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비스 프레슬리의 연인,프리실라

엘비스 프레슬리의 연인, 프리실라

락의 황제 엘비스 프레슬리의 연인.
엘비스에게는 독일 주둔 미군이었던 시절 그의 아내가 된 프리실라를 만나 결혼을 한적이 있고 영화촬영 도중 앤 마그렛과의 의심스러운 염문을 뿌렸다.

이후 많은 여인들과의 염문이 있었지만 객관적으로 자료를 통해 알려진 사이로는 프리실라와 앤 마그렛이 유이하다.
자료를 통해 알려진 위대한 로큰롤의 황제 엘비스 프레슬리의 연인들에 대하여 확인 되어진 객관적인 사실을 기반으로 하여 알아 본다.

1.락의 황제 엘비스 

엘비스 에런 프레슬리(Elvis Aaron Presley(1935~1977)는 미국 미시시피주 투펄로에서 아버지 글래디스 플레슬리와 어머니 버넌 사이에서 태어난 미국의 가수이자 배우였다.


엘비스 프레슬리는 1950년대, 혜성처럼 대중 음악계에 등장하여 당시 로큰롤을 천박한 음악이라고 경멸하던 주류 미디어들을 평가를 뒤로 하고 로큰롤 음악으로 대중 음악계의 판도를 뒤집은 새로은 대중문화의 아이콘이었다.

어린 프레슬리는 제대로 된 음악 수업을 받지 못했고 악보를 읽지도 못했으나 귀동냥으로 음악을 공부하고 기타를 연주했다 1956년 1월, 공식적으로 RCA 빅터레코드사에서 〈Heartbreak Hotel〉라는 싱글을 발매하며 데뷔했고, 데뷔 직후부터 큰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엘비스 특유의 하반신을 흥겹게 흔드는 당시로서는 아주 파격적인 춤과, 흑인들의 전유물로 취급되던 소울(SOUL)을 기초로 한 로큰롤(Rock n Roll)음악을 선보이며 미국 대중 음악계를 뒤 흔들었고, 당시 보수적인 기성세대들에게 많은 홀대와 혐오 섞인 평가를 받았으나 젊은 층에게는 인기가 대단했다.

미국에서 인기 절정이던 1958년 3월 24일, 당시 징병제이던 군복무를 위해 머리를 깎고 군복을 입은 엘비스는 육군 기초 훈련을 마치고, 독일연방공화국 내에 소재하는 제1기갑사단 소속 미군기지에 소총병으로 18개월 복무하게 된다.


이기간중에 엘비스는 그의 첫 번째 연인 프리실라를 만난다.

엘비스의 군복무시절의 사진

엘비스가 군복무를 위해 독일로 가자, 수만 명의 여성 팬이 엘비스의 근무지까지 따라 갔을 정도로 인기는 지속되었다.

2. 군생활중 만난 엘비스와 프리실라


군에 있는 동안 어머니가 사망하자 장례식에 갈 수 없었던 엘비스는 어머니를 잃은 큰 충격을 받으며 실의에 빠졌지만, 1959년 9월 자신의 집에서 연회를 열고 실의를 달랜다.

그런데, 그연회에서 훗날 아내가 되는 14세의 소녀 프리실라 보리우를 만나게 되면서 사랑에 빠졌다.

프리실라 프레슬리(Priscilla Ann Presley Wagner.1945~)는제임스 와그너와 앤 와그너 부부의 딸로 독일에서 태어났으나 6개월 뒤 아버지가 사망하고 어머니가 퀘벡주 출신의 미국 공군과 재혼하면서 성이 보리우로 바뀌었다.

이렇게 14세인 프리실라 보리우는 독일 바트 나우하임에 위치한 엘비스 프레슬리가 군 복무 중인 그의 집에서 열린 파티에서 24세의 엘비스 프레슬리를 처음으로 만나게 된 것이다.


그녀의 등장에 엘비스는 첫눈에 반해 서두르고 당황하였지만, 저녁이 끝날 즈음에는 프리실라와 익숙하게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프리실라가 그날 밤 집에 늦게 돌아온 것이, 보수적인 그녀의 부모를 화나게 했고, 그들은 프리실라와 엘비스는 다시 만나면 안 된다며 강하게 반대했다.

