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니스트 헤밍웨이 (Ernest Hemingway 1899~1961)는 미국의 일리노이주에서 태어난 현대문학의 거장이다.
주요 작품으로는 「노인과 바다」,「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무기여 잘 있거라」가 있다.
헤밍웨이는 연합국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계획되고 있을 즈음인 1944년 5월부터 연합국이 본격적인 승전보를 울리고 있을 1945년 3월까지 유럽에 있었다.
헤밍웨이는 결혼한 상태에서 다음 아내를 고르는 못된 습관이 있었다. 1944년 5월 마사 겔혼과 이혼한 뒤 메리 웰시(Mary Welsh)를 쫓아 결혼한 것도 다르지 않았다.
헤밍웨이가 런던에 도착했을 때 그는 타임지 특파원 메리 웰시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메리 웰시는 호주의 언론인이던 노엘 몽크스의 아내였다.
1. 헤밍웨이의 연인이 된 메리웰시
헤밍웨이는 아내이던 워커홀릭 마사 겔혼은 종군기자로서 전쟁취재를 위해 기자증을 발급받을 수 있도록 남편 헤밍웨이에게 힘써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헤밍웨이는 마사의 간곡한 협조요청에도 불구하고 밖으로만 돌아 미운털이 박힌 아내의 요청을 묵살했다.
그럼에도 어렵사리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런던에 도착한 마사는 헤밍웨이에게 몹시 화가 났다. 때마침 헤밍웨이는 교통사고로 부상을 입고 병상에 누워 있었다.
마사는 되뇌었다. “우린 끝났어! 완전히”
그러나 헤밍웨이에게는 마사 겔혼의 되뇜에도 교통사고로 인한 통증만 있을 뿐 태연했다. 자기를 사랑해 주는 다른 여인, 메리 웰시가 있었기 때문이다.
마사 겔혼이 도착하기 전 이미 세계적인 유명 인사가 되버린 헤밍웨이는 프랑스 침공 계획을 취재하기 위해하였고 마사 겔혼은 고집을 피우고 유럽으로 온다고 한다.
마사와 같은 독립심 강하고 워커홀릭 여성을 참을 수 없었던 헤밍웨이지만 자신의 글을 존경하면서 또 다른 모험심 넘치는 기자 메리 웰시의 매력에 단번에 반한다.
메리 웨일스 웰시( Mary Wales Welsh, 1908 ~ 1986 )는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네 번째 아내이자 미망
인이 된 미국의 언론인이자 작가이다.

미네소타 주 워커에서 벌목공의 딸 태어난 메리는 그녀의 나이 30살 때인 1938년, 오하이오 출신의 연극 학생인 로렌스 밀러 쿡과 결혼했다. 그러나 그들의 결혼생활은 짧았고 곧바로 별거에 이어 이혼을 한다.
메리는 시카고로 이주하여 시카고 데일리 뉴스(Chicago Daily News)에서 언론일을 하기 시작했고, 곧이어 유럽으로 이주하여 새로운 언론사인 런던 데일리 익스프레스(London Daily Express)에서 일을 시작했다.
마침 런던에서 휴가를 보내는 동안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여 파리로 발령을 받았다. 이듬해 1940년 프랑스가 독일에게 패망하자 메리는 영국의 전쟁상황을 취재하기 위해 다시 런던으로 돌아왔다.
이때 윈스턴 처칠의 기자회견에 런던 데일리의 기자로 참석하여 취재했다. 이런 전쟁 중에도 두 번째 남편이 된 호주 언론인 노엘 몽크스와 결혼했다.
1944년, 메리는 런던에서 전쟁을 취재하던 중 미국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를 만났고, 그들은 친밀해졌다. 둘 다 유부남, 유부녀의 신분임에도 사랑에 빠졌다. 때마침 헤밍웨이와 그의 아내 마사 겔혼과의 갈등으로 부부 아닌 부부인 상태였다.
메리는 그의 남편 몽크스에게 이별을 통보했고 1945년 이혼했다. 때마침 헤밍웨이도 마사 겔혼과 이혼했다.
2. 헤밍웨이의 또 다른 사랑, 아드리아나 이반치치의 등장
전쟁이 끝나자 1946년 3월 쿠바로 돌아와 어니스트 헤밍웨이와 메리 웰시는 결혼했다. 헤밍웨이의 나이 47살, 메리는 38살이었다.
헤밍웨이 가족은 전쟁 후 몇 년 동안 일련의 사고와 건강문제를 겪었다. 결혼하기 전인 1945년 헤밍웨이가 런던에서 자동차 사고로 무릎과 이마에 상처를 입은 적이 있어 여전히 후유증이 있는 데다가 메리는 결혼 5개월 후에 자궁외 임신으로 낙태수술을 했다.
