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니스트 헤밍웨이 (Ernest Hemingway 1899~1961) 에 있어 아드리아나 이반치치의 출현은 헤밍웨이의 글쓰기에 있어서 지금까지의 무미건조한 시기의 종말을 의미했다.
이반치치가 베니스를 배경으로 한 헤밍웨이의 1950년의 소설 「강 건너 나무속으로」( Across the River and into the Trees)에서 등장하는 레나타의 모습에 영감을 주었지만 이 소설은 세간으로부터 높게 평가받지 못한 작품이다.
1. 작품세계의 다양성을 부여한 아드리아나 이반치치
특히 작품의 내용에 등장하는 장군들 중 일부의 묘사내용과 헤밍웨이의 세 번째 부인 마사 겔혼(Martha Gellhorn)에 대한 묘사는 지극히 파괴적이어서 이반치치를 비롯한 세간의 감정에 분노를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헤밍웨이는 자신들의 집을 방문한 이반치치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노력했다. 술에 취해 행패를 부리는 중에도 언제 그랬냐는 듯 여러 번의 저녁 만찬을 준비하여 함께 했으며, 메리와 함께 또는 둘만의 시간을 공개적으로 보내며 낚시를 즐기고, 플로리다로 건너가 사냥도 즐겼다.

그렇지만 술에 취해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행동은 그칠 줄 몰랐다. 한 번은 그가 메리의 얼굴에 포도주를 던졌을 때 이반치치가 메리를 변호하며 감싸주기도 했다.
헤밍웨이의 불치병과 같은 주정과 학대를 이반치치도 메리와 함께 견뎌내야 했지만, 이반치치는 헤밍웨이를 떠나지 않았다.
이반치치는 마치 제자처럼 스승의 천재성을 믿고 그의 곁에 지키고 있었으며, 천재 작가의 작품을 함께 할 수 있음을 즐겼다. 그리고 헤밍웨이의 레나타로서의 정체성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이반치치는 헤밍웨이의 걸작 중 하나인 「노인과 바다」(The Old Man and the Sea)의 집필하는데 있어 깊숙이 간여한 것으로 보인다.
주정뱅이가 다 된 헤밍웨이가 이 소설이야기를 시작할 즈음부터는 집필에 필요한 활력을 불어넣어 주며 많은 것을 함께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초판되는 책의 표지삽화도 그려줬다.
「노인과 바다」는 이반치치가 그의 집 핀카 비지아(Finca Vigia)에 머물러 있는 동안 집필을 시작하여 8주 만에 초고를 완성하였으나 1951년 2월 이탈리아에 여행하는 동안에도 계속되었다. 그리고 1952년 초 드디어 완성본을 내놨다.
헤밍웨이는 이 작품을 “내가 쓸 수 있는 최고의 작품”이라고 말했고 이반치치는 “내가 「노인과 바다」를 쓰도록 헤밍웨이를 이끌었다는 것이 자랑스럽다”라고 말했다.
1953년, 이반치치는 헤밍웨이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자신의 시집 「몬다도리」(Ho guardato il cielo e la terra)를 출간했다.
이탈리아로 돌아간 이반치치와 헤밍웨이는 1954년 5월에 만난 것이 마지막이었으며, 이후부터는 편지를 주고 받으며 연인 아닌 사제지간의 인연을 이어갔다.
그들의 편지는 한동안 계속되었는데, 이반치치가 헤밍웨이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는 1955년 4월 6일이었다.
아드리아나 이반치치는 1961년 헤밍웨이가 사망했을 때 장례식에도 참석했다. 그리고 드미트리 모나스(Dimitri Monas)와 잠시 결혼했다 곧 이혼했다.

1963년에는 독일 사업가 루돌프 렉스(Rudolf von Rex)와 결혼하여 두 아들을 낳았다.
1980년에는 헤밍웨이와 함께한 시간에 대하여 「La Torre Bianca」라는 제목의 회고록을 을 출판했다.
이 책은 헤밍웨이의 유언과 저작권법에 따라 미국에서는 결코 공개될 수 없는 내용이었으며 헤밍웨이가 많이 언급되어 있기는 하지만, 모두 이반치치에 관한 내용이었다.
우울증에 시달리던 이반치치는 1983년 마당에 있는 나무에 목을 매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아드리아나 이반비치와 헤밍웨이가 육체적 접촉 없이 단지 플라토닉한 사랑에 그쳤는지는 내용은 확인되지 않는다.
2. 헤밍웨이의 술에 대한 의존과 이반치치의 역할
이반비치에 대한 헤밍웨이의 플라토닉한 사랑은 쿠바에서 쓰여진 소설 「강 건너 나무 속으로 」 에 영감을 주었다.
이 책은 1950년에 출판되어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이듬해 이 소설에 대한 비평가들의 혹평에 분노한 헤밍웨이는 「노인과 바다」의 초고를 8주 만에 완성하는 기염을 토했다.
노인과 바다는 헤밍웨이를 국제적인 유명인으로 만들었으며, 두 번째 아프리카 여행을 떠나기 한 달 전인 1953년 5월에는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1954년 1월, 아프리카에 있는 동안 헤밍웨이는 두 차례의 비행기 추락 사고로 치명상을 입을 뻔했다.
메리에게 줄 크리스마스 선물로 벨기에령 콩고상공을 관광하는 비행기를 전세내서 머치슨 폭포를 촬영하러 가는 길이었다.
비행기는 전신주에 부딪혔고 밀림의 덤불에 불시착을 했다. 헤밍웨이는 머리에 부상을 입었고, 메리는 갈비뼈 두 대가 부러졌다.
아프리카 사고로 고통은 오래갔다. 그해 10월 노벨문학상의 수상이 결정되었는데 수상식에 방문할 수도 없었다.

