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치아노 파바로티 (Luciano Pavarotti, 1935.10.12.-2007.9.6.)는 이탈리아가 자랑하는 불세출의 테너가수다.
그의 크고 빼어난 고음은 유명하다. 플라시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와 함께 ‘3대 테너’로도 알려져 있다.
파바로티는 못 말리는 호색한이었다. 결혼하여 35년을 함께 한 아두아 베로니는 매우 현명했다. 남편의 바람기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도 참아주었다. 그러나 두번째 부인이 되는 니콜레타 만토바니와 함께 사진이 찍혀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자 더 이상은 참지 않았다.
공식적으로 알려진 여인으로, 마들렌 르네와의 헤어짐이 얼마되지 않아 그의 여성편력은 다시 시작 되었다.
1. 비서 니콜레타 만토바니(Nicoletta Mantovani)와의 만남
1991년 자선활동을 하고 있는 다이애나 왕세자비를 만난다. 그리고 다이애나의 자선활동에 감동을 받은 파바로티는 자선활동에 더 많이 참여하게 된다.
그리고 엘튼 존(Elton John)과 스팅(Sting)과 같은 팝 뮤지션들과 함께 기금을 모으는 콘서트를 함께 열었다. 제목은 파바로티와 친구들(Pavarotti And Friends)의 자선 콘서트였다.
이 콘서트가 있은 후 니콜레타 만토바니(Nicoletta Mantovani)라는 대학생으로 경마장에서 아르바이트 일을 하고 있었다. 때는 1992년이고 니콜레타는 23세였고, 파바로티는 57세였다.

니콜레타는 다른 사람들에게 본인은 파바로티의 조수라고 본인을 소개했다. 그러나 그들의 관계는 이미 깊어 질대로 깊어진 사이였다.
니콜레타가 34세 연상의 남자와 연애 중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 변명에 루치아노는 훌륭하게 수비하여 주었다. 그리고 니콜레타를 보호해 주었다.
그들이 만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니콜레타는 다발성경화증에 걸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사실을 파바로티가 알게 되면 둘 간의 사이가 나빠질 것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파바로티는 그녀에게 “지금까지 당신은 나를 사랑했다. 이제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라 말하며 니콜레타를 안심시켰다.
타고난 호색한으로서 보여주는 인간미다. 그리고 그녀를 진정으로 사랑했던 파바로티다.
2. 파바로티와 아두아 베르니의 이혼
이 커플의 비밀유지는 1996년 카리브해 바베이도스에서 휴가를 보내며 키스하는 모습이 사진에 찍히기 전까지 몇 년 동안이었다.
항간에 니콜레타가 계산적으로 언론에 흘렸을 가능성을 강하게 의심했으나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다.
이 사진을 보고 분노한 아두아는 이혼 소송을 제기하고 1억 2,800만 달러를 요구했다. 파바로티의 팬들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알고 있는 파바로티에게 경악을 금치 못했다.

파바로티가 천문학적인 위자료의 지급을 거부했고 아내 아드아와 위자료를 깍기 위한 소송에 돌입했다. 파바로티는 소송에서 조금이라도 유리함을 차지하기 위해, 이탈리아 당국의 수사에 적극 협조했고 1400만 달러의 체납 세금을 납부까지 했다.
아두아는 파바로티의 니콜레타와의 불륜행위에 대해 “루머를 들어 짐작을 하고 있었지만 결코 믿고 싶지 않았다”라고 하며 일말의 기대를 하고 있었던 것을 표현했다.
아두아는 법정투쟁 끝에 이미 성인이 된 3명의 딸의 양육비를 포함해 1억 2000만 달러(당시 약 1120억 원)의 위자료를 받았다.
하지만 이혼 후에도 아두아는 여전히 고향 모데나에서 파바로티의 부모와 그들의 3자녀와 함께 살았다.
그리고 해오던 파바로티의 명성으로 하던 로얄티 사업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두 사람의 이혼은 오래지 않은 2000년 안에 끝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파바로티는 기자들에게 나이 어린 연인과의 관계에 있어 비아그라의 장점을 칭찬하는 발언을 하며 성관계에 대한 멘트를 날린다.
아두아의 쓰린 상처에 소금을 뿌려 35년의 결혼 생활에 대한 보답(?)을 호색한답게 한 것이다.
3. 니콜레타와의 결혼 그리고 파바로티의 죽음
둘은 2003년에 결혼했다. 이 무렵 니콜레타는 쌍둥이를 임신했고, 아들은 사산되었지만 딸 앨리스는 파바로티의 인생의 빛과 같이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
2004년, 파바로티는 40회의 콘서트 투어를 시작했지만, 예전 같지 않는다는 이유로 오페라 팬들의 비판을 받았을 만큼 예전의 건강하던 파바로티가 아니었다.
투어가 끝나기 전인 2006년, 파바로티는 췌장암 진단을 받았고, 그 이후, 그의 인생의 마지막 14개월은 파란만장한 세월을 보냈다.
파바로티의 30년 친구인 마르카(Lidia La Marca) 박사는 니콜레타가 자신에게 파바로티의”미국식” 유언장에 서명하도록 강요했었다고 주장했다.
이 행위는 니콜레타가 비교적 자신에게 유리하게 작용하는 미국식 유언장을 미리 작성하여 차후 파바로티가 사망한 후 유산을 조금이라도 더 받고자 함을 의미한다.

2007년 9월 파바로티는 자신의 고향 모데나에서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5만 명의 인파가 그를 조문했다.
아두아와 세 딸, 그리고 니콜레타 사이에 4억 5천만 달러의 재산을 놓고 1년에 걸친 법정 싸움이 벌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