또 연이은 스키 사고로 메리의 오른쪽 발목이 부러졌고, 그다음에는 왼쪽 발목이 부러졌다. 1947년 교통사고로 헤밍웨이의 아들 패트릭(폴린 파이퍼사이에 낳은 아들)은 머리에 부상을 입고 중병을 앓았다.
이런 집안의 우환에도 메리와 헤밍웨이의 기질은 서로 잘 맞았다. 헤밍웨이의 이전 아내들은 헤밍웨이가 가진 마초적 성격을 대항하여 불만을 품고 독립을 꿈 꾸었지만 메리 웰시는 헤밍웨이를 적절히 구슬리며 다룰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이러한 메리 웰시의 헤밍웨이에 대한 지나친 포용력의 부작용인가. 헤밍웨이는 술독에 빠져 헤매었고 점차 폭력적으로 변한 데다가 다른 여자에게 눈길을 준다.
결혼한 지 겨우 2년째인 1948년, 헤밍웨이와 메리는 유럽으로 건너가 몇 달 동안 베네치아에 머물렀다. 그런데 그곳에서 헤밍웨이는 당시 18세였던 아드리아나 이반치치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헤밍웨이가 50세의 나이였다.
메리 웰시와 갓 결혼했음에도 불구하고 헤밍웨이는 어린 이반치치에게 사랑에 빠졌고 베네치아와 쿠바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다. 아내 메리가 있을 때도 있었지만 단 둘이 일 때도 많았다. 헤밍웨이는 아내의 코 앞에서 아드리아나와 로맨스를 벌였다.
3. 이탈리아에서 만난 아름다운 시인지망생 이반치치
아드리아나 이반치치 (Adriana Ivancich, 1930 ~ 1983)은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서 태어난 이탈리아의 귀족출신 여성이며 나중에는 이탈리아의 시인이 되었다..
아드리아나는 1948년 12월, 오빠 지안프랑코를 통해 때마침 북부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오리 사냥 여행을 하던 헤밍웨이를 만났다.
어둡고 추운 이탈리아의 아침 4시가 지나서, 아드리아나는 오빠 친구들과 함께 오리 사냥에 나섰다. 행사가 끝나고 추운 사냥꾼들이 난롯가에 앉아 담소를 나눴다.
모임에 참석한 유일한 여성인 아드리아나가 그녀의 긴 검은 머리카락을 빗기 위하여 빗을 찾았다. 일행의 거의 모든 남자들은 그녀를 무시하고 계속 이야기를 나누는데 열중했다.
그러나 어니스트는 여자를 방치해 두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주머니를 뒤적거리다가 빗을 꺼내 반으로 나누어 그녀에게 건넸다. 그것은 헤밍웨이다운 유머러스한 기사도와 연극적인 몸짓이었다.
아드리아나는 유머러스하고 유명한 작가인 헤밍웨이를 보고 존경심이 우러나왔다. 그러나 바람기가 왕성한 헤밍웨이의 속 마음은 달랐다.
그 후 몇 달 동안 아내 메리와 함께 있었지만 이반치치와 함께 코르티나(Cortina)를 여행하고, 호텔 그리티(Hotel Gritti)와 같은 야간명소로 데리고 다니며 데이트를 즐겼다.
한편으로 타자기와 롤리플릭스(Roliflex) 카메라를 선물해 주면서 시인이 되고자 하는 이반치치의 야망을 격려했다.

헤밍웨이는 이반치치를 만나는 순간부터 그녀와 친근하게 지낼 때까지 욕심을 부렸지만 어디까지나 그의 욕심이었다. 수년 동안 플라토닉한 희롱을 계속했다.
이반치치는 쿠바에 있는 그의 집에까지 방문하여 헤밍웨이와 함께 지냈다. 물론 헤밍웨이의 아내 메리 웰시와 함께였다.
머릿속에 딴생각이 있는 헤밍웨이를 메리가 어떻게 용납했는지는 오직 하느님만이 알 정도로 메리는 안내심의 끝판왕이었다.
잦은 음주로 건강이 악화됨에 따라 헤밍웨이는 메리의 끊임없는 지원이 필요했고, 재정적으로 문제가 생겼지만 당시의 헤밍웨이는 이미 또 다른 이혼을 감당할 수 있는 처지가 못되었다.
헤밍웨이는 자주 술에 취해 있었고, 무례하고, 나쁜 성질을 부렸다. 메리에게 끔찍할 정도로 언어적으로 욕설을 퍼부으며 학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리는 남편이 공개적으로 짝사랑하며 결국 플라토닉한 사랑으로 남을 아드리아나 이반치치를 쿠바에 있는 그들의 집 핀카 비지아(Finca Vigia)로 까지 맞이했다.
메리오 헤밍웨이의 집 핀카 비지아 까지 찾아온 아드리아노 이반비치! 인내력의 끝판왕으로 참고 있는 메리. 아내의 코앞에서 노골적으로 어린 시인지망생을 로맨스를 펼치려는 헤밍웨이.
이들의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살펴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