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사티의 연인, 수잔 발라동
관능적인 육체를 가진 여류화가 수잔 발라동과 인생에 단 한 번 뿐인 서정시인과 같은 작곡가 에릭 사티의 사랑이야기.
에릭 알프레드 레슬리 사티 (Eric Alfred Leslie Satie, 1866. 5. 17 – 1925. 7. 1, 59세)는 프랑스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이다. 신고전주의 선구자로서 활약한 프랑스근대의 독특한 작곡가이다. 사티는 노르망디의 옹플뢰르에서 아버지 알프레드 사티와 그의 아내 제인 레슬리의 첫째 아이로 태어났다.
에릭 사티는 1893년, 화가 수잔 발라동(Suzanne Valadon)과 5개월간 관계를 맺은 것이 그의 인생에 있어 유일한 사랑이었다.
1.사티와 수잔 발라동의 만남
수잔 발라동(Suzanne Valadon,1865-1938)은 프랑스의 화방의 모델지자 화가여였다. 태어날 때의 원래 이름은 마리-클레멘틴 발라동이었다.

그녀는 당시의 명성 있는 화가인 에드가 드가(Edgar De Gas, 1834~1917)의 제자이면서 그림을 배우기도 했지만,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고, 스승을 뛰어 넘는 자신만의 독특한 작품으로 더 유명하다.
발라동은 그림뿐만 아니라 조각작품도 창작했으며, 주로 누드와 노동자들의 도시 생활을 주제로 한 작품을 그렸다.
1894년 발라동은 Société Nationale des Beaux-Arts(프랑스국립 미술협회)의 최초 여성 화가로 입회한 프랑스의 대단한 화가였다.
에릭 사티는 수잔 발라동을 만날 때까지만 해도 “로즈 크로아(Rose+Croix)”( 장미십자가)라는 종교예술단체에 가입하여 ‘종교적인 의미와 철학적인 아이디어를 예술 작품에 통합하려는 노력을 하던 단체’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다.
이렇게 평범하던 종교 작곡가 에릭 사티와 야심차고 반항적이며 직선적으로 열정적인 여성 화가이던 수잔발라동과의 만남은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1893년, 종교 음악가 에릭 사티는 운명적으로 화가 수잔 발라동을 만난다. 사티의 나이 27살, 수잔의 나이 28살이었다.
수잔 발라동은 그의 활동하던 동시대에서 독특하고 독창적인 미술 작품을 화단에 내세우며 작품을 발표하던 유명한 화가로 평가 받고 있었다.
아직 작곡가로서 제대로 평가를 받고 있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타고난 재능을 갖고 있던 에릭 사티였다. 이런 출중한 예술감각을 갖고 있는 두 예술가의 만남은 서로에게 영감을 주고받는 동반자로서, 또 격정적인 육체 관계를 유지하며 서로의 작품에 영향을 주고받았다.

결과적으로 예술의 경계를 넘나들며 교류한 그들의 만남 덕분에 후세인 우리가 사티와 발라동의 훌륭한 작품을 접할 수 있는 것으로 평가 된다.
사티는 첫날밤을 발라동과 함께 보낸 후, 발라동에게 청혼했다. 하룻밤의 인연으로 청혼을 받은 발라동은 당황했다.
발라동은 사티의 급작스런 청혼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그래도 발라동에게는 싫지 않은 매력이 있는 사티다. 고민하던 발라동은 사티의 청혼에 확답은 하지 않고, 대신 몽마르트르에 있는 사티의 집, 옆방으로 이사를 해서 담콤한 시간을 보낸다.
이때까지만 해도 작곡가로서의 사티는 미래가 불투명했다. 발라동이 그의 청혼에 쉽게 허락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리고 관능적이고 뜨거운 욕정을 가진 본인을 감당하기에는 사티는 충분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살아온 그의 경험은 사티의 순진한 기대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런 발라동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에릭 사티는 관능적인 육체와 뛰어난 예술적 감각을 가진 발라동에 게 푹 빠졌다. 더하여, 본인의 성격과 달리 열정적이고 반항적인 발라동의 매력은 또 다른 덤이었으며 사티는 그녀의 모든 것을 사랑했다.
“발라동의 사랑스러운 눈, 부드러운 손, 작은 발 그리고 그녀의 존재가 나의 행복”이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수잔을 자신의 “비키( Biqui)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사티는 그의 비키를 만나는 동안 마음을 진정시키는 수단으로 《Danses Gothiques》를 작곡했으며, 발로동은 사티의 초상화을 그려 주었다.