비행기 사고로 입은 상처와 지나친 음주로 간이손상되어 1955년 말부터 1956년 초까지 병상에 누워 서 지냈다. 간 손상을 완화하기 위해 술을 끊어야 된다는 의사의 처방을 받았지만 무시했다.
헤밍웨이는 유럽 여행 중에 다시 병이 도졌고 간 질환과 고혈압을 포함한 다양한 질병으로 치료를 계속 받아야 했다.
3. 쿠바를 떠나 미국으로.. 헤밍웨이의 마지막..
쿠바에 있는 헤밍웨이의 집, 핀카 비지아(Finca Vigia)는 헤밍웨이의 유명세로 잦은 손님의 방문과 관광객으로 붐볐다. 건강이 좋지 않은 그는 휴식을 취하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쿠바 혁명으로 카스트로가 정권을 잡자 미국인과 외국인들이 소유한 재산을 국유화한다는 소문이 들렸다.
더 이상 쿠바에서의 생활은 불가능할 것으로 판단하고 쿠바를 떠나기로 결정했다.
1959년 둘은 미국 아이다호주에 있는 케첨 외곽의 빅우드 강이 내려다보이는 집을 구입했다. 그리고 1960년 7월 25일 마지막으로 쿠바를 떠났다. 메리는 헤밍웨이와 함께 뉴욕으로 가서 작은 사무실과 아파트를 사고 일을 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1958년 쿠바에 있는 동안 그녀는 남편과 함께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의 존 스터지스 영화 버전에 카메오로 출연했다. 헤밍웨이는 영화에서 도박꾼을, 메리는 미국인 관광객을 연기했다.
헤밍웨이는 알코올의존증이 심한 데다 외로움을 느껴 메리를 의존했다. 10월에는 뉴욕에 있는 아파트로 들아갔고, 그곳에서 그는 자신이 감시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정신적으로 문제를 보였다. 그리고 메리의 곁을 잠시라도 떨어지기를 거부했다.
헤밍웨이가 심상치 않다는 느낌을 받은 메리는 재빨리 그를 아이다호의 집으로 데리고 갔다. 그곳 현지 의사인 조지 새비어스를 만나 진료를 받았다.
몇 달 후인 4월 21일, 메리는 부엌에서 엽총을 들고 있는 헤밍웨이를 발견했다. 세이비어스 의사는 헤밍웨이에게 진정제를 투여하고 로체스터로 날아 세 번의 전기 충격 치료를 받게 했다.
다행히 회복되어 6월 말에는 집에 돌아와 있었다. 그러나 결국 이틀 후인 7월 2일 이른 아침에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엽총으로 자살했다.
메리와 다른 가족 및 친구들은 처음에 언론에 죽음이 “사고적”이었다고 말했지만 5년 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메리는 헤밍웨이가 자살했다고 인정했다.
헤밍웨이의 말년 행동은 자살하기 전의 아버지와 비슷했다. 그의 아버지는 유전성 혈색소 침착증을 앓았는데, 이 질병은 신체조직에 철분이 과도하게 축적되면서 정신적, 육체적 악화가 절정에 달하게 한다는 질병이다.
1991년에 공개된 의료 기록에 따르면 헤밍웨이는 1961년 초에 혈색소 침착증 진단을 받았다. 그의 여동생 우르술라와 그의 남동생 레스터도 자살했다. 이런 질병이 있는데도 그의 건강은 생애동안 끊임없던 과음으로 인해 더욱 악화 됐었다.

1961년 어니스트가 자살한 후, 메리는 헤밍웨이의 유언 집행인으로 활동했으며 그의 유명작품과 기타 사후 작품의 출판을 담당했다.
1965년에는 헤밍웨이 재단을 설립했고, 1970년대에는 남편의 논문을 존 F. 케네디 도서관에 기증했다. 1976년에 그녀는 자서전 How It Was를 썼다.
말년에 메리는 뉴욕시의 아파트로 이주하여 살았다. 오랜 투병 끝인 1986년 11월 26일, 78세의 나이로 성 루크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메리 웰시는 유언에 따라 그의 남편 헤밍웨이와 함께 묻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