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 1899~1961)는 미국의 일리노이주에서 태어난 미국을 대표하는 현대문학의 거장이다.
1933년, 헤밍웨이와 폴린은 케냐로 사파리를 떠났다. 10주간의 여행은 아프리카의 푸른 언덕은 단편 소설 “킬리만자로의 눈”의 소재를 제공했다.
어니스트와 그의 아내 폴린 파이퍼는 아프리카에서의 사파리여행은 행복했지만 집에서는 애정관계에 긴장감이 팽팽해지고 갈등이 커졌다.
둘 간의 갈등은 종교적인 것이 많이 차지했다. 특히 1936년에 벌어진 스페인 내전에 있어 독실한 카톨릭교도인 폴린은 프랑코의 국민당을, 천주교도인 헤밍웨이는 공화파를 지지하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서로의 정치적 성향을 굽히지 않았다.
1. 헤밍웨이의 연인이 된 마사 겔혼
1936년 헤밍웨이는 플로리다의 키 웨스트의 한 술집에서 우연히 저널리스트인 마사 겔혼을 만난다.
마사 겔혼은 크리스마스를 맞아 플로리다의 키웨스트로 가족 여행을 온 것이다.
마사 엘리스 겔혼 (Martha Ellis Gellhorn, 1908 ~ 1998)은 20세기의 위대한 종군기자 중의 한 명으로 꼽히는 미국의 소설가이자 여행 작가, 저널리스트이다.
겔혼은 세인트루이스에서 여성 운동가인 에드나 피셸 겔혼과 독일 태생의 산부인과 의사인 조지 겔혼의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와 외할아버지는 유태인이었고, 그녀의 오빠 월터는 나중에 컬럼비아 대학교의 저명한 법학 교수가 되었고, 남동생 알프레드는 종양학자이자 펜실베니아 대학교 의과대학 학장이 되었다.
1926년, 겔혼은 필라델피아의 브린모어대학에 입학했지만 이듬해, 기자로서의 경력을 쌓기 위해 졸업도 하지 않고 학교를 그만두었다.

1930년, 외국 특파원이 되기로 결심하고 프랑스로 건너가 2년 동안 파리의 연합 통신국에서 일했으나 통신사와 관련된 한 남성의 성희롱을 신고한 후 해고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프랑스 경제학자 베르트랑 드 주브넬(Bertrand de Jouvenel, 1903~1987)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베르트랑은 유부남이었다.
둘의 불륜행각은 1930년, 그녀가 22살이었을 때 시작되어 1934년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베르트랑의 아내가 이혼해주지 않았다.
베르트랑과 관계를 유지하며 수년간 유럽을 여행했다. 그 여행에서 취재한 내용을 파리와 세인트루이스의 신문사에 글을 기고하고 보그지(Vogue)는 패션을 담당하는 기사를 썼다. 그리고 평화주의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이같은 참여경험에 대해 자신의 글을 썼다.
1932년 미국으로 돌아온 겔혼은 루즈벨트 대통령의 영부인 엘리너와의 우정을 통해 만난 정치인, 해리 홉킨스에게 고용되어 홉킨스를 도와 글을 썼다. 홉킨스는 루즈벨트 대통령 고문까지 역임했다.
이 같은 친분으로 루즈벨트 부부는 겔혼을 백악관에 초대했고, 겔혼은 그곳에서 저녁 시간을 보내며 엘리너 루즈벨트가 서신을 쓰는 것을 도왔다.
1934년 겔혼은 미국과 파리를 오가며 그녀가 사랑했던 베르트랑과 만났으나, 베르트랑의 아내의 반대로 지지부진하던 관계는 결국 헤어짐으로 정리했다. 베르트랑 아내의 반대가 없었다면 결혼했을 것이라는 나중의 회고다.
2. 헤밍웨이와 마사 겔혼의 만남과 결혼
1936년 플로리다 주 키웨스트로 크리스마스 가족 여행을 갔을 때 술집(Sloppy Joe’s Bar)에서 어니스트 헤밍웨이를 만났다. 28세의 겔혼은 대학 시절부터 헤밍웨이를 동경해 왔다.
겔혼은 위클리 메거진인 콜리어스 (Collier’s)의 스페인 내전 취재기자로 고용되어 있는 상태였다.
헤밍웨이는 작품의 영감을 얻기 위하여 스펜인 내전을 취재하고자 했다. 아내 폴린은 아무리 사이가 안 좋아도 남편의 생명에 문제가 있는 전장에 남편이 가는 것을 반대했다.