2.발라동의 배신과 충격에 빠진 에릭 사티
이들은 5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만나는데 그쳤다. 이들이 만난지 단 5개월만에 발라동은 이사를 갔고, 사티는 망연자실했다.
사티는 그때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머리는 공허함으로, 가슴은 슬픔으로 채우는 얼음같이 차가운 외로움 외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라고 했다.
그만큼 사티는 절망했다. 홀로 남겨진 사티는 어두운 방에서 수잔 발라동을 위해 서정적인 음악을 작곡한다.
“난 너를 원해 ”<Je Te Veux>.
이미 다른 남자를 사랑하여 자신을 떠난 한 여인에게 센티멘탈한 왈츠풍으로 작곡한 이곡은 감미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3. 충격적인 스잔 발라동의 아들 친구, 우터와의 결혼
사티 평생의 유일한 연인, 수잔 발라동은 몽마르트르에서 빨래를 빨아 생계를 유지하는 미혼모인 엄마와 함께 아주 가난한 환경에서 자랐다.
매우 독립적이고 반항적인 성격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 그녀는 11세까지 초등학교에 다녔으며, 그 때부터 일을 시작하여 가정형편을 돌 봤다.
여러 직장을 두루 가졌는데, 밀가루 공장에서 일하거나, 신발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기도 했고 야채를 판매하거나, 술집에서 웨이트레스로 일하는 등, 어린나이에 다양한 경험을 했다.
1880년 그녀의 나이15세 때에는 서커스단에서 곡예사로 일하기도 했는데, 곡예연기를 하다 낙상을 하게 되어 등을 다치면서 그만두었다.
다행히도 우연한 기회에 화가의 모델로 발탁되어 몽마르트르의 화가골목에서 모델로 일하기 시작했다.

발라동에게 모델 활동은 그녀의 일생에 천재일우의 기회였으며 일생일대의 전기가 되었다.
그녀는 모델로서의 능력은 탁월했다. 모델로 활동한지 얼마되지 않아 많은 개런티를 받고 유명 화가들의 모델이 되었다. 그녀가 모델이 되어준 유명한 화가들 중에는 르누아르(Pierre-Auguste Renoir)와 앙리 드 툴루즈-로트렉외 여러 유명화가들이 있었다.
발라동은 모델에 그치지 않았다. 그때에 나름 유명세를 타고 있던 화가 툴루즈 로트랙(Henri de Toulouse-Lautrec,1864-1901)의 연인이기도 했는데, 이 관계는 2년 동안이나 이어졌다. 그러나 발라동이 자살시도를 하면서 종지부를 찍었는데 자살시도 이유는 알려지지 않는다.
1883년 발라동은 아들(모리스 유트릴로, Maurice Utrillo )을 낳는다. 발라동의 친구 미쿠엘 유트릴로는 법에서 인정하는 서류에 서명하며 본인이 모리스의 아빠라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그가 아빠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발라동 역시 아이의 아빠가 누구인지 강변하지 않아 실제의 아빠가 누구인지는 모른다.
발로동은 오랜기간동안 피에르 푸비 드 샤반, 앙리 드 툴루즈-로트렉,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등, 유명화가등의 모델 활동을 하며, 자신이 포즈를 취한 화가들의 기술을 관찰함으로써 자신의 그림 그리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영감을 받아 타고난 예술적 감각과 노력으로 성공적인 화가로 거듭나게되며 화단으로 부터 인정받아 유명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타고난 예술적 감각을 갖고 있는 발라동에게 사티의 출현은 발라동이 갖고 있는 또 다른 잠재적 예술 감각에 자극을 주었다.
이같이 불붙은 감각을 화폭에 표현하기 시작하면서 발라동의 그림은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이런 감각의 일깨움은 단비같이 예술적 욕망을 채웠지만 본인의 관능적인 욕망을 채우기에는 사티는 충분하지 않았다.
사티와 헤어지고 31살이던 1896년, 가난하고 불우하게 자라던 본인의 욕구를 충족시켜줄수 있는 재력을 가진 은행가 폴 모이세스(Paul Mousis)와 결혼을 했다.
그것도 잠시였다. 모이세스의 욕구 충족은 재력 뿐이었다. 1909년 발라동은 친 아버지가 누구인지 명확히 밝히지 않은 아들 모리스(Maurice Utrillo)의 친구인 앙드레드 우터(André Utter)를 알게 되었다.
젊은 우터는 그녀의 눈에 욕구를 충족시켜줄 대상으로 보였고 우터의 남성적 매력에 빠졌다. 우터는 발라동의 <아담과 이브>이라는 작품에 모델로 등장시키고, 우터에게 유혹을 손길을 뻗쳐 둘은 사랑에 빠진다.
