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드 모네의 연인(2/2), 두번째 여인, 엘리스 오셰데

클로드 모네의 연인(2/2), 카미유 돈시외, 그의 두 번째 아내, 엘리스 오셰데

클로드 모네(Oscar-Claude Monet, 1840~1926)는 프랑스의 인상파 화가로 ‘인상(印象)주의’의 창시자로, 자연의 빛과 색채를 중시하고, 그에 대한 인상을 그리는 미술사조로 미술계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모네는 평생 두 여인과 사랑을 했다. 젊은 나이에 만난 카미유 돈시외는 32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갑작스럽게 병사한다. 사랑하는 아내를 잃게 된 모네는 그의 후원자였던 어니스트 오셰데의 아내인 엘리스라는 유부녀를 사랑하여 외로움을 달랜다.

지난 편에서는 카미유 돈시외와의 사랑을 알아보았다. 이번 편에서는 그의 두 번째 사랑, 엘리스 오셰데와의 사랑을 알아본다. 인상(印象)주의 화풍에서 빛과 색채의 변화하는 모습을 화폭에 옮긴, 수련(垂蓮)을 연작으로 그린 화가, 모네의 여인, 엘리스 오셰데에 대해 알아본다.

1. 클로드 모네의 후원자 어니스트 오셰데의 아내. 엘리스와의 만남

인상파의 그림이 궤도에 오르기 전인 1873년부터 인상파 화가의 후원자가 있었는데, 그는 어니스트 오세테( Ernest Hoschedé)라는 미술 평론가이면서 미술작품에 투자자였다.

잘 나가던 후원자 어니스트 오셰데가 경기 불황으로 파산하게 되고 잠적해 버렸다. 남겨진 아내 엘리스와 아이들이 이곳저곳을 전전하게 되어, 모네의 가족과 엘리스에게 여섯 자녀가 함께 살게 되었다.

아내 카미유가 죽은 이후, 모네는 모네는 실의에 빠져 있을 수 만은 없었다. 멍하게 보기만 했던 세느강의 매력에 빠져 세느강의 모습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세느강을 그린 그림은 곧바로 살롱전에 출품하게 됐다. 그 중 한 점은 미술평론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아 모네의 세느강 그림은 본격적인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수련이라는 작품을 연작으로 그리게 되는 계기가 된다.

클로드 모네의 연인(2/2), 두번째 여인, 엘리스 오셰데 1

세느강이 빛에 따라 변해가는 모습을 그린 그림들은 모네의 마음에 위안을 주었고, 이런 모습을 옆에서 안타까워하며 지켜봐 주는 엘리스는 마음을 안정되게 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게다가 엘리스는 본인의 여섯 아이와 함께 카미유와 자신의 두 아이를 진정으로 케어해 줘서, 모네가 가정적인 안정감까지 느끼게 되어 그림작업에만 몰두 할 수 있었다. 모네가 엘리스를 고마워하는 마음은 연정으로 바뀌어, 둘은 곧 연인이 되었다.

2.똑똑하고 영리한 여자, 엘리스 오셰데

엘리스 오세데(Alice Raingo Hoschedé,1844~1911)는 이때에도 여전히 어니스트 오세데 아내로서 여섯명의 자녀를 둔 엄연한 유부녀였다.
그녀는 파리에서 태어났고, 똑똑하고 섬세했으며 강한 의지를 갖고 있는 예쁜 여자였다.

1863년에는 사업가인 어니스트 오셰데( Ernest Hoschedé)를 만나 결혼했는데, 1876년 남편이 모네와 인상파 화가들을 후원하게 되고, 남편이 본인에게 선물할 장식패널과 풍경화를 그려달라고 모네에게 의뢰하면서 모네를 처음 만나게 된다.

그런데, 사업적으로 잘 나가던 남편이 파산하게 되면서 남편과 예기치 않게 헤어지게 된다. 남편은 채권자를 피해 벨기에로 대피하고, 엘리스와 그녀의 여섯 자녀들은 이곳저곳을 떠돌았는데 모네의 제안으로 모네의 집으로 이사하여 함께 살게 된다.

1881년, 모네와 엘리스를 비롯한 그들의 자녀들과 함께 프아시(Poissy)로 이사했고, 1883년에는 노르망디 지방의 지베르니(Giverny)의 집을 임대하여 살게 된다. 지베르니의 집은 정원과 연못이 있는 집이었는데, 모네는 헛간을 작업실로 사용하며 지금까지 누리지 못했던 마음의 안정을 찾았고 비록 유부녀의 신분이지만 부족함이 없는 연인, 엘리스와 함께하는 안정된 가정은 모네에게 마음의 여유를 제공했다. 근처에는 학교도 있었는데, 카미유의 두아이들과 앨리스의 여섯 아이에게 알맞은 교육여건을 제공했다.
이러한 안정은 지베르니의 이 집에서 모네의 가장 유명한 작품이 그려지게 되는 원동력이 된다.

지르베니의 정원

그동안 어니스트 오셰데(Ernest Hoschedé)는 아내 엘리스와 아이들을 만나기 위해, 모네와 엘리스가 가는 베테유(Vétheuil), 푸아시(Poissy), 지베르니(Giverny)의 집에 와서 엘리스와 아이들을 만났다. 그 시간 동안에는 모네는 자리를 피해 줬다. 하지만 앨리스와의 잠깐동안이라도 이별은 모네에게 악몽과 같은 큰 고통을 안겨주었다. 모네는 그림을 그릴 수 도 없을 만큼 괴로워했으며 힘들어했다. 이미 모네와 엘리스는 깊은 관계였고 모네의 마음속에 엘리스가 너무 깊게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앨리스의 존재는 지베르니 동네의 이웃주민에게도 그랬지만 엘리스의 남편인 어니스트에게는 일종의 스캔들이었다. 본인의 파산에 따른 경제적 어려움으로 카미유가 투병 끝에 유명을 달리한 집에서 한동안 함께 살았던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프아시와 지베르니로 이사하는데 까지 따라가며 함께 산다는 것을 마을 주민들도 이해하지 못했고, 어니스트도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물론 둘은 계획된 것이었다.