그러나 첫눈에 반해 버린 엘비스는 프리실라를 만나고 싶다는 강한 열망과 다시는 그녀를 늦게 집에 들어갈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약속에 프리실라 부모는 결국 승락하게 되고, 둘은 만남을 가질 수 있었다.


이후, 프리실라와 엘비스는 1960년 3월까지 서독에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엘비스가 미국으로 귀국 후에 프리실라는 전화통화로 엘비스와 연락을 유지하면서 전 세계 언론 인터뷰 요청으로 유명세를 치르며 바쁜 날들을 보냈다.

그러나 엘비스와 프리실라의 만남을 알게된 엘비스 팬들은 그들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프리실라와의 관계를 시기하는 안티팬들은 프리실라에게 시기의 편지를 보내면서 흔들어 댔고, 계속 확산되는 가십지의 소문 속에는 엘비스와 낸시 시나트라(Nancy Sinatra, 유명가수 프랭크 시나트라의 딸)의 관계에 대한 소문도 있었다.


이런 소문을 접하게 된 프리실라는 자신과 엘비스와의 로맨스가 끝났다고 의심도 하며 다시 엘비스를 만날 수 없을까하는 걱정까지 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들이 다시 만난 것은 2년후인 1962년 여름이었다. 이때 프리실라의 부모들은 그녀가 2주 동안 미국을 방문할 수 있도록 동의했다.

대신 엘비스에게는 프리실라에게 항공기 일등석을 제공하고, 항상 보디가드와 비서가 돌봄을 제공하도록 조치해야 한다는 것과 프리실라에게는 매일 부모님께 편지를 쓰기로 한다는 조건을 붙혔다.

엘비스는 이 모든 요구사항을 받아들였고, 프리실라는 로스앤젤레스로 날아갔다.

엘비스는 그녀에게 라스베이거스로 가자고 했으며, 환락도시인 라스베이가스에 가는 것을 프리실라부모가 싫어 할 것을 우려해 매일 보낼 엽서를 미리 작성해 엘비스의 스탭 중 한 명이 로스앤젤레스에서 매일 편지를 우편으로 보내도록 조치까지 하였다.


라스베이거스 여행 중에 프리실라는 수면제를 복용하면서까지 엘비스의 일상스케쥴에 맞추기 위해 노력한 결과인지 프리실라의 부모들은 그해 크리스마스에 다시 방문한 후에는 엘비스와 프리실라와의 사랑을 확신하고 1963년 3월에는 프리실라가 멤피스로 이사가는 것까지 허락하게 된다.

프리실라는 5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엘비스의 저택에서 가까운 엘비스의 할머니 집에서 생활했다.

이후 프리실라는 할리우드에 활동하는 엘비스와 함께 동행하는 것을 원했지만, 엘비스는 일정상 바빠서 그녀를 멤피스에 머물게 했다.

3. 엘비스와 프리실라, 결혼을 하다.


그 기간 동안 프리실라는 엘비스와 그의 영화’비바 라스 베이거스’ 공동 주연인 앤 마그렛 사이의 로맨스에 관한 신문기사를 접했지만 엘비스는 이러한 보도는 영화를 홍보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명했고, 언론을 믿지 말라고 그녀에게 충고했다.


그 후 몇 년 동안, 엘비스는 여러 여배우와 의심스런 친밀한 관계를 가졌지만 이러한 관계를 프리실라에게는 부인했으며, 프리실라에게는 오해 해소차원의 짧은 기간동안만 할리우드를 방문할 수 있게 허용했다

프리실라가 21살이 되는 1966년, 엘비스는 프리실라에게 결혼을 제안했다. 일부 사람들은 엘비스가 결혼을 꺼렸고 이에 선택권이 없어서 어려웠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엘비스가 프리실라와 결혼을 하게 되어 기뻐했다고 한다.

프리실라의 책 ‘엘비스와 나’에서 그녀는 엘비스를 성적으로 행동하지 않는 매우 열정적인 사람으로 묘사했다.