세간의 따가운 시선은 마음에 두지 않았고, 격정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재정적 후원역할만 하고 있는 남편 모이세스와의 이혼을 추진한다.
마침내 그로부터 4년 후인 1913년, 형식적인 부부관계를 종료하기 위해 폴 모이세스와 이혼을 한다. 그리고 이혼서류의가 승인나자마자 우터와 결혼한다.
우터와 결혼한 후 발라동은 아들 모리스와 남편 우터를 화가로서 경력을 쌓아주고자 후원등의 관리를 충분히 해 주었고, 결국 아들 모리스와 안드레 우터는 성공한 프랑스 화가로서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렇지만 이들의 결혼을 두고 세간에는 말이 많았다. 발라동과 그녀의 아들인 모리스(Maurice)와 남편인 우터(André Utter)를 합쳐 “저주받은 3인”이라고 손가락질했다. 충분히 이해가 가는 반응이다.
이렇게 말이 많았던 발라동의 행복한 결혼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때 발라동은 48세, 우터는 27세였다. 무려 21살의 나이차이다.
우터는 나이 많은 발라동이 여자로서는 만족스럽지 못했고 불만족을 그대로 참고 지내지 않았다.
발라동과의 결혼관계는 유지했으나 여러 여자를 만나 바람을 피우기 시작했고 무척이나 발라동의 속을 태웠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식적인 관계만은 유지했다.
발라동과 우터 부부가 이혼할 때인 1934년까지, 무려 21년 동안은 형식적 관게를 유지하며 정기적으로 함께 작품을 전시했다.
수잔 발라동(Suzanne Valadon)은 1938년 4월 7일 72세의 나이로 뇌졸중으로 관능적으로 평생을 살았던 그의 육체를 멀리하고 사망했다.

둘은 발라동이 죽을 때까지 화가로서 협력관계를 유지했고 파리의 묘지에 함께 묻혔다.
발라동은 거의 40년 동안 화가로 살았다. 그녀의 드로잉과 그림의 주제인 ‘인생의 기쁨’ (1911)과 같은 작품들은 대부분 여성의 누드, 여성 초상, 정물, 풍경 등이었다. 특정 전통이나 예술적 스타일에 구애받지 않았고, 남성의 누드화와 남성들의 이상화된 여성 이미지에서 벗어난 여성 이미지를 화폭에 담아 당시 화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4.발라동과 헤어진 후의 에릭 사티
발라동과 사티의 관계는 인간 감정과 예술의 깊은 연결을 나타내는데, 사티의 음악은 발라동의 미술작품에도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발라동은 작품을 통해 사티의 음악을 색감과 형태의 변화로 표현되었다. 서로다른 예술 형식, 즉 음악과 미술이라는 서로다른 예술형태가 만나 탄생한 이 아름다운 조화는 그들 각자의 예술적 취향과 스타일을 보존하면서도 서로의 작품에 새로운 차원을 부여했다고 평가받는다.
1895년 사티는 발라동과 헤어진 후, 발라동을 만나기 전의 이미지에서 헤어짐의 큰 충격으로 자신의 이미지를 귀공자풍으로 바꾸려고 한다.
몽마르트르보다 더 거주비용이 저렴하고 조용한 곳을 찾아 파리 중심부에서 8킬로미터 떨어진 아르퀴유-카샹(Arcueil-Cachan) 코뮌의 남쪽 교외에 있는 방으로 이사했다.
그리고 1898년에 파리 교외의 빈민가 아르퀴유-카샹으로 거주를 옮겨 사회복지 활동을 하며 아동 복지를 위해 힘쓰는 한편, 밤에는 몽마르트르의 나이트클럽에서 일하면서 수많은 샹송을 작곡한다.
사티는 남은 생애 동안 이곳에서 생활했다. 그의 집에는 누구의 방문도 하용하지 않았고, 급진적 사회주의 정당에 가입하여 활동했지만 본인의 이미지는 귀공자풍으로 부르주아적 이미지를 유지했다.
또, 음악적 우상 파괴자이자 모더니즘의 주창자임에도 신문물에 반감을 가졌다. 음악가로서 녹음을 전혀 하지 않았고, 라디오 방송청취와 전화통화도 거의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다.
사티는 술을 많이 마셨다. 1925년에는 건강이 많이 나빠졌다. 그리고 간경변 진단을 받고 파리의 생 조셉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7월 1일, 59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그리고 아르퀴유 묘지에 묻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