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리스트의 연인(2/2), 캐롤린 비트겐슈타인 공주

프란츠 리스트의 여인(2/2), 캐롤린 비트겐 슈타인 공주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 1811. 10. 22. ~ 1886. 7. 31)는 “교향시의 창시자”라고 불리는 헝가리 태생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이다. 최고의 기교를 가진 역사상 최고의 피아니스트로서 “피아노의 신”, 바이올리니스트 파가니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해서 “피아노의 파가니니”라고 불리기도 한다.

프란츠 리스트는 5살 이전부터 피아노로 즉흥 연주를 시작한,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가진 음악천재였으며, 그의 아버지는 그의 음악적 재능을 키우기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했다.

프란츠 리스트의 초상화

그의 나이 21살 때 마리 다구( Marie d’Agoult, 1805~1876) 백작부인과 동거하여 세 자녀를 낳았고, 다른 여인과 많은 염문을 뿌리다, 그의 나이 33살 때 백작부인과 공식적으로 헤어졌다.

1. 리스트와 캐롤린 비트겐 슈타인 공주의 만남

리스트는 다구백작부인과 헤어진 후, 1847년 현재 우크라이나의 키이우에 연주여행을 하던 중 연주회에 참석한 카롤린 비트겐스타인 공주를 만나게 된다.

캐롤린 주 사인-비트겐슈타인 공주(Carolyne zu Sayn-Wittgenstein, 1819~1887)는 폴란드 귀족의 외동딸로 태어났으며, 아마추어 저널리스트이자 수필가였다.

1836년 그녀의 나이 17세 때 아버지의 압력으로 옛날귀족 가문의 일원이기도 한 러시아 군인 장교인 니콜라스공과 결혼했다.

캐롤린 공주의 초상화

그들은 니콜라스가 총독으로 재직한 키예프(키이우)에서 잠시 함께 살았지만 행복하지 않았고, 캐롤린의 많은 영지 중 하나인 곳의 시골집으로 이사했다. 그리고 1837년 마리( Marie Pauline Antoinette)라는 딸을 낳았다.

캐롤린 공주는 열렬한 로마 가톨릭 신자였지만, 결혼한 지 불과 몇 년 만에 남편과 별거하게 된다. 1844년 에는 그녀의 아버지가 사망하자 그녀에게 많은 재산을 남겨졌다. 이 재산은 나중에 리스트와 결혼을 하지 못하게 되는 원인이 된다.

캐롤린은 1847년 2월 2일 키예프(키이우)로 출장을 가는 동안 프란츠 리스트의 피아노 리사이틀에 참석하게 된다. 그리고 리스트의 연주실력에 반해 그녀의 딸 마리의 10번째 생일 파티를 위해 연주하여 줄 것을 제안한다.

캐롤린의 제안에 응하여 연주를 하고 자주 교류를 하자 둘은 서로의 매력에 이끌리게 된다. 그 다음부터는 리스트를 자주 초대하여 집에서 자주 지내게 된다. 그리고 리스트를 자신의 집에서 장기간 머물 수 있도록 조치한다.

재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게 된 리스트는 1847년 9월, 경제적 안정을 가져다주는 순회공연에서 은퇴하고 보로닌체에서 캐롤린과 함께 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작곡에 전념하여 종교와 관련된 상당한 곡을 작곡했다.

이듬해 리스트가 독일 바이마르 음악단의 카펠마이스터(음악감독)로 임명되자 , 캐롤린과 함께 바이마르로 이주했다. 이곳에서는 10년 넘게 머무르게 된다.

바이마르에 도착한 후 처음에는 리스트와 캐롤린 공주의 부적절한 관계를 의심하는 세간의 눈초리를 피하기 위해 리스트와 떨어져 살았다.

2. 교황청의 반대로 무산되는 캐롤린과 리스트의 결혼

캐롤린은 남편과의 관계를 정리하고 리스트와 결혼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남편인 러시아 군 장교 니콜라스 폰 사인-비트겐슈타인이 아직 살아 있었기 때문에 로마 가톨릭 당국에 그와의 결혼이 무효임을 납득시키고 허락을 받아야 만 했다.

캐롤린은 러시아를 떠나기 전에 상트페테르부르크 대주교에게 니콜라스와의 결혼이 무효임을 호소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두 사람은 남의 눈을 의식하는 것을 과감히 버리고 1848년 가을부터 동거를 시작했다. 니콜라스는 캐롤린과의 결혼이 사실상 끝났다는 것을 알고, 1850년에 결혼을 무효화하기로 합의한다.

그리고 니콜라스는 캐롤린의 재산 중 일부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 합의는 1851년 법원에 의해 인정받지 못하고 파기되었다. 이후 10년 동안 복잡한 상황을 통해 협상을 계속하게 된다.

캐롤린은 1860년 로마로 이주하여 리스트와의 결혼을 성사시키기 위하여 힘쓴다. 두 명의 교황을 직접 알현하는 복잡한 과정을 거친 후, 드디어 그녀는 반승낙을 받는 데 성공했다.

두 사람은 리스트의 50번째 생일인 1861년 10월 22일에 로마에서 결혼할 계획이었다. 리스트는 10월 21일 로마에 도착했지만, 전날 바티칸 관리가 결혼식을 막기 위해 로마에 도착했다.

이러한 조치는 캐롤린의 복잡한 상속재산이 보호하기를 원했던 호헨로에 추기경의 음모의 결과에 따른 방해조치였다. 러시아의 황제 알렉산드르 2세가 바티칸에서 니콜라스와 캐롤린의 결혼이 유효하다는 판단을 내렸을 가능성이 있다며 캐롤린의 영지를 압류한 것이다.

