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델의 애증의 세 여 가수, 쿠초니, 보르도니, 마리아 스트라다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Georg Friedrich Händel,1685.02.23~1759.04.14])은 독일 출생의 영국 작곡가다. 맞다. 우리가 아는 음악의 어머니 헨델.
헨델은 평생 결혼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사생활을 비밀로 했다. 그러나 그의 결혼에 관한 에피소드나 그를 괴롭혔던(?) 여인들, 주변의 여인에 관한 얘기들로 헨델의 연인에 대한 갈증을 조금이나마 달래 보려 한다.
전편에서는 결혼에 대한 에피소드와 헨델이 왜 극도로 사생활을 노출을 꺼려 했는지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헨델은 많은 오페라를 작곡하는등의 왕성한 음악활동을 하였다. 오르간 연주자로서 또 오페라단을 이끌면서 많은 영욕(榮辱)을 함께 했다.
이번편에서는 음악활동과 관련하여 함께 할 수 밖에 없는 여가수들 때문에 겪었던 에프소드(?)에 대해서 다뤄 보겠다.
1. 헨델과 애증의 두 오페라 여가수, 쿠초니, 보르도니
헨델은 왕권파인 토리당의 후원을 받고 있었다. 1719년에는 영국 왕립로열 아카데미라는 오페라 회사가 창립되었는데, 아카데미에서는 책임자인 헨델을 중심으로 활발한 음악 활동이 이어지도록 했다.
헨델은 1719년 유럽 각지에서 가수와 관현악단을 모아 왕립 음악 아카데미(Royal Academy of Music)를 이끌었다.
이 시기에는 라다미스토, 무치오 세볼라, 줄리오 체자레, 로델린다 등의 당시 유명한 작곡가의 작품을 무대에 올렸으며, 왕립음악원의 엄청난 재력으로 카스트라토 가수인 세네시노(Senenino)를 비롯하여 소프라노 마르게리타 두라스탄티(Margherita Durastanti), 프란체스카 쿠초니(Francesca Cuzzoni), 파우스티나 보르도니(Faustina Bordoni) 등 당대 최고의 가수들을 데려와 공연하게 했다.

이 시기는 헨델의 오페라 인생에서도 가장 황금기였고, 런던에서 본격적인 유명세를 탔으며 돈도 많이 벌었다.
그러나, 흥행을 위해 비싼 몸값을 주고 모셔온 쿠초니와 보르도니라는 두 가수는 공연 중에도 또 음악 외적으로도 갖가지 문제들을 만들어 냈다.
두 사람의 유명세에 따른 부작용은 공교롭게도 헨델이 이끄는 음악 아카데미가 몰락하는 데 한몫을 하게 된다.
두 가수의 지나친 라이벌의식과 경쟁의식이 너무 강했던 탓에 오페라 작곡가와 연출자들은 배역비중이나 등장시간등 두 사람의 유명세에 맞춰 균형을 맞춰야 했다.

이러한 배역 균형을 억지로 꿰맞추다 보니 오페라의 스토리에 제대로 맞출 수가 없었다. 이렇게 원래의 작품이 변형되고 흥행에 맞추다 보니 저품질의 오페라만 양산되게 된다.
당시에는 내용적으로 부실한 상태에서 경쟁적으로 공연이 되어 억지로 꿰맞추기식의 선정적 스토리를 마구 공연되는 시기였다. 그래도 오페라가 인기가 있어 흥행에는 성공하였다 하더라도 두 사람의 지나친 경쟁에 스토리가 이상하게 구성이 되다 보니 말도 안 되는 결말이 나는 것이 되어 헨델의 오페라는 질적으로 좋지 않은 평판을 받게 된다.
이런 비정상적인 관행들이 지속되다 보니 자연히 오페라 음악 장르자체의 질적 하락을 초래했으며 관중들의 외면을 받게 되면서 영국에서 이탈리아 식 오페라가 몰락하게 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두 가수의 불화와 팬들의 동요는 결국 보논치니의 아스티아나테(Astianatte) 공연 무대에서 극에 달한다.
공연 중에 쿠초니와 보르도니가 서로 쥐어뜯고 싸우는 사태가 발생했다. 당일 공연은 어쩔 수 없이 끝냈지만 두 사람은 공연 내내 기싸움을 해댄 데다, 두 가수의 팬들끼리 싸움이 붙는 바람에 공연장은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 공연장에는 캐롤라인 왕세자빈을 비롯한 왕실 인사들이 다수 참석해 있었기 때문에 이 사건의 파장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 사건은 두 가수가 실제로 싸운 것이 아니라 단지 팬들이 소란을 일으킨 것이 와전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사실 두 사람의 라이벌 관계 자체도 언론과 팬덤에 의해 일부 과장된 측면이 있다고도 전해진다.
어쨌든 이사태로 왕실의 미움을 사게 된 헨델의 왕립음악아카데미의 오페라 공연은 무기한 중단되었다. 따라서 공연 수입도 얻지 못하고 왕실의 미움을 사게 된 아카데미와 헨델은 휘청거리게 된다.
2. 2차 왕립아카데미의 프리마돈나, 마리아 스트라다
헨델은 쿠초니와 보르도니라는 두 가수의 갈등으로 왕립아카데미 운영자체가 어렵게 되자 두 가수와 같은 명성은 없어도 지나치지 않고 노래실력도 출중한 가수가 필요했다.
마침 1732년 헨델은 심기일전하여 왕실의 도움을 받아 2차 왕립 음악 아카데미를 설립하였다.
쿠초니와 보르도니는 여전히 몸값도 비싼 데다 지나친 자존심과 라이벌의식 때문에 악단의 분위기를 망치기 일쑤였다. 그리고 툭하면 곡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서 곡을 거부하기도 하고, 본인이 원하는 대로 노래와 가사를 부르는 바람에 작곡가들도 한계를 맞이했다.
헨델은 다혈질로 악명이 높았던지라 더 이상 두사수와는 오페라를 함께하지 않았고 비교적 유순한 안나 스트라다를 프리마돈나로 중용하였다.
헨델의 2차 왕립 음악 아카데미에서 안나 마리아 스트라다(Anna Maria Strada)는 프리마돈나 내세우고 중요한 역할을 맡겼다.

