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드릭 쇼팽의 연인(1/2)콘스탄챠, 마리아 보진스카

낭만주의 피아니스트 프레드릭 쇼팽의 애절한 사랑이야기…

프레데리크 프랑수와 쇼팽(Frédéric François Chopin,1810.3.1.-1849.10.17.)은 폴란드의 바르샤바(Warsaw)에서 태어난 작곡가이자 낭만주의 시대의 거장 피아니스트였다.

낭만적인 피아니스트 쇼팽은 낭만주의자답게 여러 여성과의 로맨틱한 관계를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를 첫사랑의 열병을 앓게 했으나, 짝사랑에 그친 콘스탄챠 그와드 코프스카, 그리고 약혼까지 했지만 끝내 파혼을 해야 했던 약혼녀, 마리아 보진스키, 독특한 성격을 지녔으며 희대의 남성편력을 가진 조르쥬 상드, 이들 여성들과의 로맨스를 갖었지만 쇼팽은 결혼하지는 않았다.

낭만주의 피아니스트 프레드릭 쇼팽, 그의 사랑 속으로 들어가 보자.

1.쇼팽의 첫사랑, 콘스탄챠 그와드코프스카

1823년부터 1826년까지 쇼팽은 바르샤바 리세움에서 교육을 받았다. 1826년 가을에는 실레지아 출신 작곡가 엘스너의 지도로 바르샤바 음악원에서 3년 과정을 시작했으며 음악 이론, 피규어드 베이스, 작곡 등을 공부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바르샤바에서 콘서트와 샬롱에서 작곡과 연주를 이어가면서 “에올로멜로디콘”이라는 악기의 발명자들에게 고용되어 연주하였으며 차르로부터 다이아몬드 반지를 받기도 했다.

이후 그는 왕궁 근처의 크라신스키 궁전에서 1830년까지 생활하며 부모님이 운영하는 남학생 하숙집에서 학우들과 교감했다. 쇼팽은 바르샤바의 예술가들과 친분이 있었고, 1829년에는 음악원에서 “예외적인 재능, 음악적 천재”로 평가받았다.

1829년, 어린 19세의 쇼팽은 음악가라는 배고픈 직업을 선택해야 한다는 기로에서 고민했다. 그의 아버지는 고달픈 음악가의 길을 반대하고 나섰다. 그런데 그런 마음 상태의 쇼팽 앞에 나타난 소녀가 있었다. 같은 학교에 다니는 그녀에게서 자신의 이상형을 발견한 것이다. 자신의 진로에 대한 복잡한 생각은 그녀에게 향하는 그의 마음을 더욱 강렬하게 만들었다.

동갑내기로 짙은 머리의 소프라노 공부를 하는 콘스탄챠 그와드코프스카(Konstancja Gładkowska, 1810–1889)였다. 쇼팽은 그녀를 처음 본 후 6개월 동안 매일 밤 꿈속에 그녀를 보았다고 친구한테 고백했다. 그러나 숫기 없는 그는 말 한번 붙여볼 용기를 갖지 못했다. 다른 남자들에게 미소를 보내는 그녀를 보면 괜히 질투를 하는 정도였다.

콘스탄챠 그와드코프스카의 초상화

콘스탄챠는 파에르의 오페라 ‘아그네스’에서 주인공 역으로 데뷔무대를 가졌다. 그녀의 실력과 미모는 무대에서 더욱 빛났다. 비극적인 역할의 연기를 훌륭하게 소화했고 소프라노로서 고음처리도 완벽했다. 모든 관객이 그녀의 공연에 빠져들었고 오페라가 끝났을 때 끝없는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그녀의 가수로서의 길은 탄탄한 듯했다. 쇼팽은 콘스탄체의 매력에 빠졌고 그녀를 향한 마음은 더 커져갔다.

어느 날 성당에서 콘스탄챠를 본 쇼팽은 한편 슬프기도 하고 즐겁기도 한 묘한 감정에 빠졌다. 홀린 듯 정신이 멍한 상태로 거리로 나갔다가 달려오는 마차에 치일 뻔했다. 잠시 후 그는 정신을 차렸고 미친 것 같은 자신의 모습에 놀랐다.

콘스탄챠에게 말도 제대로 붙이지 못한 자신의 속마음을 그는 음악에 담았다. 당시에 쓴 쇼팽의 모든 작품에는 그녀에 대한 그의 감정이 담겨져 있다. 쇼팽은 바르샤바를 떠나는 고별 무대에서 ‘피아노 협주곡 e 단조’에 그녀에 대한 절절한 마음을 담아 연주하며 표현했다.

쇼팽은 그의 가족과 선생, 친구들의 떠들썩한 환송 속에 바르샤바를 떠나 빈으로 향했다. 그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르샤바에서는 러시아의 압제에 항거하는 대규모 무장봉기가 일어났다. 수개월에 걸친 그 시민봉기를 러시아는 힘으로 제압하면서 많은 폴란드 민간인이 희생되었다.

