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엘가의 연인, 캐로라인 엘리스 로버츠
에드워드 엘가(Edward Elgar, 1857.6.2 ~ 1934.2.23.)는 영국을 대표하는 낭만주의 작곡가로 우리의 귀에 아주 익숙한 <위풍당당 행진곡>과 <사랑의 인사>의 작곡자이다.
에드워드 엘가는 잉글랜드 교회당의 오르간 주자인 아버지로부터 음악에 대한 기초 교육을 받았고, 일찍부터 아버지의 조수로서 오르간을 연주했다.
그 후에는 거의 독학으로 작곡 · 지휘 연주법 등을 배웠고, 겨우 12살 때 <청년의 지휘봉>이라는 음악을 작곡했다.
1877년, 20살 때에는 폴리차노에서 바이올린을 배웠고 아마추어 지휘자를 하기도 했으나, 1885년(28세) 아버지가 죽은 이후에는 교회당 오르간 주자를 계승하여 조용하고 생활 속에서 음악을 배우는데 집중하였다.
1.에드워드 엘가와 앨리스의 만남
1886년 가을, 영국 우스터 고등학교의 음악 교실에서 특별한 만남이 있었다. 에드워드 엘가라는 29세의 젊은 바이올린 교사는 새로운 학생, 당시 38살의 만학도인 캐롤라인 앨리스 로버츠를 만났다.
앨리스는 그의 피아노 반주 수업을 듣기 시작했고, 그들 사이에는 빠르게 사랑이 싹트기 시작했다 헨리 로버츠 소장의 딸인 상류층 집안의 캐롤라인 앨리스 로버츠라는 여성은 엘가보다 8살 많은 37살이었다. 그리고 3년 후, 그들은 결혼했다.

캐롤라인 앨리스 (Caroline Alice, Lady Elgar, 1848.10. 9 – 1920. 4. 7)는 영국의 운문 및 산문 소설 작가이다.
앨리스의 아버지는 KCB(가장 명예로운 목욕기사단)의 소장 헨리 로버츠였고, 어머니는 목사의 딸 마리아였다. 이들의 막내 외동딸로 당시 영국령인 인도 구지라트 지방에서 태어났다.
앨리스의 증조부인 로버트 레이크스는 영국 주일학교 운동의 창시자이며, 앨리스의 삼촌은 영국령 인도군 장군이었을 만큼 앨리스의 집안은 당시 잉글랜드의 최고 상류층 집안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녀의 나이 12살 때, 인도에서 발생한 세포이 반란으로 아버지 헨리는 사망하고 만다.
아버지의 사망으로 영국으로 귀국한 앨리스는 소녀 시절 아마추어 지질학자와 함께 공부했고, 친구들과 강둑에서 화석 채집을 하며 지질학을 공부했지만 어디까지나 아마추어 수준에 그쳤다.
음악을 공부하기 위해 벨기에 브뤼셀로 유학을 갔다. 거기서 피아노를 공부했고, 소프라노 친구와 같이 음악의 개념적인 것에 대해서도 공부했다.
그러나 앨리스는 음악보다는 문학에 관심을 두고 책을 쓰는 것이 훨씬 더 흥미로웠다. 그래서 독일어와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스페인어를 공부했다. 그리고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을 정도로 기초실력을 튼튼히 쌓았다.
드디어 1882년, 34살이라는 나이에 C. 앨리스 로버츠라는 이름으로 두 권으로 된 소설 라는 소설을 출간하였다.
나중 엘가를 연구하는 학자인 다이애나 맥베 (Diana McVeagh)는 앨리스의 소설은 유머스럽고, 감동적이며 재미있는 소설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리고 그녀의 소설 속에는 급진주의의 색조를 띠었다고 평가해서 그녀가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사고를 가진 소설가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들의 결혼은 그녀의 가족에게 충격이었다. 상류층의 앨리스의 집안에서는 가난하고 평범한 음악가인 엘가와의 결혼을 반대했다.
앨리스는 화가 난 집안으로부터 유산도 물려받지 못했다. 그러나 엘가의 천부적인 음악가임을 알아본 앨리스는 극렬한 집안의 반대를 물리치고 1889년 5월 8일에 결혼했다.
그들의 결혼식은 간단했다. 그들은 서로에게 약혼 선물을 주었는데, 엘가는 그녀에게 ‘Salut d’Amour’라는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짧은 곡을 선물했고, 앨리스는 그에게 그녀의 시 중 하나인 ‘새벽의 바람’을 주었다.
결혼 후 그들은 런던으로 이주하여 영국 음악 생활의 중심에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나 그들은 1년 넘게 정착할 집이 없었다.
남편에 대한 앨리스의 믿음과 상류층의 본인보다 하류층이라 할 수 있는 가난한 음악가 엘가와의 결혼에 대한 그녀의 용기는 엘가의 경력에 큰 힘이 되었다.

