챨리 채플린에 있어서 여인들과의 만남
찰리 채플린(Charlie Spencer Chaplin,1889~1977)은 영국 런던출신의 전설적인 코미디언이자 영화배우로, 그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화인으로, 무성 영화 시대의 대표 주자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찰리 채플린의 삶에는 그의 많은 여인들이 특별한 역할들을 했다. 같은 배우로서 연기를 하며 작품에 대한 영감을 주고받았고, 때로는 사랑하는 연인으로서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로서 그의 인생을 더욱 찬란하게 만들어준 존재로 남아 있다.
그의 결혼과 연애는 채플린의 예술적 업적과 함께 그의 인생 이야기를 빛내주었다. 이 글에서는 찰리 채플린의 여인들에게 주목해 보고, 그들이 찰리 채플린의 삶과 작품에 미치는 영향을 알아보겠다. 채플린의 여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1.런던에서의 채플린의 어린시절
채플린의 런던시절의 어린 시절은 가난했다. 한때 빈민을 수용하는 지역학교에 보내지기도 했다. 가난한 채플린은 학교에 다니면서 무대에서 공연을 시작했다
채플린은 1899년과 1900년에 걸쳐 영국 나막신 춤 극단의 일원이 되었으며 가난을 탈출하기 위하여 열심히 일했다.
그의 연기는 관객들에게 인기가 있었지만, 채플린은 춤기기에 만족하지 않고 코미디 연기를 하고 싶어 했다. 13세가 되었을 때 그는 학업을 포기했다. 그리고 14세에 런던 웨스트엔드의 연극 에이전시에 등록했다.
연극에이전시의 매니저는 채플린에게서 잠재력을 보았고, 채플린은 해리 세인츠버리 감독의 《짐, 코케인의 로맨스》라는 연극에서 뉴스보이 역할을 맡았다. 채플린의 코믹한 연기는 관객으로부터 그리고 지역 예술지에서 많은 리뷰와 칭찬을 받았다.
1906년 5월, 채플린은 인기 있는 벌레스크 작품을 개발했고, 곧 쇼의 스타가 되었다. 셜록 홈즈 연극에서 는 호평을 받아 미국 투어에 나섰고 급기야 영화에 입문하게 된다.
1915년, 미국에서 채플린은 하나의 문화 현상이 되었다. 상점에는 채플린 상품이 가득했고, 연재만화와 만화 캐릭터가 등장했으며, 대중음악의 여러 노래에 그에 대하여 노래가 불려졌다
이렇게 인기 좋을 때 채플린과 밀드레드 해리스가 만난다
2. 채플린의 첫 번째 아내, 밀드레드 해리스
밀드레드 해리스(Mildred Harris, 1901~1944)는 미국태생으로 10살 때부터 아역 배우로 데뷔하여 영화계에 발을 들였다. 해리스는 찰리 채플린의 많은 결혼 상대자 중 첫 번째 아내였다.

1916년, 밀드레드 해리스는 15세의 나이로 그리피스 감독의 영화 《인톨러런스》에서 하렘 소녀로 출연했다.
그리고 16세 때, 배우 찰리 채플린을 처음 만나게 되었는데, 서로의 매력에 빠져 데이트를 하고 사랑을 하게 되었다. 채플린을 연애를 하던 중, 해리스는 아이를 임신한 것으로 생각했는데, 가짜 임신을 판명되는 등의 해프닝도 겪었다. 상상임신이었다. 둘은 1918년 10월 23일에 로스앤젤레스에서 비공개로 결혼식을 했다.
그러나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채플린의 영화사 계약과 해리스의 연기등의 문제로 의견차이가 생겨 불화가 발생했다.
그보다 문제는 채플린이 해리스를 보는 시각이었다. 채플린은 그의 아내를 동등한 연기자로 생각하지 않았다. 영화배우로서의 해리스를 가르치려 들었고 지속적으로 충고를 해 해리스를 지치게 했다.
해리스 또한 아역배우부터 연기생활을 시작했기 때문에 결코 채플린에 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 중에도 아이를 임신했으나 태어난 지 3일 만에 사망하고 만다.
채플린은 심기일전하여 영화배우로서의 활동과 해리스와의 사이를 호전시키고자 로스앤젤레스로 이사를 했다. 해리스는 채플린과 행복한 결혼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결국 1920년 해리스는 채플린의 정신적 학대를 이유로 이혼을 청구하기에 이른다. 채플린은 그녀를 불륜행위가 있었다는 막장드라마로 대응을 했고, 결국, 1920년 11월에 법정에서 이혼이 승인되었다.
해리스는 채플린으로부터 10만 달러의 위자료를 받고 헤어졌다.
이후 해리스는 1924년, 에버렛 맥고번과 결혼하여, 1925년 아들을 낳았으나 1929년 11월 이혼했다. 그리고 1934년에는 축구선수였던 윌리엄 P. 플렉켄스타인과 결혼도 했다.
밀드레드 해리스는 1940년대 초에 영화 분야에서 활동을 이어갔다. 그리고 1944년 43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폐렴으로 사망했다.
3. 짧았던 채플린과 메이 콜린스의 약혼 생활
해리스와 헤어진 후 채플린은 1921년 4월 본인의 스튜디오에서 자신의 비서로 고용된 여배우 메이 콜린스(May Collins)와 약혼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6월 초가 되자 채플린은 “갑자기 콜린스와 같은 방에 있는 것을 도저히 참을 수 없다“며 돌변된 행동을 보였다.