그녀의 설명에 따르면 엘비스는 성관계를 가지기 위해서는 결혼할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하여, 프리실라는 결혼하기 전까지는 자신이 처녀였고 성관계가 없었다고 말했으나, 이 주장은 다른 사람에 의해 의문을 제기받기도 한다.

두 사람은 1967년 5월 1일 라스베이거스의 알라딘 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이 결혼식은 홍보를 극대화하기 위해 계획한 것으로, 매우 소수의 손님만 참석하고 8분 만에 끝났다.

엘비스와 프리실라의 결혼사진

결혼식에는 영화사, 음반사등 비즈니스관계자들과 가까운 친구, 가족들이 만이 참석했고, 이후 짧은 기자회견과 1만 달러 짜리 아침 식사 리셉션이 열렸을 뿐이다.


이 결혼식은 엘비스와 가장 가까운 친구들 중 몇몇은 실제 결혼식에 초대되지 않아 그러한 사람으로 부터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비난의 대부분은 초대를 맡은 파커라는 매니저에게 주어졌고 이 분노는 여러 해 동안 계속되었다.

리셉션 이후, 프리실라와 엘비스는 전용비행기를 타고 팜 스프링스에서 짧은 신혼 여행을 즐겼다. 5월 4일에 멤피스로 돌아와 미국 미시시피 주 경계를 넘어간 그들의 사유 농장에서 3주 동안 휴식을 취했다.

엘비스의 측근중 많은 사람들이 그들 부부와 함께 했지만 대부분 그들은 대기하는데 그쳤고 멤피스 외부인들의 침입 없이 둘만의 시간을 즐길 수 있었다.


프리실라는 그레이스랜드에서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해 불만이 쌓인 친구와 가족을 위해 또 한 번의 리셉션을 개최하며 엘비스의 이미지를 배려했다.

그 뒤 곧바로 프리실라는 임신했음을 알게 되었는데 너무 이른 임신에 실망하며 그것이 엘비스와의 관심에서 멀어질수도 있음을 불안해 했다. 급기야 엘비스와 함께 낙태를 논의했다고 한다.

그러나 둘 다 그렇게 행동한 경우 자기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는 결정을 하게 되고 그들의 유일한 자녀인 리사 마리는 정확히 결혼식 9개월 후 1968년 2월 1일에 태어난다.

 엘비스 프레슬리와 그의 안내 프리실라가 딸 리사를 안고잇는 사진

리사마리를 낳은 해, 프리실라는 엘비스가 영화 촬영 중이던 기간에 사교무용을 배우기 위하여 레슨을 시작했다.

훗날 회고록에서는 ‘마크’라고 불리는 이 강사에게 깊은 로맨스 감정을 느꼈다고 하며 짧은 관계가 있었다고 고백했으나 그 관계는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프리실라의 로맨틱한 사건(?)과 엘비스의 여배우들과의 염문을 고려해도, 결혼 초기 몇 년 동안 두 사람은 행복한 시간을 보낸 것 같다.

4. 엘비스의 염문과 프리실라의 보복성 불륜

그러나 엘비스의 1968년 텔레비전 스페셜방송 이후 한동안 주춤하던 그의 인기가 다시 상승하면서 투어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라스베이거스에서 공연을 하게 되면서 엘리스가 다른 여자들과 염문을 뿌리고 있었다. 이에 반해 프리실라는 집에서 딸 리사 마리를 돌보며 엘비스를 멀지감치 지켜봤다.

이런 투어와 공연중에도 엘비스는 건강관리를 위해 가라데를 배우고 있었는데 엘비스가 프리실라에게 가라데를 해보지 않겠느냐는 권유했다.


프리실라는 엘비스의 권유도 있고 건강을 위해서, 또 남편과의 관심사를 공유하고 싶어 1972년 부터 가라데를 배우기 시작했다. 엘비스의 콘서트 중 만난 카라테 강사, 마이크 스톤으로부터 였다.


그런데 프리실라는 스톤의 이성적인 매력에 빠져 그와 불륜의 열애를 시작하고 만다. 엘비스의 끊임없는 염문에 속으로 화가 난 프리실라의 보복성 외도였을 가능성이 크다.


