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얀의 연인, 세 번째 아내, 엘리에트 무레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은 20세기 클래식 음악의 거장으로, 그의 음악적 업적과 함께 개인적인 삶에서도 여러 여성들과의 관계가 주목받아 왔습니다.
특히 그의 세 번째 아내인 엘리에트 무레는 카라얀의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그와 함께한 시간 동안 많은 사랑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 글에서는 엘리에트 무레의 삶과 그녀가 카라얀과의 관계에서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1. 세 번째 아내, 엘리에트 무레
1958년 10월, 카라얀은 프랑스 모델 출신의 엘리에트 무레(Eliette Mouret, 1939~ )와 세 번째 결혼을 하였습니다.
엘리에트는 18세 때 크리스찬 디올(Christian Dior)의 눈에 띄어 국제 모델로서의 경력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프로방스에서 평온한 어린 시절을 보낸 후, 디올의 하이 패션 사진 촬영과 패션 쇼에서 활동하며 유럽의 여러 패션 중심지에서 이름을 알렸습니다.

엘리에트는 카라얀과의 첫 만남이 1954년, 친구의 요트에서 이루어졌다고 전해집니다. 당시 그녀는 멀미로 힘들어하고 있었고, 카라얀은 그녀를 해변으로 호송하며 처음으로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이후 1955년 런던 음악회에서 다시 만났을 때, 엘리에트는 이미 결혼 생활 중이었지만 카라얀에게 끌리게 되었습니다.
그 후, 엘리에트는 결혼 생활 중에도 카라얀의 음악 여행에 동행하기 시작했습니다.
1958년, 엘리에트는 남편과 이혼한 후 카라얀과 결혼하게 되었고, 이로써 그녀의 패션 모델로서의 경력은 끝나고 ‘마에스트로의 아내’로서의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두 딸, 이자벨(1960)과 아라벨(1964)이 태어났습니다. 엘리에트는 카라얀의 세 번째 아내로서 그가 사망할 때까지 결혼 생활을 유지했습니다.
2. 카라얀의 영원한 내조자, 엘리어트 무레
엘리에트와의 결혼 생활은 겉으로 보기에는 화목하게 유지되었으며, 그녀는 비록 음악에 대한 깊은 지식은 없었지만 카라얀을 열심히 내조했습니다.
그녀는 카라얀의 음악 여행에 동행하며 그의 일정을 조율하고, 음악계의 부담스러운 측면으로부터 그를 보호하려 노력했습니다.
카라얀은 그녀의 이러한 판단을 높이 평가하며, 그녀가 음악 대중과 소비자를 더 잘 이해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카라얀이 사망한 후, 엘리에트는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센터(Herbert von Karajan Centre)를 비엔나에 설립하여 카라얀의 음악적 유산을 이어갔습니다.
현재 그녀는 잘츠부르크에서 엘리에트 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인스터튜트(Eliette and Herbert von Karajan Institute)를 운영하며 젊은 음악가들의 발전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또한, 잘츠부르크 부활절 축제의 후원자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엘리에트 무레는 카라얀의 삶에서 중요한 동반자로서 그의 음악적 여정에 깊이 관여했습니다. 그녀는 카라얀의 아내로서 그를 지지하고, 그의 음악적 유산을 이어가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카라얀의 음악적 업적은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으며, 엘리에트는 그의 유산을 후세에 전하는 데 기여하고 있습니다.
3. 지휘자인 인간으로서의 카라얀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Herbert von Karajan)은 평생 베를린 필하모닉의 상임지휘자 자리를 간절히 염원하며 이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인물이다.
그는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가 되기 위해서는 살인이라도 저질렀을 것”이라고 회상할 정도로 그 자리를 차지하는 데 대한 열망이 강했다.
그러나 그가 베를린 필과 미국 순회공연을 떠나기 직전, 그의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고, 그는 상임지휘자의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어머니를 한 번도 찾지 못했다고 한다. 이로 인해 그는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깊은 슬픔을 느꼈다고 전해진다.
1984년, 카라얀은 일본을 거쳐 한국에서 공연을 갖게 되었다. 이때 그의 아내 엘리에트가 지갑을 잃어버렸으나, 예상치 않게 지갑을 되찾아 한국에 대해 긍정적인 감정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반면, 카라얀은 리허설에 외부인이 몰래 참관하는 경우에는 공연을 취소하겠다고 강하게 경고하기도 했다.
1989년 4월 24일, 카라얀은 건강상의 이유로 베를린 필의 종신 상임지휘자직에 사의를 표명했다. 이는 그의 특유의 승부수로 해석되기도 했다.
그러나 사표를 던진 다음 날, 베를린 주정부는 그의 사임을 공식 발표하며 뜻밖에 사표를 수리해 버렸다. 카라얀을 지지하는 일부 베를린 필 단원들이 그의 자택을 찾아갔지만, 그는 그들을 만나지 않았다.
카라얀은 같은 해 7월 16일,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의 가면무도회 공연을 위한 리허설 중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당시 그의 아내 엘리에트는 산책 중이었고, 카라얀은 절친한 친구와 음반 발매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다.
그는 전날부터 좋지 않은 심장 상태를 걱정한 주치의가 심전도계를 가지고 왔으나 “중국 황제가 와도 방해할 수 없다”며 돌려보냈고, 이 결정이 그의 사망 원인이 되었다.
카라얀은 며칠 후 자택 근처의 성당에 매장되었다.
카라얀의 지휘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나뉘었다. 그의 상업주의와 나치 전력 등으로 비난받기도 했지만, 그의 다이나믹한 음향과 세련된 스타일, 청중을 사로잡는 능력은 많은 이들에게 찬사를 받았다.
그는 클래식 음악계에서 내로라하는 거장으로, 베토벤, 브람스, 바그너, 차이코프스키, 비발디, 모차르트, 말러 등 다양한 작곡가의 작품을 본인이 설정한 표준적 규범에 맞춰 연주한 지휘자로 기억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