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레논의 여인 (2/2), 메이팡,오노 요코
존 윈스턴 레논( John Winston Lennon,1940~ 1980)은 비틀즈의 멤버로 사회 운동가로서 전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친 슈퍼스타이다.
존레논에게 여자는 누가 있었는가? 지난번에 살펴본, 첫 번째 부인 신시아, 두 번째 부인은 오노요코이다. 그리고 메이팡이 있다.
지난 포스팅에서 신시아에 대해서 알아보았고 이번 포스팅에서는 오노요코와 메이팡과에 대해서 알아보겠다.
1.존 레논과 두 번째 부인, 오노 요코
1966년, 비틀즈가 투어를 중단하고, 휴식기를 갖게 되자 존은 미국에서 일본인 전위 예술가 오노 요코의 전시회를 관람한 것을 계기로 요코에게 푹 빠지기 시작했다.
급기야 ‘화이트’ 앨범을 작업하던 도중인 1968년 신시아와 이혼하고, 요코와 결혼한다.
오노 요코(일본어: 小野洋子, 영어: Yoko Ono, 1933. 2.18 ~ )은 일본의 멀티미디어 예술가, 가수, 작곡가이자 평화운동가이다.
요코의 어머니쪽은 야스다 그룹의 창립자인 야스다 젠지로집안이며 아버지는 일본 왕가의 후손이었다.
1937년 은행원인 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이주하였다가 일본으로 돌아와 1952년 일본 가쿠슈인 대학교 철학과를 중퇴하고 미국으로가 1954년 미국 사라 로렌스 대학교 연극학과를 입학하여 예술가, 시인들과 어울려 보헤미안과 같은 자유를 추구했으며, 전시회와 해프닝을 관람하면서 자신의 예술성을 키워나갔지만 졸업하지 못하고 중퇴하였다.
1956년 오노는 작곡가인 이치야나기 도시와 결혼하였으나 7년 후인 1962년 이혼하였고 같은 해 재즈 음악가이자 영화 제작자인 토니 콕스와 결혼하였지만 이치야나기와의 이혼에 대한 법적처리를 무시하여 이들의 결혼은 무효가 되었다.
이에 비관한 오노 요코는 자살을 시도하여 도쿄의 정신 병원에 입원했지만 1963년 6월 법적인 문제 해결 후 오노와 콕스는 결혼하였고 딸 교코 찬 콕스가 태어났다.
콕스와의 결혼생활은 평탄치 못해 파경을 맞았으나 공식적으로는 이혼을 하지는 않았다.
오노가 1969년 존 레논을 만나게 되자 이때다 싶은 콕스는 딸의 양육권을 놓고 법적 다툼을 벌인다.
그러나 법원이 1971년 오노에게 양육권을 인정하자 콕스는 8살난 딸의 이름을 로즈마리로 개명하고 함께 잠적해 버린다.
1980년 존 레논이 피살 당하자 콕스는 오노 요코에게 위로의 메시지를 전한 걸로 알려진다.
존 레논과 오노 요코의 만남의 대한 이야기는 두 가지 설이 있다. 먼저 가장 오랫동안 이야기 되어진 것은 오노가 주장하는 것으로 1966년 11월 9일 런던 인디카 갤러리에서 전시회 시사회를 개최한 자리에서 오노를 처음 만났다 하는데 그 전까지 존 레논이나 비틀즈를 몰랐다하고 그들의 음악을 들은 적도 없는 상태에서 서로 로맨틱 코미디로 만났다는 것으로 정설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폴 매카트니에 따르면 오노 요코는 그녀의 말과는 달리 비틀즈를 이미 알고 있는 상태로 존 레논을 만나기 전 1965년에 폴 매카트니를 찾아온 적이 있었으며 심지어 , 존 레논은 그녀에게 〈The Word〉의 가사를 주었다는 것이다.
누구의 말이 옳은지는 오노와 레논만이 알 것이나, 오노가 주장하는 것은 보다 로맨틱하게 알려지고 싶어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나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니다.
1967년 9월 존 레논은 런던에서 열린 오노 요코의 첫 솔로 전시회를 후원했다.