프리실라는 자신의 책에서 “마이크와의 나의 관계는 열정적인 사랑으로 발전했다. 나는 여전히 엘비스를 사랑하고 있지만, 이후 몇 달 동안 나는 내 운명에 관한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것을 알았다.”라고 말하며 나중에 “당시 엘비스는 나에게 새로운 불안함을 눈치챈 것 같다”고 말했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연인 프리실라의 사진

이시기에 엘비스와 프리실라 사이에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하고 만다.

프리실라의 말에 의하면 엘비스가 희미하게 눈치를 채고 몇 달 후 엘비스가 호텔 스위트룸에 만나기를 요청하였다고 한다.

엘비스는 그곳에서 자신과 강제로 섹스를 하고 “이것이 진짜 남자가 여자와 섹스를 하는 방법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후에 엘비스는 그의 행동을 묘사한 말의 선택을 잘못됐으며 후회한다고 말하며 그것은 과장된 표현이었다고는 했으나 그 일로 “정말 상처 받았던 것은 그가 여성으로서 나에게 배려하지 않았고, 그리고 의도적으로 화해나 보상을 위해 시도했다는 것,” 그리고 “그가 나에 대한 성적 관심 부족, 그로 인한 상처와 불만”에 화가 났고 엘비스에 실망했다고 말했다.

5. 락의 황제, 프리실라와 이혼하다.


프리실라는 자신의 책에서 엘비스는 결혼하기 전에 여자와 섹스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며 혼전섹스에 절제하던 모습을 보여주며 배려했으나, 이 사건 이후에는 “내가 사랑했던 이해심 풍부한 엘비스가 아니었다”라고 요약했다.

프리실라와 엘비스는 1972년 2월 24일에 헤어졌으며, 프리실라와 리사 마리의 주소를 공개하는 것을 피하려고 법적 분리 신청을하고 1973년 1월 8일, 자신의 38번째 생일에 이혼 신청서을 제출했다.

이후 몇 달 동안 엘비스는 “내 안에는 너무 많은 고통이 있다… 스톤을 죽여야 한다”고 말하며 마이크 스톤에 분개하며 적개심을 드러냈다.

스톤 때문에 프리실라와 헤어지게 되었다고 화를 내며 절제력을 잃는 모습을 보였다.


그의 이러한 강한 적개심과 분노는 대량의 진정 약물 투여에도 불구하고 진정되지 못했다.

일설에 따르면 엘비스의 보디가드가 스톤을 청부살인 할 수도 있다고 제안했다고 하는데 이것에 대해서는 강하게 거절했다고 한다.

그렇게 이혼은 1973년 10월 9일에 확정되었다. 그는 이혼에서 오는 상실감을 이겨내고자 폭식을 했고, 한때 74kg이던 몸무게는 117kg에 이르렀다.

두 사람은 딸 리사 마리를 공동 보호하기로 합의하였으며, 프리실라는 72만 5천 달러의 현금 뿐만 아니라 엘비스의 신간 출판사 수익의 5%와 비버리 힐스 집 판매 수익의 반을 포함한 위자료를 받았다. 또 리사의 육아지원금도 받았다.

원래 프리실라와 엘비스는 이보다 훨씬 작은 금액(1만 달러의 일시불 지불, 월 1천 달러의 배우자 지원금, 월 500 달러의 육아지원금이 포함)으로 합의를 했었다.

그러나 엘비스의 지위를 고려하여 자녀를 위해 더 많은 돈을 쉽게 충당할 수 있다고 지적하는 변호사와 상의한 후, 그녀의 요구 사항은 더 커지게 되었고 이에 따라 최종합의하게 된 것이다.

프리실라와 엘비스는 이혼확정 당일 날에 법정을 손에 손을 잡고 나왔으며 이 후에도 비교적 가까운 상태를 유지하였다.

엘비스와 프리실라가 이혼법정에서 나오는 장면

프리실라는 이혼 이후 다시 결혼한 적은 없지만, 카라테 강사 마이크 스톤과 함께 살았고 1975년 헤어졌다.

