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트 피아프의 연인, 이브 몽탕,
에디트 피아프(Edith Piaf, Edith Giovanna Gassion)(1915.12.19~1963)는 프랑스에서 가장 위대한 대중 가수이자 20세기의 가장 유명한 음악가이다.
에디트 피아프(Édith Piaf)는 프랑스 파리의 가난한 노동자 구역인 베르빌에서 거리의 곡예사 아버지와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는 가수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길거리의 삼류 가수로 여기저기에서 노래를 부르며 커리어를 쌓아 생계를 유지했으며, 이런 사정으로 어린 에디트를 부양할 수 없었다.
그래서 에디트는 알코올 중독자인 외할머니에게 맡겨졌다가 창녀촌의 친할머니에게 맡겨지면서 그곳에서 유아 시절을 보냈다.
에디트의 어린 시절은 불우했으며 가난 때문에 영양실조와 시력을 잃을 위기에 처할 정도였다.

에디트는 14세 때부터 유행하던 노래를 아버지를 따라 장터와 거리에서 부르면서 자신의 재주와 뛰어난 목소리를 알렸다. 그리고 15세 때부터는 골목을 누비며 노래를 불러 생활비를 벌었다.
1. 에디트 피아프의 첫 남자 루이 뒤퐁, 그리고 딸 출산
이듬해 1930년 15세 때부터 피아프는 시몬 베르토( Simone Berteaut)를 만났고, 피아프는 시몬과 그녀의 인생 대부분을 동반자로서 지냈다.
베르토는 나중에 회고록에서 자신을 피아프의 이복 여동생으로 거짓 소개했다. 그들은 함께 거리를 돌아다니며 노래를 부르고 돈을 벌었다. 피아프가 곡예 트리오의 일원으로 번 돈으로 베르토와 지낼 자신들의 집을 빌릴 수 있었다.
피아프의 나이 16세 때인 1932년 루이 뒤퐁(Louis Dupont)이라는 청년을 만나 한동안 함께 살았다. 그녀는 임신을 하여 1933년 딸 마르셀 뒤퐁을 낳았다.
피아프와 뒤퐁의 관계가 끝난 후, 아버지와 함께 살던 마르셀은 뇌수막염에 걸려 1935년 두 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1935년, 피아프는 나이트클럽 주인 루이 르플레(Louis Leplée)에 의해 발견되었고, 르플레는 피아프가 나이트클럽에서 노래를 부르도록 설득하여 같이 일을 하게 된다.
르플레는 왜소하고 갸날픈 피아프를 (142cm의 키) “와이프 참새” 또는 “작은 참새”를 뜻을 가진 파리 속어 라 맘 피아프(La Môme Piaf)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그리고 검은색 드레스를 입게 하고 무대에서의 적응등에 대해 가르쳤다.
작은새 피아프(Piaf)는 그녀의 이름이 되었고 검은색드레스는 피아프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그렇게 피아프와 함께 일하던 르플레가 1936년 4월 6일, 갑자기 살해를 당했다. 피아프는 범인으로 의심을 받아 심문을 받고 살인혐의로 기소되었으나 무죄 판결을 받았다. 르플레는 마피아들에게 살해당한 것으로 후에 밝혀졌다.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피아프는 실의에 빠졌다. 어린 나이에 딸을 낳았지만 1년전에 병으로 죽었고, 아기의 아버지였던 루이 듀퐁과는 헤어졌다.
그런데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그녀를 구제해 주었던 르플레가 살해당해 살인혐의로 누명까지 써서 어렵게 어렵게 법원의 판결로 누명을 벗었다.
언론의 부정적 관심이 피아프의 커리어를 위협했지만 에디트는 그녀의 예명을 “에디트 피아프”로 바꾸고, 이미지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레이몬드 아소(Raymond Asso)를 영입하여 로맨틱한 관계를 맺기도 했다.
2. 에디트의 남성편력과 이브 몽탕과의 만남
피아프의 명성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하는 동안 탄력을 받았다. 그녀는 배우이자 가수인 모리스 슈발리에(Maurice Chevalier)와 시인 자크 부르가(Jacques Bourgeat)와 같은 저명한 사람들과 우정을 쌓기 시작했다. 그리고 참전한 군인들에게 인기로 번성했던 다양한 나이트클럽등에서 공연했다.
이처럼 그녀의 명성이 올라가자 그녀의 남성편력이 시작되었다. 에디트 피아프의 연인은 다양해졌다.
처음는 유망한 젊은 가수들이 빈민가나 허름한 클럽에서 노래하는 그들을 구제하였지만, 나중에는 피아프의 집에 나타나 도움을 청했다.
후자 중에서는 길버트 베코(Gilbert Bécaud) 샤를 아즈나부르 Charles Aznavour) 죠르쥬 무스타끼( Georges Moustaqui) 이브 몽탕(Yves Montand)이었는데, 이중 이브 몽탕과는 짧은 만남이 아닌 오랜 기간 동안 연인 관계를 유지했다.
아즈나부르는 피아프의 운전사로 일했다. 그는 에디트와 함께 자고, 노래하는 법, 무대에 오르는 법, 작가와 적절한 노래를 선택하는 법을 배웠고 가수로 성장할 때까지 피아프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리고 그들이 어느 정도 성장하면 홀로 커나가도록 놓아주었다. 마치 먹이를 주어 성장한 후 홀로 날도록 한 후 놓아주는 작은 새처럼, 그렇게 하였다.
1944년 초, 피아프는 파리의 물랑루즈 카바레 공연장에서 공연을 했는데, 그곳에서 젊고 잘생긴 이브 몽탕을 만났다. 그리고 그와 로맨스에 빠졌다.
이브 몽탕(Yves Montand, 1921- 1991)은 이탈리아 태생의 프랑스 배우이자 가수로 빗자루 제조업자의 아들로 이탈리아에서 태어났다.