더 이상 두고만 볼 수 없었던 어니스트는 엘리스에게 본인이 잃어버린 재산을 되찾기 위해 함께하자는 제안을 하며 파리에 같이 갈 것을 설득했지만, 엘리스는 냉정히 거절했다. 1886년의 일이다.

엘리스의 거절이유도 있었다. 어니스트는 모네와 엘리스가 프아시로 이사하기 전부터 가족의 생활비를 지급하지 않아, 엘리스의 마음이 어니스트에게 멀어졌을 뿐만 아니라, 마음속에는 이미 클로드 모네가 차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미 모네의 여자였기 때문이다.

3.클로드 모네와 엘리스의 재혼

모네는 어니스트 오셰데와 엘리스가 이혼도 하지 않고 살아있을 때, 엘리스에게 청혼도 했었다. 그러나 남편과의 관계가 정리되지 않았다고 엘리스가 거절했었다.
어니스트 오셰대는 이후로도 오랜 시간이 지난 1891년 사망했다. 엘리스는 남편이 죽은 다음에야 모네의 청혼에 동의했으며 1892년에 둘은 재혼했다.

모네가 그린 엘리스 오셰대

앨리스 오셰데는 태생이 프랑스 중상류층 가문 출신으로, 모네와의 관계가 모호했음에도, 모네와 결혼 전에도 지베르니 마을 사람들이 손가락질하지 않고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행동거지를 조심히 했고 적절히 행동했다. 엘리스는 애정 어린 마음과 리더십으로 자신의 여섯 자녀뿐만 아니라 모네의 두 아들의 교육을 담당했다. 엘리스의 셋째 딸인 수잔(Suzanne)은 모네의 모델이 되어 많은 작품을 그리기도 했고, 모네를 기쁘게 했다.

모네는 자신의 그림에 대한 다양한 모티브를 얻기 위해 여행을 많이 했다. 엘리스와 결혼을 하기 전인 1883년부터 결혼 후인 1908년 사이 아내와 함께 지중해, 베네치아, 런던을 자주 여행했으며, 지중해를 여행할 때에는 바다 풍경을 주로 그렸다.
그런데, 1905년 모네의 눈에 백내장의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백내장과 추위 때문에 야외에서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어 베네치아를 떠났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앨리스의 건강도 나빠지기 시작했다.

4.엘리스의 투병과 죽음

앨리스는 처음에 잦은 여행과 많은 자녀들의 양육으로 피로와 간 마비로 고생했다. 1909년 1월에는 3주 동안 병상에 누워 있었다. 같은 해 9월, 일기장에 이렇게 괴로움을 적어 놓았다.
“삶은 도덕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점점 더 슬퍼지고 있다. 남편 모네는 나의 아픔에 슬퍼하고, 낙담하고, 고통스러워하며 그림도 그리지 않는다. 나는 너무나 약해졌다. 너무 아파서 그걸 남편이 알면 더 괴로워할까 봐 숨기고 있다”라고 말했다.
앨리스는 본인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강하게 느꼈다. 그녀에 관한 본인의 직감은 불행하게도 맞았고, 결국 1911년 5월 19일에 골수성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그의 나이 67세였고, 4살 많은 모네는 15년을 더 살았다.

엘리스가 죽던 날 밤, 큰 슬픔에 잠겨 비탄에 빠져 통곡했으며, 모네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고 실의에 빠지게 했다.
모네는 젊은 시절에 사랑하는 여인 카미유와 함께 했지만, 32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하여 헤어지고, 바래왔던 곳에 집을 얻고 사랑하는 아내와 부유한 생활을 했지만, 이마저도 오래가지 않았다. 아내 엘리스의 죽음은 그에게 크나큰 시련이었다.
가난했던 시절을 함께 견뎌냈던 친구들이 세상을 떠나기 시작하고, 사랑하는 아내도 세상을 떠났다. 모네 본인도 백내장에 걸려 그림을 그릴 수 없는 상황에 다다랐다.

엘리스 오셰대의 가족들 사진

그러나, 모네는 실연의 아픔과 거의 실명해 가는 상태에서도 빛에 따라 달라지는 정원의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죽기 1년 전까지 그림을 그렸다. 노화가의 마지막 투혼인 셈이었다.
항간에는 모네의 시력장애가 오히려 빛과 색상의 변화를 그리는 추상화를 그리기에 좋은 영향을 미쳤다는 의견도 있지만, 지나친 억측이다. 화가에게 백내장 같은 시각장애는 치명적이다.

“모네의 그림을 완성도 높은 작품은 ‘인상, 해돋이’가 아니라 수련”이라고 말하는 그림 전문가도 많다. 모네는 카미유가 죽은 이후 1899년부터 20년 동안 그에게 영감을 주기 시작한 “수련”을 연작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그에게는 200여 점의 수련이 있다.

엘리스와 어니스트의 딸 블랑쉬 오셰데는 모네와 카미유의 아들 장(Jean)과 결혼했다. 그러나 단명도 내력이었는지 장(Jean)도 47세라는 젊은 나이에 죽고 만다. 그의 모친, 카미유는 32살에 병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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