존 레논의 당시 아내이던 신시아 레논이 존 레논에게 요코가 집으로 전화한 이유에 대해 묻자 존 레논은 자신은 그저 오노의 전위적 전시회를 보조하는 나부랭이일 뿐이라고 변명했다.
변명의 약효가 끝나기도 전 1968년 5월, 신시아가 그리스로 여행을 떠난 동안 존 레논은 요코를 그의 집으로 초대했다.
신시아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요코는 신시아의 목욕 가운을 입고 존 레논과 함께 앉아 차를 마시며 “Oh, hi.”라는 인사로 신시아를 맞이했다.
이후 이들의 애정행각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2년 후 존 레논은 첫 부인 신시아 레논과 결별하며 이혼하였다.
오노 요코와 전남편 사이의 이혼 소송이 마무리 된 후 1969년 3월 존 레논과 오노 요코는 결혼하였다.
요코는 존을 아예 다른 사람으로 탈바꿈시켜 놓았다.
신시아의 뺨을 때릴 정도로 마초성격이였던 존은 요코를 만난 뒤 페미니스트가 되었고, 사회 이슈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으며, 전위 예술을 자신의 음악에 접목시켰다.
존은 요코와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관계보다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난 늘 예술가 여성을 만나 사랑에 빠지는 것을 꿈꾸어 왔다. 나와 예술적 상승을 공유할 수 있는 여자, 요코는 나에게 바로 그런 여자다.”

존은 요코와 만남을, 정신적 성숙을 거치면서 자신의 과거를 후회하게 되었다고 말하며, 평화와 사랑을 외치는 삶을 살았다.
실제로 논란 많은야스쿠니 신사 방문을 제외한 모든 논란이 요코를 만나기 전에 생긴 것이며, 요코와의 만남이후 사회적 약자의 고통을 이해하고 자신의 과격했던 과거를 돌아보는 노래들을 많이 발표했다.
이 시절, 그는 심리 치료를 통해 평생의 트라우마였던 어린 시절 부모와의 관계에 대한 기억을 치유하기 시작하는데 이후 존이 정신적으로 안정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알려진다.
둘이 본격적으로 만남을 갖기 시작한 1968년을 기점으로, 존은 전위 예술가인 오노 요코의 영향을 받아 갖가지 전위적 행위를 따라하기 시작한다.
신혼여행 대신 언론을 호텔방에 초대한 후, 침대 위에서 파자마를 입고 앉아 반전시위를 한다던가(Bed-In for Peace 시위), 요코와 함께 발매한 실험 음반 자켓에 알몸으로 사진을 찍어 커버로 삼는다든가 하는 등,
그러나 요코와의 두 번째 결혼도 그다지 평탄하지는 않았다.
2. 요코가 소개한 중국인 비서 메이 팡
오노와의 만남 중에도 존은 외도를 멈추지 않았는데 이를 보다못한 요코는 자신의 중국인 비서인 메이 팡을 존 레논에게 소개시켜주며 차라리 내가 아는 사람과 바람을 피우라고 했다.
사실 존과 오노의 관계는 일반적 시선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오픈 릴레이션쉽(Open-relationship)에 가까웠으며 당사자들의 생각과 다르게 왜곡되게 해석되는 부분도 있다.
예를 들어 즉 잃어버린 주말시기를 제공한 메이 팡의 만남이다.
이후 존 레논은 미국의 아파트에서 메이 팡과 지냈다.

일부 팬들은 훗날 요코가 비틀즈 해체의 단초를 제공했다고 여겨 ‘마녀’, ‘일본 잡귀’라며 맹렬히 비난하기도 했는데, 그녀가 미디어를 통해 비틀즈 해체의 공신 중 한명으로 비추어진 이유도 있지만 일견 일리있는 지적이기도 하다.
비틀즈 해체의 직접적인 요인은 멤버들 간의 음악적, 사업적인 이견과 개인적인 불화였다지만, 바로 그 불화를 가속화 및 재점화하는데 요코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다수의 비틀즈 팬들 입장에서 어느 날 나타나 존의 음악까지 간섭하고 망친다는 인상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연유로 비틀즈 해체에 미친 영향 이상으로 과도하게 해석되는 경향도 확실히 있다 할 수 있다.
