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치니의 연인, 엘비라 제미냐니

푸치니의 연인, 엘비라 재미냐니와의 사랑이야기

자코모 푸치니(Giacomo Puccini. 1858.12.22 ~ 1924.11.29)는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오페라 작곡가이다. 그의 대표작품으로 《라보엠 La Boheme》, 《토스카 Tosca》,《나비부인 Madame Butterfly》《투란도트 Turandot)가 있다. 유려하고도 애절한 정에 넘치는 선율, 자신의 양식에 적합할 뿐만 아니라 청중에게도 호소력이 큰 대본의 선택 등에 의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런 푸치니의 여성 편력은 심했다. 심해도 아주 심했다. 그리고 뭇 여성들로부터 인기가 좋았다. 그의 음악적 재능, 정열적인 성격, 로맨틱한 이미지, 거기다가 유머 감각까지 그리고 이해도 높은 문화적인 맥락에서의 성공으로 많은 인기를 끌었다.

이러한 푸치니의 인기는 그의 예술과 함께 삶을 복잡하고 격동적으로 만들어 얽히고 또 뒤얽혔다.

그런데도 그는 끊임없이 스캔들을 달고 살았다. 역설적으로 푸치니의 복잡하게 뒤얽히며 겪었던 풍부한 연애 경험은 작곡가로서 예술작품 창작에 있어 충분한 리소스를 제공했고 푸치니는 불세출의 역작들을 만들어 냈다.

1. 푸치니와 유부녀 엘비라와의 만남

푸치니의 결혼 생활은 못된 사랑에서 나온 고통의 연속으로 표현될 수 있다. 유부녀 엘비라와의 만남은 시작에 불과했다.

푸치니는 이탈리아 중부 한가한 도시 루카에서 춥고 배고픈 음악가의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이런 어려운 처지의 푸치니에게 친구 나르시소 제미냐니(Narciso Gemignani)는 푸치니에게 경제적으로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라고 자신의 아내 엘비라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게 해 주었다. 푸치니가 엘비라와의 만남은 세 사람을 격동으로 몰아넣는 일대 사건이 된다.

1885년의 엘비라

나르시소가 푸치니에게 베푼 호의, 즉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격인 이 호의는 나르시소에서 평생의 치명적인 아픔과 후회를 남기게 된다.

둘은 피아노를 사이에 두고 피아노를 배우고 가르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일주일 만에 세 아이의 엄마인 엘비라( Elvira Gemignani, 1860-1930)와 밀라노로 야반도주를 한다. 1884년 가을, 푸치니의 나이 26살, 엘비라의 나이 24살 때의 일이다.
도피행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가난한 푸치니가 밀라노에서 오래 지내기에는 능력이 부족했다.

다시 루카로 돌아와 친구 나르시소에 치도곤을 치렀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엘비라는 푸치니와의 관계에서 임신하게 되었고, 임신이 드러나자 엘비라는 루카를 떠나 소문을 피하기 위해 루카를 떠나 다른 곳 몬차(Monza)로 가서 출산을 한다. 이로써 복잡한 가족 상황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들의 아들 안토니오(Antonio, 1886-1946)가 태어난다.

이 일로 나르시소는 푸치니와 엘비라를 극도로 저주했다. 그리고 자신이 살아생전에 절대로 이혼해 주지 않는다고 결심하며, 결과적으로 실제 죽을 때까지 이혼해주지 않았다.

그로부터 20년 후 1903년 초가월, 아내를 뺏긴 나리시소가 외도를 저질렀는데 상대여인의 남편에게 들켜서, 불행하게도 살해당하고 만다. 푸치니의 잘못된 사랑의 결과로 살해당하는 일까지 발생하고 만 것이다.

엘비라는 남편의 장례를 치르자마자 푸치니와 결혼식을 하며 정식 부부가 되었다. 둘의 불륜에서 태어난 안토니오도 합법적으로 푸치니의 아들이 되었다.

2.엘비라의 푸치니에 대한 집착

나르시소와 엘비라의 결혼생활은 행복하지 않았다. 무려 20년 만에 정식부부가 되었지만 정식부부가 되기 전부터 이들의 복잡한 연인으로서의 결혼생활은 푸치니가 많은 여자와 불륜을 저지르기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엘비라 제미냐니 푸치니의 사진

그리고 엘비라는 강한 성격을 지닌 여성이었으며 푸치니에게 집착했다. 푸치는 당대의 최고의 스타 작곡가로서 푸치니 주변에는 항상 여성들이 많았다.
이러한 푸치니의 주변에 들끓는 여인들로 인해 엘비라는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푸치니와 자주 다투게 된다.

푸치니는 여자를 가리지 않았다. 친구 동생, 귀족부인들 뿐만 아니라 유명 가수들과도 염문을 뿌렸다. 마리아 제리차(Marie Jedličková), 에미 데스틴(Ema Destinnová) , 체시라 페라니(Cesira Ferrani), 하리클레아 다르클레(Hariclea Darclée)가 푸치니의 연인이 되었다.

마리아 체리치, 체시라 페라니, 에미데스틴의 사진

1906년, 푸치는 부다페스트에서 ‘나비부인’ 개막식을 관람하면서 친구인 에르빈 렌드바이의 여동생 블랑케 렌드바이(Blanke Lendvai)에게 첫눈에 반했다. 그리고 또 사랑에 빠졌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1909년에는 도리아 만프레디(Doria Manfredi) 사건이 터졌다.

1903년, 푸치니는 자동차 사고로 심한 다리 부상을 입게 되었다. 불편한 몸을 추슬러야 하는 푸치니를 돌보기 위해 도리아 만프레디(Doria Manfredi)라는 여성을 고용해 푸치니를 돌보게 했다.