그리고 채플린은 콜린스와의 약혼에 대하여 직접 파혼하겠다는 통보를 하는 대신 “독감에 걸려서 출근을 중단한다”며 간접적으로 메이에게 파혼의 의사를 전했는데, 메이는 그것이 독감운운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짧지만 채플린의 비겁함을 알아볼 수 있는 해프닝이었다.
4. 짧은 결혼 생활 그러나 긴 이미지 타격, 두 번째 아내, 리타 그레이
리타 그레이(Lita Grey,1908~1995)는 8살 때 할리우드 카페에서 찰리 채플린을 처음 만났다, 그리고 그녀의 나이 12살 때, 채플린의 영화 ‘더 키드’에서 ‘유혹하는 천사’ 역을 맡아 찰리 채플린과 처음으로 호흡을 맞췄다.
1923년 그녀의 나이 15살 때 채플린을 다시 만났는데, 이 만남은 리타가 처음으로 채플린의 영화에 여주인공으로 캐스팅되게 했다. 그리고 리타그레이는 곧바로 채플린과 연인이 되었고 임신이 되었다.

채플린은 미성년자와 성관계를 가졌다는 이유로 투옥될 수도 있었기 때문에, 구속되는 사태를 피하기 위해 그해 11월 멕시코에서 비밀리에 결혼식을 올렸다. 이렇게 리타는 채플린의 두 번째 아내가 되었다.
결혼 생활은 시작부터 순탄치 않았다. 두 사람은 공통된 관심사가 거의 없었고 채플린은 집을 영화와 서커스사업에 대한 작업을 하면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면서 서로 같은 시간을 보낼 수 없었다.
둘의 벌어진 사이를 증명하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1925년과 1926년에 찰스 채플린 주니어와 시드니 채플린이라는 두 아들을 낳았지만, 결혼후 3년 만인 1927년에 리타 그레이가 이혼 소송을 제기하면서 결혼생활은 이혼으로 끝나게 된다.

해리스는 이혼 소송에서 그녀의 첫 번째 임신한 내용에 대하여 “채플린이 첫 아이의 출산을 막기 위해 불법 수술을 받으려 했다”라고 주장하며 채플린의 부도덕성을 지적했다.
그리고 리타 그레이는 결혼 생활동안 채플린으로부터 폭력과 정서적 학대를 당했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이혼 소송 내용은 언론에서 널리 보도되었으며, 리타 그레이의 주장에 따라 여성의 권리와 가정 폭력과 같은 문제가 이슈가 되면서, 언론이 이런 문제를 심오하게 다루며 당시 사회의 센세이셔널한 뉴스로서 주목을 받았다.
채플린의 비인간적인 행태가 이슈가 된 이 사건은 채플린을 사랑했던 대중을 충격에 빠뜨리는 동시에 찰리 채플린의 개인적인 삶과 이미지에 큰 대미지를 입혔다.
연장선상으로 1966년, 리타그레이는 <채플린과 함께 한 삶>이라는 채플린과의 결혼생활과 관련한 자서전을 썼는데 대부분 과장과 날조로 이루어진 내용이었다.
아마도 이혼소송 당시 리타그레이가 주장했던 내용에 대한 자기 합리화와 선정적 내용을 담음으로써 자서전의 흥행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의도에서 쓴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일말의 양심이 있어서인지, 리타는 1998년 이혼소송과정의 채플린의 험담과 자서전에서 주장했던 내용들이 과장되었고 날조되었음을 인정했다.

이 인정으로 채플린이 리타와의 결혼생활에서 대중으로부터 많이 받았던 미움을 60년이 지나서야 회복되었지만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난 후였다.
리타는 나중에 가수인 헨리 아귀에르와 그녀의 매니저이던 아더 데이와 두 번의 결혼을 했다. 그리고 1956년에는 네 번째 남편 팻시 피조롱고와 결혼했으나 1966년 이혼했으며, 1970년대와 80년대에는 백화점의 점원으로 일했다.
그리고 1995년 12월, 로스앤젤레스에서 87세의 나이에 암으로 사망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