1923년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 이후 이탈리아를 떠나 프랑스로 갔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진 시기에는 독일군을 피해 파리로 떠났다.
2차대전 중이던 1944년 파리에서 에디트 피아프를 만나 그녀에 의해 발탁되었다. 두 사람은 서로 첫눈에 반해 연인이 되었고, 피아프는 무명의 가수, 배우에 불과한 이브 몽탕에게 무대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씩 하나씩 가르쳐주었다.
그의 나이 23세, 에디트의 나이 29세 때다. 에디트는 몽탕에게 모든 걸 가르쳤고, 이브 몽탕을 연인으로 제자로 그녀의 일부로 만들었다.
타고난 재능이 있는데다 에디트의 가르침에 스펀지처럼 흡수력이 좋았던 몽탕은 가수로서 배우로서, 프랑스에서 차근차근 명성을 얻어 나갔으며 많은 영화에 출연했다.
1년도 채 되지 않아 몽탕은 프랑스에서 가장 유명한 가수 중 한 명이 되었으며, 그가 부른 파리에 대한 노래는 즉시 샹송의 고전이 될 만큼 유명해졌다.
피아프는 이 시기인 1945년 자신의 대표곡 ‘장미빛 인생(La Vie en rose)’을 작곡하고 노래했다. 우리가 에디트 피아프 하면 떠오르는 그 곡이다. 이 노래는 1998년 그래미의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1947년, 그녀는 연인 몽탕을 위해 “What Can I Do?”라는 노래의 가사를 쓰기도 했다. 에디트는 이브 몽탕이 그녀만큼 유명해졌을 때 그와의 관계를 끊었다.
이 기간 동안 피아프 또한 프랑스에서 가장 인기 있는 연예인으로 파리에서 큰 인기를 끌며 크게 성공했다.
전쟁이 끝난 후 에디트의 노래는 프랑스를 지나 국제적으로도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유럽, 미국, 남미를 여행하며 공연을 했다.
한편, 에디트와 헤어진 이브 몽탕은 1951년, 미녀 배우 시몬 시뇨레(Simone Signoret)와 결혼했고, 그들은 여러 영화에 공동으로 주연을 맡아 연기했다.
시뇨레와의 결혼 생활은 몽탕이 1985년 사망 할 때까지 지속되었지만, 한때 마를린 먼로와 스캔들이 있었다. 몽탕은 1991 년 11 월, 프랑스 프로방스의 집에서 심장 마비로 사망했다.

에디트는 몽탕과 헤어진 후 그녀가 운명적으로 가장 사랑했던 연인 세계적인 미들급 권투선수 마르셀 세르당을 만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