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F 케네디의 연인(3/3), 재클린 케네디
1960년 7월 13일,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드디어 존 F. 케네디는 대통령 후보로 지명됐다.
그리고 1960년 11월 8일, 존 F. 케네디는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의 리처드 닉슨후보를 근소한 차이로 꺾으면서 미국 역사상 최연소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그의 나이 43세 때이다.
그리고 1961년 1월 20일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31세의 재클린은 영부인을 역임한 세 번째 최연소 영부인이 되었다.

영부인인 된 재클린은 남편 케네디의 재임 기간 동안 세계적인 패션 아이콘이 되었다. 재클린은 개인적인 스타일로도 대중으로 부터 존경을 받았다.
영화 배우들과 같이 여성 잡지에 자주 등장했으며, 세계에서 가장 옷을 잘 입는 여성 12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반면, 재임기간중 재클린이 프랑스 디자이너에 대한 선호와 패션에 대한 지출은 재키에게 부정적인 여론을 가져오기도 했다.
이 같은 여론을 의식해 캐네디는 재키의 과거의 부유하고 부족함이 없던 재정적 배경과 그녀가 하고 있는 많은 양의 활동을 강조했다.
그리고 아내의 패션에 대한 논란을 희석시키기 위해 힘 써주었고, 논란이 될 가능성이 있는 재키의 패션과 지출에 대해서는 공개적으로 논의하는 것을 거부했다.
재클린은 미국 영부인으로서 미국 디자이너의 작품을 입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프랑스 꾸뛰르, 특히 샤넬, 발렌시아가, 지방시의 작품을 선호했다.
그래도 재키의 파리 패션에 대한 취향이 언론에서 많은 비판을 받게되자, 케네디는 파리 쿠튀르 패션에 대해 창의적으로 재해석한 또 다른 유명한 디자이너 벤 주커만(Ben Zuckerman)과 스포츠웨어 디자이너 스텔라 슬로트(Stella Sloat)를 추천했다.
재클린은 주커먼을 입고 백악관에 입성했다.
영부인으로서의 재키는 전 세계적으로 문화 및 외교 활동으로 유명한 미국의 문화 대사였다.
때로는 대통령 없이 문화 교류와 외교 관계를 촉진하기 위해 다른 나라를 여행하기도 했다.
1. 다재다능한 퍼스트 레이디 재키와 케네디의 암살
재키는 프랑스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와 같은 외국어에 능통하고 구사할 줄 알았으며, 그 나라에 대한 많은 문화적 지식을 활용하여 지도자들과 강력한 호혜관계를 구축할 줄을 알았다.
이와 같은 강력한 영향력으로 여러 나라에서 연설을 했고, 이런 연설들은 외국 고위 인사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63년 초, 재키는 다시 임신을 하게되자 영부인으로서의 공적인 업무를 축소했다.
그러나 태어난 아기의 폐는 완전히 성장하지 않았고, 보스턴 아동 병원에서 출생 이틀 만에 유리막 질환으로 사망했다.
재키는 아기의 죽음에 심한 상실감에 우울증 상태에 빠졌다. 대통령은 상심에 빠진 재키를 위로하기 위해 노력했다.
전화위복으로 아이를 잃은 것은 케네디와의 결혼 생활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고, 부부는 슬픔을 공유하면서 더 가까워졌다.
그러한 행복도 잠시, 11월 22일 아침 텍사스주 댈러스의 딜리 플라자(Dealey Plaza)의 엘름 스트리트(Elm Street)로 모퉁이를 돌았을 때, 두 발의 총성이 울렸다. 그중 한 발은 대통령 케네디의 머리에 맞았다.