외국에서 이 소식을 들은 쇼팽은 크게 동요하였다. 조국의 앞날뿐만 아니라 가족과 콘스탄챠를 염려하며 괴로워했다. 쇼팽은 후에 파리에 도착해서도 첫사랑 콘스탄챠를 잊지 못하고 그리워했다. 그리고 둘 간에는 많지는 않지만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러나 쇼팽이 콘스탄차를 좋아했다는 것을 쇼팽이 사망할 때까지 몰랐던 것으로 봐서 사랑을 주고받은 편지라기보다는 친구로서의 일반적인 안부를 묻는 서신에 불과했을 가능성이 높다.

2.부유한 귀족과 결혼한 콘스탄차

쇼팽이 이렇게 마음을 주는 절절한 짝사랑을 했는지는 쇼팽 가족도 모르는 일이었다. 쇼팽은 바르샤바에서도 콘스탄챠에게 빠졌다가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고 곧바로 눈앞의 현실로 돌아왔고, 본인의 진로 문제로 고민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가족으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쇼팽이 파리에 완전히 정착하고, 마리아 보진스카를 만나서 약혼과 파혼하는 과정을 겪고, 조르주 상드를 만나 동거하는 등, 그동안 그의 첫사랑, 콘스탄챠는 잊혀졌다.

콘스탄챠는 졸업 후 승승장구하며 소프라노 가수로서의 음악경력을 계속 이어가며 오페라 무대에도 올랐다. 그녀의 공연 수익금은 폴란드 독립을 위해 싸우는 봉기 군을 후원하는 데 사용되었다고 한다.

쇼팽이 자신을 사랑했다는 것을 알지 못한 콘스탄챠는 쇼팽이 바르샤바를 떠나고 1년 3개월이 지났을 때 부유한 귀족과 결혼을 했다. 결혼과 함께 음악계를 떠나면서 그녀의 가수로서의 화려했으나 짧은 음악가로서의 경력은 끝났다.

신은 콘스탄챠에게 좋은 것만 주지는 않았다. 콘스탄챠는 35세의 젊은 나이에 시력장애를 앓아 결국 시력을 완전히 잃어 버렸다. 그리고 쇼팽도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후 쇼팽의 전기가 출간되었을 때, 친구가 읽어주는 쇼팽의 전기를 듣고서야 젊은 시절에 쇼팽이 자신을 짝사랑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콘스탄차는 이와 같은 사실을 듣고서도 자신의 결혼생활에 만족감을 드러내며 아무런 회한도 드러내지 않았다. 이미 지나간 일이라는 것이었다.

콘스탄차는 쇼팽보다 40년을 더 살았다. 그리고 쇼팽과 주고받은 편지와 쇼팽의 초상화도 소중히 보관하다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야 불태웠다고 전해진다.

3.쇼팽의 약혼녀, 마리아 보진스카

쇼팽은 1836년 마리아 보진스카(Maria Wodzińska. 1819-1896)라는 작곡가이며 취미로 그림을 그리는 여성과 약혼을 한 후 이듬해에 파혼한다.

마리아 보진스카는 백작의 딸로, 1832년에 제네바로 이사했는데 이곳에서 피아노와 그림실력을 인정받았다. 마리아는 올리브색 피부와 검은색 머리카락, 검은 눈을 가진 지중해풍의 미모를 가진 여성으로 한때 뤼-나폴레옹왕자(이후 나폴레옹 3세)도 마리아의 미모에 반했다고 알려져 있다.

마리아 보진스카의 초상화

1935년 마리아는 쇼팽의 왈츠를 받은 사람 중의 한 명으로 쇼팽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현재 남아있는 쇼팽의 초상화 중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고 한다. 쇼팽의 모습은 편안하고 생각에 잠겨있는 쇼팽의 초상화를 그려 모두에게 칭송을 받은 작품이다.

마리아의 미모에 반해 쇼팽은 청혼을 했고 마리아의 어머니에게는 승낙을 받아 약혼까지는 성공했지만 마리아의 아버지가 반대했다. 이유는 쇼팽의 건강이 안 좋아 보인다는 이유였다. 결과적으로 쇼팽이 39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사망한 것을 보면 그의 아버지의 눈은 정확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이듬해 1837년 파혼했다.

마리아는 5년 후인 1841년 쇼팽의 대부인 프리드릭스카벡의 아들 유제프와 결혼했으나 곧 이혼했으며, 1848년에는 유제프 부동산의 임차인 블라드슬로프와 결혼했다.
그와의 사이에는 아들을 낳았으나 4살 때 죽었고, 남편도 1881년에 사망하여 마리아는 홀로 되었다.

그런데 순진한 사랑꾼 쇼팽은 노련한 한 여인에게 순정을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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