그러나 이듬해 마사와 헤밍웨이는 스페인 내전을 취재하기 위해 스페인으로 떠났고 수년간 지속된 애정어린 관계를 시작했다. 마사는 취재내용을 콜리어스지(Collier’s)에 글을 보냈고 헤밍웨이는 북미신문연합지(North American Newspaper Alliance)에 글을 보도했다.
헤밍웨이는 마사와 함께 스페인 마드리드에 있는 동안 마드리드시가 프랑코 군대에 의해 포격을 당하는 중에도 그의 유일한 희곡(The Fifth Column)을 쓰는 창작열을 보였다. 그리고 둘은 바르셀로나에서 1937년 크리스마스를 기념했다. 이때까지는 폴린이 겔혼과의 사이를 의심하지 않은 것 같다.
몇 달 후 헤밍웨이는 무사히 키웨스트로 돌아왔고, 이듬해에 스페인의 마지막 전투를 취재하기 위해 또한번 스페인으로 가서 전장을 취재했다. 헤밍웨이는 스페인내전을 무사히 취재를 마친 영국과 미국 언론인 중 한 명이 되었다.
이 스페인내전의 취재경험은 “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1940)”의 소재가 되었고 이 작품은 그를 대표하는 작품이 되었다.
1938년 여름, 폴린과의 사이가 소원해질 데로 소원해진 헤밍웨이는 폴린과 자녀들이 있는 와이오밍을 방문하여 재회한 후 폴린과 별거를 결정했다. 폴린은 이미 남편이 마사 겔혼과 사랑에 빠진 것을 알았으며 본인과는 돌이킬 수 있는 관계가 아니란 걸 알았다.
그리고 폴린과 그의 두 아이들은 헤밍웨이 곁을 떠났다. 이때부터 헤밍웨이와 폴린이 마사 겔혼 때문에 시작된 고통스러운 이별의 과정이 시작됐다.
1939년 초, 헤밍웨이는 쿠바로 건너가 아바나에 있는 호텔에서 살았다. 마사는 곧바로 쿠바로 떠나 헤밍웨이와 합류했다. 그리고 하바나에서 24km 떨어진 곳의 집을 임대하여 함께 살기 시작했다.

이 같은 사실을 알면서도 폴린은 그녀가 가진 가톨릭 신앙 때문에 헤밍웨이와 이혼을 할 수는 없어 버텼다. 그러나 결국 헤밍웨이가 겔혼과 결혼하기 3주 전인 1940년에 이혼하는 것을 허락했다.
그리고 1940년 11월 4일 폴린과 이혼이 확정됐다. 3주 후에 헤밍웨이와 겔혼은 결혼하고 겔혼은 헤밍웨이의 세 번째 아내가 된다.
3. 헤밍웨이와 마사의 갈등과 헤어짐
첫 만남은 1936년부터 시작되었고 1940년 결혼은 했지만 이들의 관계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들의 결혼생활은 평탄치 않았다. 문제는 마사 겔혼은 타고난 워커 홀릭이었다. 그리고 남성편력도 있었다. 마사는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종군기자답게 일에 빠져 지냈다.
게다가 유럽은 격동의 시기였다. 히틀러가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된 제2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는 겔혼을 일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했다.
겔혼이 일에 빠져 전장의 취재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그들의 집에는 헤밍웨이 홀로 남아 조용히 집필활동을 하고자 했지만, 헤밍웨이는 겔혼이 오랫동안 자리를 비운 것에 대해 점점 더 갈등하게 된다.
헤밍웨이는 1943년 이탈리아 전선을 취재하기 위해 집을 떠날 때 겔혼에게 불만 어린 편지를 쓰기도 하면서 옛 아내들처럼 해주길 바랐다. 그러나 겔혼의 워커홀릭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 같은 헤밍웨이의 바람을 아랑곳하지 않고 겔혼은 전쟁상황을 보도하기 위해 영국 정부에 언론 인으로서 취재인가를 신청했다. 그러나 여성기자들에게 전장의 위험성은 영국 정부가 인가를 내주지 않기에 충분했다.
헤밍웨이는 겔혼이 마련해준 영국 공군비행기를 이용해 11일 전에 도착해 있었지만 겔혼이 영국에 오는 것을 막으려 했다.
헤밍웨이는 비행기에서 마사가 기자증을 받는 것을 영국정부에 요청하여 도와줄 수 있었으나 도와주지 않았다. 그러나 겔혼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전쟁으로 피폐해진 런던을 향해 대서양을 위험스럽게 건너야 했고 런던에 도착했을 때 헤밍웨이는 교통사고로 뇌진탕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본인의 취재열정에 도움을 주지 않은 헤밍웨이에게 겔혼은 적개심을 드러냈다. 그리고 헤밍웨이의 곤경에 동정심이 없이 헤밍웨이를 비난하고 “우리 둘은 끝났어, 완전히 끝났어”라고 말했다. 이후로 헤밍웨이와 겔혼은 다시는 만날 수 없었다.
결국 겔혼은 영국정부의 허가가 나지 않자 종군기자로서가 아닌 간호사 행세를 하며 폭발물을 가득 실은 병원선에 탑승할 수 있었다.
그러나 탑승 즉시 발각되어 화장실에 갇혔지만 이틀 후 노르망디해안에 상륙했고, 상륙하자마자 부상자를 돌보는 간호사의 역할을 하면서 현장을 취재하는 열정을 보였다.
겔혼은 1944년 6월 6일에 이루어진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노르망디 해안에 상륙한 유일한 여성이었다. 그리고 훗날 “나는 내가 갈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전쟁을 따라 다녔다”라고 회상했다.