또 1978년부터 6년 동안 모델 마이클 에드워즈와 동거 관계를 가졌으나, 마이클 에드워즈가 어린 딸 리사 마리에게 이성적인 감정을 가진 걸 확인하면서 헤어졌다.

그래도 프리실라와 가장 오래된 지속된 관계는 브라질 출신의 시나리오 작가이자 컴퓨터 프로그래머인 마르코 안토니오 가르시아(별명 마르코 가리발디)와 였는데, 두 사람은 22년 동안 함께 살았다.

이 두 사람은 1984년에 프리실라가 제작을 희망하는 시나리오를 쓰는 일을 하면서 만났다.

만남의 조건은 마르코 가리발디가 프리실라에 대한 책을 쓰지 않겠다는 계약서에 서명하고 만남을 시작한 것이었다.
1987년, 이들간의 아들 나바로네 가리발디가 태어났으며 이후 2006년에 그들은 헤어졌다.

이후 프리실라는 연기자가 되어 영화에 출연했으며, 의류 및 향수 사업을 하기도 하고, 엘비스를 주인공으로 한 성인 코미디 애니메이션 시리즈 “에이전트 엘비스”(2023)의 제작에 참여하기도 했다.

프리실라는 딸 리사 마리를 통해 할머니가 되었는데 손녀 중에는 여배우 라일리 키요가 있고 2022년에는 라일리 키요의 자녀출산으로 증조할머니가 되었다.

안타깝게도 그녀의 딸, 리사 마리는 2023년 1월, 54세의 나이에 심장 마비로 사망했다.

6.엘비스 프레슬리와 앤 마그렛

엘비스는 데뷔한 지 몇 개월 후인 1956년 11월, <러브 미 텐더>에 주연으로 출연하며 영화계에 데뷔했다. 1964년에 잠깐 사랑에 빠졌던 여인이 있다.

이때는 엘비스의 첫 번째 안내인 프리실라를 만나 멤피스에 데려다 놓았던 시기였는데 바로 앤 마그렛(Ann-Margret)이라는 미녀 배우다.

앤 마그렛은 가수이며 영화배우인데 1964년 ‘비바 라스 베이거스’ (Viva Las Vegas) 영화 촬영 중 MGM 촬영장에서 엘비스 프레슬리를 만났다.

당시 영화제작관계자인 필밍크는 “앤은 굉장한 에너지와 활기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전 출연했던 세 명의 남성출연자를 제치고 둘은 가장 어울리는 파트너였다”라고 주장했다.


그녀는 영화를 위해 엘비스와 함께 “The Lady Loves Me”, “You’re the Boss”, “Today, Tomorrow, and Forever” 세 가지 듀엣 곡을 녹음했지만, 그 중 “The Lady Loves Me”만 최종 영화에 포함되었다.

다른 곡은 발매가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이는 앤의 존재가 엘비스를 앞지르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에 한 결정이라고 전해진다.

앤 마가렛의 사진

1967년 5월 그녀의 매니저 역할을 맡았던 로저 스미스와 결혼을 한다. 그해 7월, Ann-Margret은 라스 베이거스에서 첫 라이브 공연을 시작으로 많은 공연을 하였다.

그녀의 5주간의 긴 공연기간 동안 엘비스 프레슬리는 그녀를 보기 위해 라스 베이거스로 와서 공연 개막때마다 기타 모양의 꽃다발을 보내고 공연이 끝나면 뒷마당에서 축하를 해줄 정도였다.

1977년 8월 17일, 엘비스 프레슬리가 심장마비로 사망하자 앤과 남편 로저 스미스는 멤피스에서의 엘비스의 장례식에 참석하였으며, 3개월 뒤에는 엘비스를 추모하는 ‘Memories of Elvis’를 진행한 적 도 있다.

엘비스와 앤과의 로맨틱한 사이가 어디까지 진행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치 않다. 다만 엘비스가 앤을 좋아하고 후원했던 것만은 사실이다.

7.가수이며 인간으로서의 엘비스프레슬리

엘비스 프레슬리는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문화적 힘이다. 그는 모든 것에 리듬을 도입했고 음악, 언어, 옷 등 모든 것을 바꾸었다. 그것은 완전한 새로운 사회 혁명이었다. 60년대가 엘비스에서 왔다.” -레너드 번스타인.

