 남자와의 만남을 미아 베르누이 부모는 거세게 반대했다. 그러나 이런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들은 잘 어울리는 한 쌍의 연인이 되었다.

부모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만남은 계속되었다. 2년 후인 1904년 2월, 헤세는 그동안 시와 문학 작품등을 잡지에 기고하여 부정기적으로 실리던 작품들이 정기적으로 실리게 되었다. 이런 정기적 작품 게재로 헤르만이 작가로서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이런 자신감으로 헤세와 미아는 미아의 아버지가 주말 동안 자리를 비운 사이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이 같은 일을 알게된 미아의 아버지는 마지못해 이들의 결혼을 승낙하게 되고, 그해 8월에는 정식으로 결혼을 하게 된다.

헤세는 문학적인 성공이 계속되었다. 계속된 헤세의 성공으로 재정적 독립이 확실해지자 미아는 직장을 그만두고 콘스탄스 호수의 가이엔호펜의 오래된 농가에 정착하여 헤세의 작품 활동만을 돕게 된다.

헤르만 헤세와 미아, 그들의 아들 사진

헤세는 그곳에서 그의 두 번째 소설 <수레바퀴 아래서>를 썼다. 1907년, 그들은 마을 서쪽 언덕에 둘이서 직접 설계한 집으로 이사를 했다. 그리고 그 집에서 나중에 화가가 된 브루노 , 장식가가 된 하이네 , 사진작가가 된 마틴 등 세 아들이 태어나게 된다.

3. 안정된 헤세의 생활과 자유로운 영혼의 활동

헤세는 당시 주목을 받기 시작한 쇼펜하우어의 철학적 사상과 신학에 관심을 보였고 쇼펜하우어와 신학은 인도에 대한 헤세의 관심을 새롭게 했다.

헤세는 까다로운 성격 탓에 그가 소설을 쓰는 내내 고생하기도 했지만 주변사람 특히 아내 미아를 힘들게 했다. 그리고 그의 작품 출판에도 어려움을 겪은 데다, 아내 미아와의 사이도 소원해지고 말았다.

이런 아내와의 소원한 사이는 안정된 생활에서 오는 권태감의 일부였다. 헤세는 일상에서 벗어나 영적 세계를 자극하기 위하여 생활의 권태감을 풀고자 했다.

결국 싱가포르, 수마트라, 실론, 인도등 아시아와 유럽 여러 곳을 여행했다. 여행을 하면서 작품의 영감을 받고 여러작품을 쓰게 된다.

한편 미아의 입장에서 남편 헤세의 여행기간은 점점 더 길어졌다, 여행이 길어진 만큼 미아는 시골집에서 홀로 긴긴 외로움을 느껴야만 했다.

1912년 헤세가 긴 인도여행에서 돌아온 후, 헤세의 가족은 스위스 베른 근처의 오스터문덴으로 이사를 했다. 헤세는 작품을 쓰며 이곳에서 새로운 삶을 살려고 했으나, 이미 안정된 생활에 권태를 느낀 헤세의 돌아선 마음은 다시 되돌리기 쉽지 않았다.

그런데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헤세는 다른 젊은 작가들이 전선에서 죽어가는 동안 따뜻한 벽난로 옆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없다는 말을 남기고 독일 군대에 지원병으로 홀연히 입대를 한다.

전투 임무에 부적합하다는 판정을 받았지만 전쟁 포로를 돌보는 일에 배치되었다. 이런 일중에도 작가로서의 활동은 계속되었다. 이 활동들은 그를 처음으로 심각한 정치적 갈등의 한 가운데 놓이게 했고, 이런 일들로 다른 작가 친구들과 멀어지게 된다.

그리고 1916년, 헤세의 아버지의 죽음과, 아들 마틴의 심각한 질병, 그리고 아내인 마리가 조현병을 앓는 등, 헤세를 정신적으로 어렵게 하여 정신과 치료가 필요할 정도가 되었다.

헤세는 어쩔 수 없이 군복무를 그만두고 심리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1919년 헤세가 민간인의 삶으로 돌아왔을 때, 마리와의 결혼생활은 파탄이 났다.

헤르만 헤세와 미아 그리고 그의 아들 하이네.

1919년 드디어 전쟁이 끝나자 헤세는 정신적으로 어려움에서 풀려 났다. 아직 아내 마리는 정신질환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마리와 그가 함께 할 미래는 없다고 판단했다. 그들의 집은 각기 나뉘어졌고 아이들은 친척들 집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헤세는 스위스 몬테뇰라의 카사카무치에 방 4개를 임대하여 글쓰기를 계속했다. 그리고 작가들과 예술가들의 휴식지인 “카사 코스탄자(Casa Costanza) 호텔에서 미모의 루스 벵거(Ruth Wenger)를 만나게 된다.

헤세와 미아는 1923년에 정식으로 이혼했다. 그의 마음속에는 이미 루스 벵거라는 다른 여인이 있었다.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 헤르만 헤세, 그와 미모의 루스 벵거와의 만남의 러브스토리는 어떻게 이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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