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드 모네(Oscar-Claude Monet, 1840~1926)는 프랑스의 인상파 화가로 ‘인상(印象) 주의’의 창시자라 할 수 있으며, 서양 미술사에서 중요하고 유명한 화가로 손꼽히는 인물 중 한 명이다. 대상을 명확하게 표현하는 전통 회화 기법보다는, 자연의 빛과 색채를 중시하고, 그 효과를 포착하여 그에 대한 인상을 그리는 미술사조로 당시 미술계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인상주의’ 미술 기조의 명칭 자체가 모네의 작품 <인상, 해돋이>라는 작품에서 시작된다. 기존의 화가들은 본인과 다른 모네의 이 같은 기조를 못마땅히 여기고 비아냥댔다. 모네가 전시회를 열자 ‘인상주의자의 전시회’라고 조롱하는 표현을 썼는데, 이 같은 표현을 오히려 모네를 유명하게 해주는 역설적인 역할을 하였다.

모네는 평생 두 여인과 사랑을 했다. 어린 나이에 만난 카미유 돈시외는 32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한다. 사랑하는 아내를 잃게 된 모네는 엘리스라는 유부녀를 사랑하여 외로움을 달래며 그림작업에 몰두하지만, 엘리스마저 일찍 병으로 사망하게 된다. 인상印象주의 대표화가, 그리고 수련(垂蓮)의 화가 모네의 여인에 대해서 알아보자.
1.클로드 모네의 연인, 모델 카미유 돈시외와의 만남
모네의 나이 19세 때인 1859년, 모네는 파리에 있는 미술학원, 아카데미 스위스(Académie Suisse)에서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듬해 군대에 징집되어, 알제리의 프랑스군 주둔지에서 복무했지만 1862년 장티푸스에 걸려 전역하게 된다.
그리고 파리로 돌아와 샤를 끌레르 밑에서 르누아르, 시슬레, 바지유 등과 어울리며 그림공부를 했는데, 모네는 그들의 모델이었던 카미유 돈시외와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이때가 1865년이었고, 카미유의 나이 18세, 모네의 나이 25세 때의 일이다. 이때 만난 모네와 친구들과의 우정은 훗날 새로운 미술사조를 탄생시키는 밑거름이 되었다.
카미유 돈시외(Camille Doncieux,1847~1879) 프랑스 리옹에서 태어났다. 타고난 미모와 어려운 생활 여건으로 어린 나이부터 모델이 되어 수많은 그림에 포즈를 취했다. 그녀는 모네의 모델뿐만 아니라, 인상파 화가들, 르누아르(Pierre-Auguste Renoir)와 에두아르 마네( Édouard Manet)의 모델로서 활동하게 되는데, 이들의 여러 그림의 주제가 되었다.

아직 알려지지 않은 젊은 화가와 가난한 모델은 만남은 어려웠다. 게다가 모네의 이모와 아버지는 카미유와의 관계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며 만남을 허락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카미유의 부모도 가난한 화가의 앞날이 걱정되어 반대했다.
심지어, 카미유가 첫아들을 임신하고 있는 동안에도 모네의 아버지는 카미유에게 즉시 관계를 끊을 것을 권하기도 했다. 모네는 어쩔 수 없이 이모와 아버지에게 못 이기는 척하며, 카미유를 파리에 남겨두어 안 만나는 척하기도 했고, 이모의 시골 사유지에 머물면서 더 이상 카미유와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이게 하기도 하며 카미유에게 스트레스를 주지 않도록 비호했다.
이 같은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모네는 카미유를 진정으로 사랑했고, 1867년에는 그의 첫아들 장( Jean)이 태어났다. 이듬해 모네는 카미유와 아들 장과 함께 파리로 갔지만, 아버지와 이모에게는 함께 산다는 것을 숨겼다.
이들이 이사실을 알게 된다면 카미유와 장이 아버지와 이모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모네의 아버지가 모네와 카미유와 함께 사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자, 여태까지 지원하던 재정적 지원을 중단해 버렸다.

