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F 케네디의 연인(2/3), 재클린 부비에 1편,

존 F 케네디의 연인(2/3), 재클린 부비에 (1편)

존 피츠제럴드 케네디 (John Fitzgerald Kennedy, 1917.5. 29. – 1963. 11. 22)는 미합중국 제35대 대통령으로 1961년 1월 20일 44세의 최연소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1963년 11월 22일 암살될 때까지 재임했다.

매사추세츠주의 저명한 케네디 가문에서 태어난 케네디는 1940년 하버드 대학교를 졸업하고 태평양전쟁에서 선원들을 구출하여 전쟁 영웅이 되었다.

존은 명문가의 자제로서 인기 있는 정치인이었다. 그 인기만큼이나 많은 여성으로부터 러브 콜을 받았고 그의 인생에 있어 많은 여성이 있었다.

1941년 11월, 존 F. 케네디가 미 해군 정보국에서 소위로 복무하고 있는 동안 잉가 마리 아르바드 페테르센이라는 매력적인 한 여인을 만나지만, 유부녀인 데다, 언론사에 근무할 때 히틀러와 인터뷰를 한 것이 문제가 되어 독일의 첩보원이라는 의심을 FBI로부터 받게 된다.

수사결과 아르바드와 케네드의 혐의점을 찾지 못해 종결처리되고, 존은 해군 정보과에서 사무직으로 발령을 받게 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하마터면 그가 정치인으로 성장하는데 큰 방해물이 될 뻔한 돌이켜보면 위험천만한 만남이었다.

이 같은 홍역을 치르고 난 후, 진 티어니라는 아름다운 여배우를 만나게 된다. 영화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여성이라고 평가받는 티어니와의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다.

미모의 여인에 약한 케네디는 로맨스를 시작했지만, 그보다 더한 정치적 야망이 있었다. 티어니가 아름다운 여인으로 배우이기도 했지만 결정적으로 그녀는 유부녀였다. 유부녀와의 불륜 스캔들은 그의 정치진로를 위해서는 함께 할 수 없었다.

이별을 통보하고 정치적 이력에 집중하던 존은 하원의원에 선출되었다. 그리고 운명적으로 그의 아내가 될 여인, 재클린을 만나게 된다.

재클린 부비에의 이미지 사진

1. 케네디와 재키의 운명적인 만남

1952년 5월, 존 F. 케네디 미국 하원의원은 만찬회에서 그의 친구인 저널리스트 찰스 바틀렛이 같은 사교계에 속해 있던 한 아리따운 여인, 재클린을 소개받으며 인연을 맺게 된다.

재클린 부비에 (Jacqueline Bouvier. 1929. 7. 28 – 1994. 5. 19)는 뉴욕 사우샘프턴에서 주식중개인 존 부비에( John Bouvie)와 사교계 명사 자넷 노턴 리(Janet Norton Lee)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어머니는 아일랜드계였고 그녀의 아버지는 프랑스와 스코틀랜드 혈통을 가졌다.

1935년, 재클린 부비에는 맨해튼의 채핀학교에 다녔으며 종종 말썽을 피웠지만 전형적으로 똑똑한 학생이었다.

재키의 어린 시절은 아버지의 바람기와 알코올 중독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그리고 1929년 경제 대공황으로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그녀의 부모는 1936년에 별거를 하다가 4년 후인 1940년 결국 이혼했다. 11살 때의 일이다.

재클린은 부모의 이혼으로 인해 마음의 상처와 생활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그녀의 어머니가 스탠더드 오일의 상속자인 휴 더들리 오친클로스와 재혼하여 버지니아주 맥린에서 거주하게 되었다.

1942년부터 1944년까지 워싱턴 D.C. 북서부에 있는 홀튼-암스 학교, 1944년부터 1947년까지는 코네티컷 주 파밍턴에 있는 미스 포터 학교에 다니며 학업을 이어갔다.

그리고 1947년 여성 교육 기관이었던 뉴욕 포킵시(Poughkeepsie)에 있는 바사 대학(Vassar College)에 입학하여 미술 및 연극동아리에서 활동하며 신문에 글을 쓰는 등 다재다능한 학생으로서 역할을 다 했다.

이후 1949부터 2년간 프랑스의 그르노블 대학교와 파리의 소르본에서 공부를 한 후 미국으로 돌아와 조지 워싱턴 대학교로 편입하였고, 1951년에는 프랑스 문학 학사 학위를 취득하게 된다.

재키는 조지 워싱턴 대학에 다니는 동안 전국적으로 수백 명의 다른 경쟁자들을 제치고 보그 매거진(Vogue Magagine) 편집부에 선발되어 12개월 동안 일했다. 그리고 1951년에는 워싱턴 타임즈 헤럴드에 입사했다.

이 기간 동안 재클린은 존 허스테드(John Husted)라는 젊은 주식 중개인과 사귄 지 한 달 만에 약혼했다. 두 사람은 1952년 1월 뉴욕 타임스에 이 사실을 발표했다. 그러나 3개월 후, 재키는 허스테드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나자 실망하게 되어 약혼을 취소했다.