캐롤린과 그의 딸 마리의 초상화

리스트는 공주가 그와 결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로 인해 캐롤린은 리스트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결혼도 실현될 수 없음을 알게 된 것이다.

캐롤린은 수천 명의 농노를 가진 여러 영지를 아버지로부터 상속하여 소유하고 있었으며, 더욱이 자신과 리스트의 결혼으로 인한 재산의 압류가 자신의 딸 마리의 결혼하는데 해를 끼칠 것을 두려워했다.

이 조치는 니콜라스공이 자신의 아내, 캐롤린의 예정된 재혼을 중단시킨 주된 이유였다. 그들의 딸, 마리는 1859년 호헨로에 콘스탄틴 왕자와 결혼했다.

3. 플라토닉 사랑으로 남은 리스트와 캐롤린의 사랑

결혼이 무산된 후, 캐롤린과 리스트의 관계는 플라토닉한 동반자 관계가 되었는데, 캐롤린은 1864년 남편 니콜라스가 사망한 후에도 리스트와 결혼하려는 모든 시도를 포기했다,

1860년대는 리스트의 사생활에서 큰 슬픔의 시기였다. 1859년 12월에는 갓 20세의 아들 다니엘을 알 수 없는 병으로 죽었다. 그리고 1862년 9월에는 26세 딸이 아들을 낳은 직후 패혈증에 걸려 사망했다.

리스트는 1863년 6월 로마 외곽에 있는 수도원 마돈나 델 로사리오로 거처를 옮겨 작은 아파트에 숙소를 잡고 피아노를 가지고 작곡을 계속했다

1865년 이후 리스트는 가톨릭 교회에서 작은 수도회를 받고 수도원장이 되었다. 리스트와 캐롤린은 더 이상 함께 살지 않았지만 리스트가 로마에 있을 때 함께 식사를 하고 서로를 유산의 주요 수혜자로 지명하는 등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캐롤린은 로마에서 마지막 수십 년을 보내며 교회 문제에 대해 매우 비판적으로 광범위하게 글을 썼다. 자신의 재혼에 끈질기게 방해 역할을 한 교황청에 불만을 품은 것도 한 이유였다.

캐롤린은 1868년부터 1887년까지 약 10여 년 동안 44권의 산문을 출판하였고 그녀의 작품 대부분은 개인 재산으로 인쇄되었다. 그중 으뜸은 1870년에 출간된 「교회의 외적 약점에 대한 내적 이유였다. 이 책은 24권으로 된 방대한 책이다.

리스트는 1881년 7월, 계단에서 넘어지는 사고를 당해 이후 몇 주 동안 병상에 누워 지냈다. 리스트는 이때까지는 건강했지만 이후 왼쪽 눈의 백내장, 치아 문제등 여러 질병이 나타났다.

그리고 5년 후 1886년 7월 31일 자정 무렵 74세의 나이로 사망했는데, 공식적으로는 폐렴으로 인한 것이지만 실제 사인은 심장마비였을 수 있다는 설도 만만치 않다.

리스트는 하나 남은 그의 딸 (바그너의 연인) 코지마(Cosima)의 소원에 따라 1886년 8월 3일 바이로이트 시립 묘지에 묻혔다.

코지마와 바그너의 사진 이미지

캐롤린은 리스트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아 이후 몇 달밖에 살지 못하다가 1887년 3월 9일 로마에서 사망했다.

4. 프란츠 리스트의 삶과 음악적 발자취

프란츠 리스트는 어려서부터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나타낸 음악 천재였다. 그리고 그의 잘생긴 외모로도 알려져 있었다.

그의 검은 긴 머리와 근육질인 체형, 선명한 눈, 그런 외모에서 나오는 카리스마가 여성들에게 큰 매력을 느끼게 하였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었다.

실제로 리스트는 연주자로서 무대 위에서의 매너는 매우 화려했으며, 그의 피아노 연주 스타일과 동작은 많은 이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러한 인기는 그를 바람둥이로 만들었다. 그의 연인들 중에는 피아니스트이며 가수인 폴린 비아르도(Pauline Viardot)와 피아니스트인 오딘 한스타인(Odine Hanstein)이 있다.​

오딘과 리스트의 관계에 대해서 특별히 알려진 것은 없다. 소프라노 가수인 폴린 비아도르(Pauline Viardot, 1821~1910)는 에스파냐계 프랑스의 소프라노가수 겸 작곡가로서 러시아의 음악을 서유럽에 소개한 최초의 음악가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폭넓은 음역으로 주목받은 가수였으며 극적 성격이 강한 배역을 통해 유명하다.

프란츠 리스트의 연인(2/2), 캐롤린 비트겐슈타인 공주 1

폴린과 리스트의 관계는 폴린이 어릴 때 리스트로부터 피아노를 배우면서 가진 만남 이외에 특별히 알려진 바는 없으나, 폴린의 어머니의 반대로 피아니스트를 포기한다. 나중에 이를 일생의 가장 큰 후회를 하게 되는데, 어머니의 반대는 리스트 때문은 아니었는지, 아니면 어떤 이유였는지 궁금하다.

피아노의 신 프란츠 리스트는 피아니스트로 활동한 시간은 채 10년도 안되지만, 지금도 역사상 가장 위대한 피아니스트로 추앙받고 있다. 또한, 그는 신낭만파에 속하는 낭만파 시대 대표적인 작곡가 중 한 명으로서, 교향시를 창시하여 음악에 문학적 요소를 도입하고 자유스러운 화성을 사용하여 음악계에 큰 영향을 준 뛰어난 음악가로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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