케네디는 파크랜드 병원으로 이송됐다. 재키의 요청으로 수술실에서 수술하고 생존을 위해 수술하고 있는 케네디를 기도했지만 케네디 대통령은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케네디는 46세라는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남편 케네디가 사망 선고를 받은 후 재키는 피묻은 옷을 벗기를 거부했고, 얼굴과 손에 묻은 피를 씻어낸 것을 후회했다.
그녀는 대통령 전용기 에어 포스 원에 탑승할 때 피로 물든 분홍색 정장을 계속 입었다. 그리고 부통령 존슨이 대통령 취임 선서를 할 때 옆에 섰다.
세탁되지 않은 피 묻은 케네디의 양복은 암살의 상징이 되었고, 1964년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에 기증되었다.
재키의 남편 케네디가 암살되고10개월 후, 암살 사건을 조사하는 워렌위원회는 리 하비 오스왈드( Lee Harvey Oswald ,1939 ~ 1963)가 단독으로 케네디 대통령을 암살했다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암살사건과 장례식등으로 그녀에게 집중된 언론 보도 이후 제키는 공식적으로 대중의 시선에서 물러났다.
그 후 몇 년 동안 재키는 고인이 된 남편을 추모하는 추모식에 참석했다. 그리고 케네디 행정부의 공식 문서 보관소인 존 F. 케네디 대통령 도서관 및 박물관 의 설립을 감독했다 .
2. 존 F 케네디의 동생, 로버트 케네디와 재클린, 그리고 로버트의 암살
남편이 암살된 후 재클린 케네디는 시동생인 로버트 F. 케네디( Robert Francis Kennedy, 1925 ~ 1968. 6. 6)에게 크게 의지했다.
재키가 결혼 초기에 유산을 겪은 후 바쁜 존 F 을 대신해 로버트는 재키를 돌봐 주었고, 재키는 로버트를 의지했다. 재키가 유산과 출산을 할 때 그녀와 함께 병원에 머물렀던 사람은 그녀의 남편 존이 아니라 로버트였다.
존의 동생 로버트는 정치계에 입문하여 나중에 법무장관으로 취임하게 될 때까지 심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재키를 돌봐 주었다.

재키는 로버트의 정치감각에 주목했었다. 그리고 그를 정치계에 입문하도록 설득하였다. 남편 존의 임명으로 로버트는 1961년 법무장관을 거쳐 1964년에는 뉴욕에서 미국 상원의원으로 출마했다.
로버트는 정치감각이 뛰어나고 퍼스트 레이디로서 역할을 훌륭히 하고 있는 재키의 판단을 소중히 했다.
존의 사망이후 로버트에게 대통령선거에 참여할 의사가 있는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재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다르다고 표현할 정도 였다.
재키는 로버트를 숙명적으로 남편의 뒤를 이어 대통령을 만들기 위해 지원했다. 대통령 당선 가능성에 대한 모두의 의구심을 뒤로 하고 시동생을 위해 캠페인을 벌이고 공개적으로 로버트를 지지했다.
그리고 한치의 의심도 없이 로버트의 승리를 통해 케네디 가문이 다시 한번 백악관을 차지할 것이라고 노골적으로 선언하고 다녔다.
그러나 세상은 그녀의 뜻대로 되도록 놔두지 않았다. 1968년 6월 로버트가 민주당의 대권주자가 되기 위한 예비선거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6월 4일 캘리포니아와 사우스 타코다주였다.
승리에 고무되어 호텔 연회장에서 승리를 자축하는 연설을 마치고 호텔 주방을 통해 기자실로 향했다.
그런데 주방통로에서 시르한 시르한(Sirhan Sirhan)이라는 이름의 팔레스타인 무장 괴한이 로버트를 향해 22구경 리볼버로 세발을 쐈다.
로버트 케네디는 안타깝게도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6일 사망했다. 그의 나이 42세였다.
로버트 케네디가 사망한 후, 재키는 거의 5년 전 남편 존 F가 암살된 후 겪었던 우울증이 재발했다.
충격을 받은 재키는 자신과 두 자녀의 목숨을 두려워하며 “그들이 케네디를 죽이고 있다면 내 아이들은 표적이 될 것이다. 미국이라는 이 나라를 벗어나고 싶다”고 말하며 두려움에 떨었다.
2. 우울증에 빠진 재키와 오나시스의 결혼
우울증에 빠진 그녀에게 위로가 되어준 사람은 오랜 친구인 그리스 해운왕 아리스토텔레스 오나시스(Aristotélis Onásis, 1906~1975)였다.
오나시스는 재키와 그녀의 자녀들을 위해 신변의 안전과 사생활을 보호해 주었다.
로버트가 사망한지 4개월후인 10월 20일, 재클린 케네디는 오나시스의 청혼에 결혼 했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은 재클린 오나시스 (Jacqueline Onassis)라는 법적 이름을 사용했다.
결과적으로 미국 대통령의 미망인의 권리라 할 수 있는 미국 비밀경호국의 보호에 대한 권리를 잃었다. 그러나 재키는 이같은 권리는 중요치 않았다.
이미 남편인 대통령의 경호 실패와 법무장관과 상원의원을 역임하고 대선후보였던 시동생의 경호마저 실패한 경호국이 누구를 경호한다는 말인가.