모네의 세 가족의 삶은 고달팠다. 월세를 내지 못한다는 이유로 묵고 있던 셋집에서도 쫓겨났다. 모네는 생존을 위해 돈을 벌려고 그림을 그리며 힘썼고, 카미유와 장은 생활비를 아끼기 위해 그나마 둘에게 우호적인 고모 집으로 이사해 생활했다.
그리고 1870년에 둘은 돈을 빌려서 결혼식을 했다. 모네의 아버지는 끝내 결혼을 허락하지 않아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고, 카미유의 부모는 그나마 참석해 카미유의 마음에 위안을 주었다.
카미유는 어려운 형편의 아버지로부터 1,200프랑의 지참금을 받았는데, 그녀의 부모는 지참금을 카미유의 이름으로 별도의 계좌에 보관해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이는 모네의 채권자로부터 돈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아니 딸의 최소한의 생활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2.클로드 모네와 카미유의 짧았지만 행복했던 결혼생활
부부는 없는 돈에도 아들 장을 데리고 트루빌로 신혼여행을 떠나 행복한 미래를 꿈꾸었다. 그러나 모네는 계속해서 채권자로부터 시달림을 받고 있었고 이를 피하려고 이곳저곳을 떠 돌았다. 그런데다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이 발발하여 징병위기에도 처했다. 어쩔 수 없이 징병을 피하기 위해 런던과 네덜란드에 도피하여 살았다.
징집을 겨우 피한 모네는 열성적으로 그림 활동을 했다. 어느 정도 빚도 갚고 채권자로부터 시달림으로부터 해방되자, 1871년에는 프랑스로 돌아와 파리 근교의 아르장퇴유에 집을 마련하고 비교적 평탄한 생활을 했다. 그리고 1874년 첫 번째 그룹전을 열어 인생 역작 ‘<인상, 해돋이>’를 출품했다.

인상파의 그림이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기도 전인 1873년부터 클로드 모네(Claude Monet)와 마네(Manet)를 비롯한 인상파 화가의 후원자가 있었는데, 그는 어니스트 오세테( Ernest Hoschedé)라는 미술 평론가이면서 미술작품에 투자를 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본인이 투자하고 후원하고 있는 모네를 비롯한 인상파 화가들에게 작품을 의뢰하기도 하며 후원을 하였는데, 모네의 유명한 그림, <인상, 해돋이>를 매수하여 모네의 가치를 높여준 첫 번째로 소유자이기도 했다.
그러나, 잘 나가던 오셰데가 1877년 경기 불황으로 파산하게 되고 벨기에로 잠적해 버렸다. 이때 오셰데와 결혼한 아내 엘리스와 아이들이 갈 곳이 마땅치 않아 이곳저곳을 전전하게 되었다. 이 같은 안타가운 상황을 본 모네는 엘리스에게 여섯 자녀를 데리고 모네의 집에서 살 것을 제안했고, 형편이 어려운 엘리스는 이 제안을 받아들이고 함께 살게 되었다.
3. 카미유의 갑작스러운 투병과 죽음
카미유는 이미 1876년부터 암이라는 중병에 걸려있었다. 모네가 자신의 그림을 팔아 대부분의 돈을 아내 카미유의 치료비를 지급하는 데 사용되었다. 그럼에도 카미유의 병세는 호전되지 않았다. 이렇게 아픈 와중에도 1878년 3월에 모네의 둘째 아들 미셸( Michel)이 태어났고, 카미유의 건강은 더욱 악화되었다.

앨리스 오셰데는 모네의 식구들과 함께 살면서 투병 중인 카미유를 간호했다. 그러나 카미유는 1879년 9월 5일 32세라는 젊은 나이로 사망하고 만다. 카미유의 사망 원인에 대해서는 확실치 않으나 골반암이라는 설과 결핵, 또 다른 설로는 임신중독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안타깝게도 사망하고 만다. 모네는 괴로워하는 심정으로 임종하는 카미유를 그림으로 그려 남겼다.
일찍부터 모네의 그림모델을 한 카미유는 모네의 그림 50점에 등장한다. 그녀는 모네의 뮤즈였다. 부부가 양가 부모로부터의 반대를 무릅쓰고 어려운 시절을 함께하였으며, 모네가 어려운 시절 가난한 모네에게 800프랑을 벌게 해 준 ‘녹색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라는 그림의 모델이었기도 했다.
모네는 사랑했던 여인, 카미유가 고인이 되어 누워있는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내의 얼굴에 비추어지는 빛의 방향과 주변의 반사에 따라 변하는 색상을 발견하고 신기하게 아름답다고 느꼈다. 이때부터 모네는 사물에 비치는 빛을 연구하고 색상에 따라 변하는 모습등을 화폭에 담기 시작했다
그리고 빛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변해가는 세느강의 매력에 푹 빠졌다. 그때부터 모네의 그림은 더 어두운 톤을 활용하고, 우중충한 날씨의 세느강과 같은 모습을 화폭에 담기 시작하면서 과거의 인상주의 기법을 버리기 시작했다.
다음편에서는 두번째 여인, 엘리스에 대해서 알아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