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트 피아프의 연인(2/2), 마르셀 세르당, 자크 필스, 테오 사라포.
에디트 피아프(Edith Piaf, 1915. 12.19.~ 1963 )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가장 위대한 대중 가수이자, 1998년 그래미 명예의 전당에 오른 ‘장밋빛 인생(La Vie en rose)’을 작곡, 노래한 주인공이다. 에디트 피아프 하면 떠오르는 명곡이다.
에디트 피아프(Édith Piaf)는 프랑스 파리의 가난한 거리의 곡예사 아버지와 가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에디트는 나이트클럽에서 노래하다 명성이 올라가자 에디트의 남성편력은 시작되었다. 그리고 에디트 피아프의 연인도 다양해졌다.
후원하던 이브 몽탕이 에디트의 명성과 비슷해지자 연인관계에서 과감히 이별을 통보했다.
1. 에디트 피아프와 마르셀 세르당의 운명적 만남
유명해진 에디트는 치열하고 지루했던 2차대전이 끝난 후 그녀의 노래가 프랑스를 넘어 국제적으로 유명세를 치르게 되었다.
유럽, 미국, 남미를 여행하며 공연투어를 했다. 초기에 미국팬들은 에디트에게 화려하고 스펙터클한 공연을 기대하였지만 피아프의 단순한 표현력에 실망하게 되며 미국 관객들에게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1947년 뉴욕의 영향력 있는 음악비평가 버질 톰슨(Virgil Thomson)이 호평을 하자, 미국에서의 인기가 회복되었다.
결국, 미국의 유명한 토크쇼인 에드 설리번 쇼(Ed- Sullivan Show)에 여덟 번, 카네기 홀에서 두 번(1956년과 1957년)을 공연할 정도로 인기가 높아졌다.
그러던 1947년, 미국 공연투어 중 운명적으로 권투 선수 마르셀 세르당을 만나게 되고 사랑에 빠졌다. 이브 몽탕과 헤어지고 한동안 잠잠했던 피아프는 근육질의 매력적인 유부남 세르당에 빠져든 것이다.

마르셀 세르당( Marcel Cerdan, 1916. 7. 22 – 1949. 10.28)은 프랑스의 식민지 알제리에서 태어났다. 프랑스의 프로 권투 선수이자 세계 미들급 챔피언으로, 많은 권투 전문가와 팬들에 의해 프랑스의 가장 위대한 권투 선수로 여겨졌다. 그는 알제리 일용직 노동자 안토니오 세르당(1880-1946)과 스페인 출신의 어머니 사이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1934년 프로로 데뷔해 47연승을 거두고, 프랑스, 유럽 미들급 타이틀을 석권했다. 마르셀 세르당(Marcel Cerdán)은 마르네트와 이미 결혼했으며, 세 자녀가 있는 유부남이였다.
그는 자신의 조국인 알제리에 살았기 때문에 에디트를 자주 만나지 못했다. 마르셀은 에디트에게 서로 멀리 살지 않도록 언젠가 결혼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아내와 이혼을 계획하고 피아프와 결혼할 날짜까지 잡았다.
그들의 불륜 사실이 알려지자 이 사실은 국제적인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세르당은 미들급 세계챔피언이었고 프랑스에서도 국민 복서로 유명했기 때문에 더더욱 유명세를 치렀다.
세르당의 아내 마르네트 로페즈와 결혼 생활은 피아프를 만나게 되면서 어려워졌다. 피아프와의 불륜이 공개되고 화제가 되자 마르셀과 마르네트는 1948년에 결국 이혼한다.
세르당은 피아프와 연애를 하던 1948년 9월 21일, 뉴저지주 루즈벨트 스타디움에서 열린 12라운드에서 토니 잘(Tony zale, 미국)을 KO시키며 세계 챔피언이 되었다.
세계챔피언이 되자 프랑스에서는 한마디로 난리가 났다. 짧은 기간 동안 세르당은 프랑스 파리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인물이 되었다.
2. 마르셀 세르당의 갑작스러운 죽음
그러나, 잘 나가던 피아프와 마르셀의 사랑은 길지 않았다. 불과 2년도 안된, 1949년 10월, 세르당은 피아프를 만나기 위해 파리에서 뉴욕으로 날아간다.
그러나 마르셀이 탄 에어 프랑스 009편 비행기는 포르투갈의 중간 기착지에서 착륙을 시도하던 중 추락했다.
이 사고로 세르단은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 지네트 네뵈(Ginette Neveu, 1919 -1949)과 함께 사망하고 만다. 당연히 이들을 포함한 탑승자 전원이 사망했다.
에디트 피아프에게는 그날이 그녀에게 있어 비극적 인생 종말의 시작이었다. 고통이나 실망으로 무너졌을 때 마르셀을 통해 얻었던 힘도 마르셀이 떠난 후에는 그녀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피아프는 세르당과의 사랑을 잊지 못해 1950년 5월 <사랑의 송가>(Hymne à l’amour)를 작곡하고 세르당에게 헌정하기 위해 노래한다.
1983년, 세르당과 피아프의 삶은 클로드 를르슈(Claude Lelouch)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졌다.