재키 부비에의 이미지

재키가 허스테드와 약혼을 취소하자마자 사교모임에 참석했는데, 그 자리에서 찰스 버틀렛의 소개에 의해 그를 영부인으로 만들어 줄 존 F 케네디를 운명적으로 만난 것이다.

첫 만남에서 재클린은 케네디의 외모, 재치, 그리고 그의 집안과 재정적 부에 매료되었다. 게다가 두 사람은 같은 천주교인 인 데다 글쓰기, 독서를 좋아하고 이전에 해외에서 살았던 경험까지 있는 등 유사한 공통점이 많았다.

2. 존 F 케네디의 청혼과 결혼

하원의원인 케네디는 매사추세츠에서 미국 상원의원의 출마하여 준비하느라 바빴다. 이미 사교계에 데뷔하여 케네디의 훌륭한 조력자의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는 그들의 관계는 더욱 진지해지며 가까워졌고, 그해 11월 치러진 선거에서 존은 상원의원에 당선됐다.

재키의 후원덕을 본 케네디는 여성적인 매력에 더해 총명함을 갖추고 다재다능한 그녀에게 반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청혼했다.

당시 재클린은 워싱턴 타임스-헤럴드를 기자로서 런던에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대관식을 취재하는 임무를 맡고 있어 케네디의 청혼을 수락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한 달 후 유럽에서 돌아온 제클린은 케네디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그 후 워싱턴 타임즈를 그만두고 상원의원 부인이 되기 위한 신부수업을 했다.

그들의 약혼은 1953년 6월 25일에 공식적으로 발표하였고 9월 12일, 로드 아일랜드 주 뉴포트의 세인트 메리 교회에서 보스턴 대주교 리처드 쿠싱이 집전한 미사에서 결혼했다. 재클린은 24세였고 케네디는 36세였다.

결혼식은 해머스미스 농장에서 열린 리셉션에서 약 700명의 하객과 1,200명의 하객이 참석한 가운데 사교계의 시즌행사 중 최대규모의 행사로 열렸다.

웨딩드레스는 뉴욕의 아프리카계 디자이너 앤 로우(Ann Lowe)가 디자인하였으며, 재클린이 허락하지 않았지만
재클린의 여자 수행원들의 드레스도 앤 로우가 디자인하여 만들어서 입혀지도록 했다.

행사의 규모가 얼마나 호화스럽게 이루어졌는지 짐작 가는 대목이다. 재클린이 입었던 웨딩드레스는 현재 보스턴의 케네디 대통령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들 신혼부부는 멕시코 아카풀코에서 신혼여행을 한 후 워싱턴 D.C.의 교외 지역인 버지니아 주 맥린의 히코리 힐에 정착했다.

재키와 케네디의 신혼 초 사진

케네디 부인으로서의 재클린은 시부모인 조셉 케네디와 로즈 케네디와 따뜻한 관계를 더욱더 화목하게 발전시키는데도 능력을 발휘하여 능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나 결혼 초기 몇 가지 어려운 점도 있었는데, 그녀의 남편 존은 만성적인 통증이 있었으며 허리가 점점 쇠약해지는 에디슨병을 앓고 있었다. 에디슨병은 존이 태평양전쟁때 입은 전쟁 부상으로 조금 더 악화된 상태였다.

급기야 존은 1954년 말 이 에디슨병으로 치료를 위해 수술을 받았는데 거의 죽을 뻔 했다. 재클린도 유산을 거듭하다가 1956년에는 사산까지 하게 되어 몸이 쇠약해졌다.

그럼에도 1957년 재클린은 간신히 딸 캐롤라인을 낳았다. 당시 그녀와 존은 매사추세츠 주 상원의원 재선을 위해 매사추세츠 전역에서 선거 운동을 하고 있었고, 1958년 4월에는 어린 딸과 함께 라이프 잡지 표지 촬영을 위해 포즈를 취하며 존의 선거운동을 했다.

3. 탁월한 정치감각과 사교계의 프리마돈나 재키

그들은 결혼 후 서로 떨어져 있기 싫어 선거 운동 기간 동안 내내 함께 여행했다. 케네디는 같이 선거운동을 하는 동안 재클린의 숨은 가치를 알아봤다. 재클린이 사교계에서 쌓은 화술과 행동은 놀라웠으며, 대중으로부터 인기를 얻기에 충분했다.

둘이 동행하며 선거운동을 했을 때에는 케네디가 혼자 유세를 했을 때보다 군중의 규모가 두 배이상으로 많이 모였다.

재클린은 항상 쾌활했고, 상냥했다, 그리고 보기 드물게 세련되어 있었다. 이런 찰떡궁합의 케미 결과로 존은 1958년 선거에서 승리하데 되었고 상원의원에 재선 되었다,

나중에 존은 재클린이 그냥 노출되고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승리를 보장할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한 존재라며, 그녀를 “단순하게 값을 매길 수 없는(소중한 존재)”( simply invaluable)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재클린의 강력한 지원 덕에 케네디는 승승장구했고, 1960년 1월 2일, 상원의원으로서 러셀 상원의사당에서 대통령 선거출마를 선언하고 오랜 꿈인 대통령에 도전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재키와 함께 민주당 대선후보로 지명되기 위하여 전국적인 선거 운동을 시작했다.

존 F 케네디와 배클린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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