도리아는 푸치니를 정성껏 성심성의껏 돌봐주었고, 푸치니는 큰 불편 없이 지내게 되었다. 하지만 푸치니의 추문행각에 노이로제가 걸려있던 엘비라는 도리아와 푸치니의 관계를 의심했다.
엘비라는 도리아에게 질투를 느껴 몹쓸 짓을 하며 괴롭히며 고통을 주었다. 도리아는 결백하다는 주장을 했지만 한번 시작된 엘비라의 의심은 끝이 없었다. 고통을 견지지 못한 도리아는 결국 1909년 자살을 한다.

도리아의 자살사건을 수사한 경찰은 도리아를 부검하였지만 엘비라의 주장과 달리 도리아는 처녀로 확인되었다.

도리아 맨프레드의 사진

이후 엘비라는 중상모략 혐의로 기소되어 5개월 이상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푸치니는 거액의 벌금과 피해가족에게 위자료를 주고 용서를 빌어 엘비라는 복역하지는 않았다.

이 사건은 당시 푸치니와 관련한 일대 사건이었고 푸치니도 작곡작품 활동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측되며, 작품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의 만드는 데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했다.

나중에 푸치니를 연구하는 사람들에 의해 새롭게 밝혀진 내용이 있는데, 2007년 만프레의 후손은 나디아의 유품에서 문서를 발견하여 공개하였다.
문서에 따르면 푸치니는 본인의 사촌간인 줄리아 만프레디(Giulia Manfredi)와 불륜을 저질렀다는 내용이다. 못말리는 푸치니의 바람기다. 나디아가 왜 당시 이 같은 사실을 밝히지 않고, 자살로 생을 마감했는지는 여러 추측이 가능하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3. 끊임없는 푸치니의 스캔들

푸치니는 나디와의 사건이 일어나기 전인 1906년, 부다페스트에서 ‘나비부인’ 개막식 관람 중에 친구인 에르빈 렌드바이의 여동생 블랑케 렌드바이(Blanke Lendvai)에게 첫눈에 반했다. 둘은 사랑에 빠졌다.

1911년에는 독일 귀족인 조제핀 폰 스탕겔 바론(Josephine von Stange)과 사랑에 빠져 무려 6년 동안 지속되었다.

푸치니는 여러 여성들과의 불륜으로 인해 여러 스캔들과 문제를 겪었지만, 그의 작품에서 여성 캐릭터의 비극적인 운명을 묘사하는 데에도 영감을 받아 작품 창작활동에 반영했다.

푸치니의 불륜과 관련된 사건은 당시 이탈리아의 사회적, 문화적 변화와 함께 갈등의 소재로도 자리 잡았다. 예술가로서의 푸치니와 그의 작품에 대한 평가와 병행하여 그의 개인적인 삶에 대한 편견과 비난도 함께 이어지기도 했다.

특히, 여성에 대한 태도와 가족의 가치 등에 대한 사회적 기준을 넘나들면서 푸치니는 그의 시대적 환경에서 상당한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종국적으로는 푸치니의 여성편력은 당시에는 허용되는 행동으로 여겨지게 된다.
이는 이탈리아에 파시즘(fascism)이 득세하던 시기의 사회기류와 반페미니즘(feminism)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이탈리아 국민성이 성에 관대하다는 것이 가장 큰 몫을 한 것으로 보는 게 맞을 것이다.

4. 푸치니의 염문과 작품에 미친 영향과 그의 죽음


매번 푸치니가 발표하는 오페라의 여주인공과 사랑을 했던 푸치니는 자신의 주요 작품에서 비련의 여주인공이 죽음을 맞이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는 본인의 불행한 결혼 생활이나 여성들과의 불륜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작품창작에 반영하였던 것으로 해석된다.

또, 보상심리로 그의 불행한 결혼 생활을 언급하며, 강한 성격과 질투심으로 많은 사건을 일으킨 아내 엘비라 때문에 그녀와 반대되는 캐릭터를 지닌 여인을 자신에 작품에 등장시켜 그녀들을 사랑했다.

푸치니는 자신을 “극장을 위해 작곡하도록 신의 명령을 받았다”라고 말하며 본인이 탁월한 예술 천재임을 부각시켰으며, 숱한 염문에 대해서는 자신을 “여성들에 매력 있는 열정적인 존재”로 묘사하였다.

잘 나가던 푸치니에게도 세월은 야속하게 지나갔고 건강하던 그에게도 병마가 찾아왔다.
1923년 말, 푸치니는 만성인 목 자극에 통증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목의 암 진단으로 인해 의사들은 브뤼셀에서 제공되는 새롭고 실험적인 방사선 치료를 권했다.

푸치니의 말년 사진

당시 푸치니와 엘비라는 암이 얼마나 심각한 병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으며, 병원에서는 이 소식은 그의 아들, 안토니오에게만 알려졌다.

1924년 11월 29일, 푸치니는 브뤼셀에서 수술치료 후 합병증으로 65세로 사망했으며, 수술 후에 무절제한 출혈이 심장 마비로 이어져 일어난 사망으로 알려져 있다.

사망 소식은 <라 보엠> 공연 중에 로마에 전해졌다. 이 오페라는 즉시 중단되었고, 오케스트라는 근접한 엄숙한 장례음악을 연주했다.

사망한 푸치니는 밀라노의 토스카니니 가족 무덤에 안장되었다. 그리고 1926년, 그의 아들 안토니오는 그의 유해를 토레 델 라고의 푸치니 빌라 내에 특별히 만들어진 장소에 이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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