아이러니하게도 마르네트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마르셀의 아들 마르셀 주니어도 권투선수였는데, 이영화에서 자신의 아버지역할을 맡아 연기했다.
본인의 어머니에게 이혼의 상처를 준 피아프와 아버지의 러브 스토리에서 아버지 역할을 한 것이다.
아들의 심정이 어떠했는지 궁금하다.
3. 에디트의 첫 번째 남편 자크 필스
마르셀과의 아픔이 가시기 전인 1951년 피아프는 교통사고로 부상을 입었다. 피아프와 가수 샤를 아즈나부르(당시 그녀의 조수)는 모두 차량에 타고 있었고, 피아프는 팔이 부러지고 갈비뼈 두 대가 부러졌다.
의사는 치료제로 모르핀이라는 약을 처방해 주었는데, 모르핀은 알코올 문제와 함께 약물 의존증이 되었다. 심리적으로 어려운 데다 교통사고까지 당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어려운 상황에서 프랑스의 가수이자 배우인 자크 필스를 만나 위로를 받는다. 자크는 둘은 음악활동을 하며 친해졌고 서로 영감을 주고받았다. 둘은 1952년 9월 20일 결혼한다. 피아프의 많은 남자 중 첫 번째 결혼을 한 상대자였다.
둘의 결혼 생활은 단 4년만 지속되었다. 에디트와 자크의 사랑은 이전에 언급되었던 사랑과 달랐다.
에디트와 가볍게 만나 함께 잤다가 다음날 그들을 그냥 보내버린 익명의 남자들의 목록에 넣을 사람은 아니었다.
자크 필스(Jacques Pills, 1906 – 1970 )는 프랑스의 가수이자 배우이다. 그는 1939년 프랑스 가수 루시엔 보이어(Lucienne Boyer)와 결혼했고, 보이어와는 피아프를 만나기 전 1951년에 이혼했다.
그런데 피아프는 또 한번의 교통사고를 당한다. 거의 죽을 뻔한 두 건의 자동차 충돌이 상황을 악화시켰다.
1952년, 자크 필스는 세 차례에 걸쳐 피아프를 디톡스 클리닉에 강제로 입원시켜 치료받게 한다.
자크 필스는 피아프가 어려울 때 약간의 평온함을 주었던 사람으로 남아 있다. 서로 음악적 영감을 교류하며 지내다가 피아프와 필스는 1957년에 이혼한다.
4. 피아프의 두 번째 남편 테오 사라포
에디트 피아프, 그녀의 인생에 마지막으로 들어온 남자는 26세의 그리스인 테오파니스 람부카스(Théo Sarapo, Theophanis Lamboukas)였다.
테오 사라포(Théo Sarapo,1936-1970)는 프랑스의 가수이자 배우로 전직 미용사였다. 그리스인 부모사이에 파리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는 파리로 망명하여 미용사로 생계를 꾸렸다. 그는 피아프를 비롯한 가수들의 곱슬머리를 쓰다듬는 일을 맡은 미용사였는데 피아프는 타고난 재주를 발휘하여 그를 연인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와 결혼하기로 결정했다. 날짜는 1962년 10월 9일, 피아프의 나이 46세 때였다.
사라포는 피아프보다 20살 어렸고 두 사람은 피아프가 죽을 때까지 결혼 생활을 유지했다.
이듬해인 1963년 초, 남편 테오 사라포와 함께 ‘베를린 옴므’를 녹음한 직후, 피아프는 간암으로 혼수상태에 빠졌다.
그 후 몇 달 동안 그녀는 의식을 잃었다 깨어났다를 반복하다가 1963년 10월 10일에 47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만다. 테오와 결혼한지 겨우 1년만이다.

피아프의 시신은 파리의 페르 라셰즈 묘지에 묻혔으며, 그녀의 무덤은 프랑스 국민이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 중 하나가 됐다.
피아프가 사망하자 프랑스 법원은 그녀의 700만 프랑 상당의 빚을 사라포에게 갚으라고 명령했다.
에디트 피아프가 가진 재산을 보고 결혼을 한 테오는 오히려 거액의 빚을 유산으로 상속 받아 날 벼락을 맞았다. 그리고 피아프의 장례를 치른 지 얼마 되지 않아 살던 아파트에서도 쫓겨났다.
한때 재정적 자유를 꿈꾸어 피아프의 재산을 보고 결혼까지 했었지만, 불행하게도 1970년 8월 자동차 사고로 사망하고 만다.
그는 피아프의 딸 마르셀(피아프가 한때 연인이었던 루이 뒤퐁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과 함께 파리의 페르라셰즈 묘지에 묻혔다.
연애와 예술 생활이 에디트 피아프의 삶보다 더 밀접하게 연결된 예술가가 또 있을까?
짧은 생애 동안 신기하고 4차원적이면서 대중적인 존재였던 피아프는 결코 사랑 없이 노래할 수 없었다.
그리고 잔인할 정도로 열정적이었으며, 지극히 자기중심적 과잉으로 불붙은 바보스러움은 남자에 대한 편력과 노래에 대한 열정으로 점철된 삶을 불태웠다.
그녀의 이름 에디트 피아프이다. july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