그녀는 심한 남편의 감정 기복을 슬기롭게 잘 다루었고 남편의 작품에 대한 관대한 음악 평론가역할을 했다. 또한 그의 사업 관리자이자 사회 비서였으며 특히 그의 오케스트라 작품에 대한 악보를 설정하고 통제했다.
그들의 딸 캐리스 아이린은 1890년 8월 14일에 태어났다. 그 후에는 런던을 떠나 아내와 아이와 함께 우스터셔로 돌아와 지역 음악 앙상블을 지휘하고 가르치는 것으로 생계를 꾸려야 했다.
앨리스는 엘가가 음악적으로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부단히 노력했지만, 성과는 크지 않았다.
남편이 음악적 활동을 통해 겨우 받은 명예는 그녀와 그녀의 집안과 가족에게 있어 중요했다.
앨리스 엘가는 교향곡의 반응에 대해 열정적으로 글을 써서 엘가의 음악을 알리고 평가받게 하도록 노력했다.
이렇게 앨리스는 엘가의 경력을 쌓기 위해 그녀의 개인적인 열망 중 많은 것을 포기하며 혼신의 힘을 다했다
훗날 앨리스는 그녀의 일기에서 “천재를 돌보는 것만으로도 모든 여성에게 평생의 과업이 될 수 있다”는 말과 함께 엘가의 성공을 위해 평생을 뒷받침 했음을 표현했다.
엘가가 훌륭한 음악가로서, 작곡가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하는 데에는 앨리스의 혼신적인 내조가 있어서 가능했고 오늘날의 엘가가 있게 하는데 있어 엘리스는 일등 공신이었다.
그래도 엘가가족의 생활은 풍요롭지 못했고 여의치 않았다. 결국 그들은 앨리스의 고향인 그레이트 맬번에 정착했다.
엘가는 앨리스의 고향에서 생활의 안정을 얻어 본격적인 음악활동에 전념했다. 급기야 그의 음악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1904년에는 기사 작위를 받았다. 앨리스는 뿌듯했고 기쁨과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 어떤 음악적 성공보다도 남편이 작위를 받았다는 것에 기뻐했으며 상류층인 그녀의 집안에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있게 됐다는 것이 기뻤던 것이다.
그리고 앨리스는 드디어 작위를 받은 남편을 둔 레이디 엘가가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을 때, 잠시 동안이지만 잉글랜드 첼시지방의 병영에서 병사들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나고 1920년 1월이 되자, 앨리스의 친구들은 앨리스가 활력을 잃었고 지난 11월 이후부터는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앨리스의 건강은 급격히 악화되었다. 이후 3월 16일 엘가의 교향곡 2번 공연에 참석했고, 다음날 할리 스트리트의 의사에게 갔지만, 이미 폐암은 손을 댈 수 없는 지경이었다.
엘가가 리즈에서 열린 콘서트에 갔을 때 앨리스는 집에 머물렀다. 이후 앨리스가 마지막으로 참석한 엘가의 음악회는 런던에서 열린 실내악 연주였다.

그렇게 짧은 기간 동안 병을 앓은 후 앨리스는 1920년 4월 7일 72세의 나이로 폐암으로 사망했다.
2.엘가의 사랑 앨리스의 죽음
엘가는 아내를 잃은 슬픔에 빠져 있었다. 대중들은 엘가의 작품을 기대하지 않았다. 끊임없는 뒷받침을 해주던 앨리스의 부존재는 모든 작곡활동 의지를 꺾어버렸다.
엘가는 앨리스를 평생사랑했다. 그리고 그녀를 잃은 슬픔은 컸다. 작곡활동을 포기했으며 여생의 대부분을 취미활동에 탐닉했다.
앨리스가 죽은 후, 런던 중심부의 세인트 제임스에 있는 아파트에서 잠시 살다가 우스터셔로 돌아와 1923년부터 1927년까지 살았다.
그러나 이 시기에 작곡을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바흐와 헨델의 작품을 대규모로 교향곡으로 편곡했고, 1924년 대영제국 전시회를 위해 제국 행진곡과 8곡을 작곡했다.
그리고 나머지 생애를 여러 취미에 탐닉하는 것으로 보냈다.
1933년 10월 8일에 엘가를 수술 중에 의사들은 그가 겪고 있던 사이아틱 통증이 불치의 대장암 때문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에드워드 엘가는 1934년 2월 23일에 사망했다. 향년 76세의 나이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