안나 스트라다는 쿠초니와 보르도니보다 헨델에게 더욱 애정을 갖고 있었다. 그녀는 뚱뚱하고 못생긴 외모로 묘사되었지만 뛰어난 노래실력을 지녔으며 헨델의 오페라에서 주연 역할을 수행했다.
그녀는 헨델과 라이벌을 형성하고 있는 몇몇 귀족극단의 회유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헨델 편에 있었고 헨델에게 충성했다. 그리고 노래실력도 쿠초니와 보르도니보다 뛰어났다.
실제로 스트라다는 2차 왕립 음악 아카데미의 온갖 풍파 속에서도 헨델의 거의 모든 오페라의 주연을 맡았다.
다만 당시 안나 스트라다에 대한 기록을 따르면 한결같이 노래솜씨는 탁월하지만 뚱뚱하고 못생긴 외모가 몰입을 방해한다고 되어 있다.
한편 그녀는 1738년 홀연 이탈리아로 돌아가버리는데,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런던에서 오페라의 인기가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따라서 오페라 가수로서 더 이상 성공하기 어렵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아 이탈리아로 돌아갔다는 설이 정설이다.
실제로 스트라다는 이후 가수로서 활동은 미미했으며, 3년 후에는 이마저도 그만두고 은퇴했다.
3. 헨델의 개인적인 삶과 그의 죽음
헨델은 사치하는 성향에 엄청난 대식가였고 술도 굉장히 좋아했다. 그리고 헨델은 대머리였다. 그래서 항상 최고급이지만 가발을 사용했다고 한다. 헨델은 귀족 왕족에게 어필하기 위하여 화려하고 밝은 분위기의 무대음악을 많이 남겼다.
1737년, 헨델은 12,000 파운드의 부채로 파산 지경에 이르렀다. 이때 그는 건강을 해쳐 전지요양을 필요로 했다.
1741년 헨델은 이 해 여름에 작곡한 《메시아(구세주)》를 가져가 이듬해 봄 4월에 더블린의 닐즈 음악당에서 초연을 하여 열광적인 갈채를 받았다. 이것은 세계 각국에서 연말이면 반드시 연주하는 명곡이다.
또 하나의 명작은 1748년의 《왕궁의 불꽃의 음악》이다. 이곡은 오스트리아의 왕위 계승 전쟁의 끝을 맺고 아헨 조약을 체결한 축하 제전을 위해 작곡된 것이다.

헨델은 1750년 8월, 독일에서 런던으로 돌아오는 길에 네덜란드의 헤이그와 하를렘 사이에서 마차 사고로 중상을 입었다.
그리고 1751년 한쪽 눈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원인은 백내장이었는데, 당시 영국에서 명의라고 소문난 존 테일러로부터 수술을 받았는데 이 사람은 명성과 달리 실력이 형편없는 의사였다.
헨델의 눈은 이 돌팔이 의사의 수술로 더 악화되어 1752년에는 한쪽눈을 완전히 실명하고 말았다.
이 의사는 독일에서 바흐의 눈도 수술한 사람인데, 바흐의 눈도 실명되게 하는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했고, 수술로 인한 부작용으로 바흐가 사망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 제공자였다.
1752년 독일의 고향에 마지막 여행을 하고 돌아온 후, 한쪽눈마저 시력이 약해져서 고생했으나, 오라토리오 《예프타》를 완성하고, 오르간 연주와 창작 활동을 계속해 나갔다.
그리고 1759년 4월 14일에 세상을 떠났다. 헨델은 잉글랜드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