그보다 오나시스가 돈을 주고 고용하는 사설 경호원들이 훨씬 안전하다고 느꼈다.
여하튼 그 결혼은 재키의 평판은 급전직하했다. 존 F 가 경호 실패로 암살 되었지만 재키의 재혼은 미국국민에 대한 배신으로 간주했다. 미국 국민들의 평판이 하루 아침에 배신자로 급격히 떨어지게 된 것이다.
일부 사람들은 재키를 “공개적인 죄인”으로 취급했고, 파파라치들은 “재키 오”(Jackie O)라는 별명을 붙이고 따라다니며 사진을 찍어 댔다.
그러나 재키의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나이차이가 있지만 건강할 것만 같던 오나시스의 건강은 아들 알렉산더가 1973년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한 후 급격히 악화되었다.
급기야 오나시스는 1975년 3월 15일 파리에서 69세의 비교적 적은 나이에 호흡 부전으로 사망했다.
오나시스의 부인으로서 상속권이 있던 재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딸이자 유일한 상속인인 크리스티나 오나시스로부터 2,600만 달러의 합의금을 받고 2년간의 법정 다툼 끝에 결국, 오나시스 재산에 대한 다른 모든 청구권을 포기했다.
3. 다시 전 대통령 영부인으로 돌아온 재키
두 번째 남편, 오나시스가 사망한 후 재키는 1975년, 미국으로 영구 귀국하여 맨해튼, 마사스 빈야드, 매사추세츠 주 하이애니스 포트의 케네디 저택을 오가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바이킹 프레스와 더블데이라는 잡지의 편집자로 일하면서 자녀들과의 시간보내기에 집중하고 자선 활동에 참여하였다. 이런 활동은 패션에 집착하는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 여인이라는 이미지를 뒤집었다.
그리고 한동안 사이가 좋지 않았던 케네디 가문과의 관계를 호의적인 관계 설정을 위해서도 노력했다. 그리고 전 남편 존 F. 케네디 도서관 및 박물관을 건립하는데도 지원했다.
타고난 정치 센스를 지닌 재키는 자신의 대중적 이미지를 호전시키고자 의식적으로 자신을 통제하였고 이 같은 재키의 컨트롤 노력은 그녀가 죽을 무렵에는 긍정적 이미지로 완전히 회복하는 데 성공했다.

재키는 1993년 버지니아 미들버그에서 내키지 않은 여우 사냥에 참여하여 말을 타던 중 낙마를 하여 병원으로 이송되어 검사를 받았다.
재키의 사타구니에서 림프절이 부어오른 것이 의사에 의해 발견되었고, 비호지킨스 림프종이라는 일종의 암 진단을 받았다
1994년 1월에는 화학요법을 시작했지만 3월에는 암세포가 척수, 뇌와 간까지 퍼졌고 5월에는 말기가 되었다.
결국 1994년 5월 18일,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는 그녀의 맨해튼 아파트에서 64세의 나이로 아이들 곁에서 잠을 자다가 사망했다.
그리고 버지니아 주 알링턴 국립묘지에 케네디 대통령, 아들 패트릭, 사산한 딸 아라벨라와 함께 안장되었다.
재키는 1982년 시에나 대학 연구소(Sienna College Research Institute)의 조사에서 청렴성 기준으로 최하위를 기록했다.
재키의 충절에 대한 최초의 못 마땅한 부정적 여론은 아리스토텔레스 오나시스와의 결혼에 대한 감정 때문이었다.
재키는 그 후 여러 차례의 조사에서 그녀의 성실성에 대한 존경심을 개선하며 평판이 호의적으로 돌아섰다.
이후 갤럽이 선정하는 20세기 후반 가장 존경받는 10인 명단에 27번이나 이름을 올렸으며, 여전히 가장 인기 있는 미국 영부인 중 한 명이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