어쨌거나 비틀즈 해체하는 과정에서 친구이며 비틀즈 멤버인 폴매카트니와의 다툼은 심각했다.
해체 직후에는 둘은 서로를 디스해대며 싸워댔고, 특히 1971년, 존은 롤링 스톤지와의 인터뷰에서 폴과 조지를 크게 비난했다. ‘요코를 욕하는 그놈들을 패줘야 했었는데’라는 등,
당시 인터뷰에서 존 본연의 성격답게 감정적이고 즉흥적인 어조로 오노를 비난하는 이들에게 공격하였는데 존이 당시에 얼마나 쌓인 감정이 것이 많았는지 알 수 있다.
비틀즈 해체 이후 1970년대 중반 폴이 왕성한 솔로 활동을 한 것과 달리 존은 우울증에 빠져 대중에게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더욱 줄어들어갔으며 당시 존에 대한 인식은 그리 좋지 않았다.
비슷한 시기, 존 레논은 오노 요코와 별거를 결심하고, 비서인 메이 팡과 동거하게 되는데, 이 시기를 “잃어버린 주말”이라 일컫는다.
이 시기동안 레논은 보다 내면적 감정에 초점을 둔 두장의 앨범을 발표하는데 모두비교적 좋은 성과를 거두었고. 빌보드 싱글차트 1위곡을 배출하기도 했다.
또한 이 시기, 소울메이트인 폴 매카트니와의 교류를 재개하며, 비틀즈 시절에 대해 부정적 태도를 과거와 달리 비틀즈의 음악에 대해 긍정하는 태도로 돌아서기 시작한다.

그러다 오노 요코와의 별거를 끝내면서 베트남전이 끝난 1975년부터 존은 음악 활동을 중단하고, 5년간 가정 주부로 살기로 결심한다.
이는 어린 시절 불우했던 가정 환경에서의 경험이 아내 요코와 아들 션에 대한 사랑으로 변화한 것으로 보인다.
3.충격적인 존의 총격, 그리고 사망
그리고 1980년, 존 레논은 가정주부 생활을 끝내고 음악계 복귀를 선언하며 전체적으로 밝은 분위기와 내면적 이야기를 다룬 새 앨범 ‘Double Fantasy’를 제작하고 활동을 다시 시작하려던 찰나,12월 8일 월요일, 뉴욕에 있는 자택 앞에서 마크 채프먼이라는 사람에게 사인을 해 주고, 불과 5시간 즈음 후 총을 맞았다.
녹음 스튜디오에서 집으로 돌아오던 중이었는데, 마크 채프먼이 쏜 총탄 4발을 왼쪽 가슴과 어깨 부분에 맞아 쓰러졌다고 한다.
그는 병원으로 즉시 이송되었으나 도착할 즈음 과다출혈로 사망했다.
범인 채프먼이 아주 어렸을 때 레논을 좋아했던 것도 사실이라지만 레논을 살해한 동기는 그의 개인적인 정신병력과 종교적 동기가 복잡하게 결합한 결과로 알려졌다.
존 레논의 유골은 화장 후 요코가 보관하고 있다.

존레논에 대한 사족하나.
1963년 비틀즈의 매니저인 브라이언 엡스타인과 존 레논이 함께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휴가를 보낸 후 그가 게이라는 소문이 돌았었다. 브라이언은 게이, 동성애자였다.
폴 매카트니는 존의 게이설에 대해 “난 존과 단 둘이 한 방을 쓴 적이 여러 번 있지만, 그는 내게 아무 짓도 하려하지 않았다.”라며 소문을 부인했다고 한다.
그런데 2015년 오노 요코가 인터뷰에서 엡스타인과의 애정관계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이나 그가 양성애자 성향이 있긴 했으며, 존과 이에 대해서 진지한 대화도 했었는데 우리 모두 양성애자 성향이 조금이나마 있을 수 있으나, 사회적 시선때문에 숨기는 것이라는 말이 나왔었다고 한다.
그리고 존은 육체적, 정신적으로 모두 매력적인 남자를 만난다면 거부하지 않겠다고까지 말했었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