엘비스가 나타나기 전까지 내게 영향을 끼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존레논.

그의 음악을 처음 들었을 때 마치 감옥에서 풀려난 것 같았어요-밥딜런.

엘비스는 많은 로큰롤 힛트 곡과 앤 마그렛이 여주인공으로 같이 나온 영화 (1964)에서부터 다큐멘터리 (1972)까지 총 30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한 바 있다.

10년 동안 30편의 영화를 찍었으니 매년 3편을 찍은 것이다. 거의 다 엘비스의 노래 선전용으로 90분 짜리 뮤직비디오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현대에서 엘비스가 ‘위대하다’고 평가되는 이유 중 가장 큰 것은 지금은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흑백 인종차별이 매우 심하던 시대에 백인이 흑인 음악으로 세계적인 사랑을 받았다는 것이다.

시대를 뛰어 넘는 인종차별의 크로스 오버를 성공적으로 이룬 것이다.

엘비스는 가난한 시절을 보냈기에 성공한 뒤에도 어려운 사람들의 입장에서 잘 이해했으며, 꾸준히 자선단체에 많은 기부를 하고 어쩌다 만난 팬들에게도 선물하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대중문화의 중심이 된 후에도 국민적 인기가 큰 가수임에도 특권을 거부하고 군대에 자발적으로 입대하여 모범적인 군생활을 했으며 군과 음악 관계자들에게도 늘 존중하는 모습과 몸에 밴 겸손함을 보여주었다.


덕분에 젊은 시절 그의 춤과 노래를 보며 눈살을 찌푸리던 미국의 보수적인 기성세대들에게도 사랑을 받는 슈퍼스타이자 국민 가수가 될 수 있었다.


이런 면모는 복잡한 사생활과 괴팍한 성격, 뒷 세계와의 커넥션등으로 논란이 많은 이전 세대 아이콘 프랭크 시나트라와 차별되었으며, 엘비스 프레슬리를 미국의 수많은 팬들이 지금까지도 그리워하는 이유기도 하다.

엘비스 프레슬리는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체중이 늘기 시작했고, 약물 치료 등을 해 보았지만 별 효과를 보지 못했다. 식성 및 식습관도 연관이 당연히 있다.


1977년 1월엔 몸무게가 158킬로그램에 달했을 정도다. 결국 1977년 8월 16일, 엘비스 프레슬리는 멤피스자택의 욕조에서 쓰러진 채로 발견돼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42세의 젊은 나이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런데 근래에 들어 새로운 사망설이 제기되었는데. 바로 변비로 인해서 사망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엘비스 사망 후 부검에서 많은 양의 대변이 대장에서 검출되었고, 몸무게가 갑작스럽게 불어난 이유를 근거로 하여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할 수는 없다.

뒷 받침이 되는 사망설에 의하면 엘비스는 대변을 보지 못해 힘겨워했고 항상 대변이 마려운 그 상태가 멈추지 않은 상태로 살아야 하는 고통을 느꼈다고 한다.


주치의는 엘비스에게 항문 이식 수술을 권유했으나, 엘비스는 인기연예인 신분의 자신이 항문 이식 수술을 받았다는 사실이 공개되면 파장을 견디지 못해 수술을 미루다가 대변의 독성에 점점 더 중독되었다는 것이다.

어쨌든 엘비스는 잘생기고 화려한 외모와 로큰롤 음악의 상징성 있는 대표적 존재감, 그리고 이후 대중매체에서 하체를 흔들며 느끼하게 나오는 특유의 이미지로 인해 방탕하고 거만한 스타였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엘비스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스스로에게 엄격하였다.

그가 약물 남용으로 사망했다는 오명과는 달리 불법 마약에 찌들은 중독자가 아니었으며, 그 당시 미국의 방탕한 분위기를 조장하고 즐기기 바쁜 대부분의 연예인들과는 달랐다.

엘비스는 그야말로 겉만 멋지고 잘생긴 게 아닌 마음 속까지 품위 있는 모습을 가진 위대한 예술가로서의 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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