그리고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함께 1945년 4월 29일 나치가 만든 독일 다하우지방의 강제수용소가 미군에 의해 해방된 후 다하우 강제수용소를 취재한 최초의 언론인 중 한 명이었다.
겔혼은 이 같은 워커홀릭의 열정과 함께 자존심도 셌다. 자신이 헤밍웨이의 세 번째 부인으로 불리는 것에 불만을 가졌으며 그녀만의 세계를 갖고자 했다. 무엇보다 누구의 주변인물이 되는 것을 자존심 상해했다.
헤밍웨이도 겔혼의 이 같은 적극적인 활동으로 인한 부부생활에 불만을 가졌지만 겔혼 또한 남편, 헤밍웨이의 간섭에 불편해 하며 갈등을 빚었다. 그리고 겔혼은 불륜의 애정 행각도 있었다.
상대는 미국 제82공수사단 사령관이던 제임스 M. 개빈(1907~1990) 소장이었는데 개빈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 육군의 최연소 사단장이었다.
헤밍웨이는 이전의 결혼했던 여인들처럼 마사 겔혼도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며 오래 지속되는 정착하는 생활을 하고 싶었지만 마사는 태생적으로 헤밍웨이의 이와 같은 바람에 부응할 수 없었다.
결혼한 가정생활이 헤밍웨이에게는 낭만적 사랑의 바람직한 결정으로 보였을지 모르지만, 마사에게 가정생활은 지루하고 안절부절못하는 일상이었다. 이런 일상은 겔혼에겐 지극히 비관적이고 괴롭힘을 당하는 것이라 여겼다.
결국, 헤밍웨이와 마사 겔혼은 4년간의 결혼 생활 끝에 1945년에 이혼했다. 이후 그들은 서로 보지 못했다.
4. 20세기의 위대한 종군기자, 마사 겔혼
1945년 헤밍웨이와 이혼한 후 미국 사업가 로런스 록펠러와 연인 관계를 맺었다. 1947년에는 저널리스트 윌리엄 월튼, 그리고 1950년에는 의사 데이비드 구레비치와 연인관계를 맺었다.
1954년에는 타임지의 전 편집장인 T. S. 매튜스와 결혼했다. 그리고 매튜스와는 1963년에 이혼했다.
말년에 겔혼은 건강이 허약하여 거의 실명할 지경에 이르렀으며 간으로 전이된 난소암을 앓고 있었다. 1998년 2월 15일, 그녀는 런던에서 청산가리 캡슐을 삼켜 자살했다. 겔혼의 나이90세 였다.
이듬해인 1999년, 20세기 가장 위대한 종군기자로 마사 겔혼을 기리기 위해 그녀의 이름을 딴 마사겔혼 저널리즘상(Martha Gellhorn Prize for Journalism)이 제정되었다
그리고 2019년 파란색 잉글리시 헤리티지 명판이 공개되었는데, 이 명판에는 “종군기자”의 헌정사가 최초로 새겨져 있다.
헤밍웨이와 마사 겔혼과의 만남과 이혼은 외향적인 마사의 워커홀릭일 테지만 헤밍웨이의 여성 편력이 근본적인 원인일 가능성이 높다.

폴린 파이퍼와의 이혼과 마찬가지로 마사와의 갈등도 갈등이지만 헤밍웨이에게는 또 다른 여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헤밍웨이는 1944년 5월부터 1945년 3월까지 유럽에 있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비밀리에 진행하고 있을 즈음, 헤밍웨이가 런던에 도착했을 때 타임지 특파원 메리 웰시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헤밍웨이의 첫 번째 아내 해들리와 헤어지게 된 원인을 제공했던 콜린 파이퍼는 마사 겔혼에 의해 또 같은 일을 겪게 된다. 그리고 아내와 헤어지기 전에 다른 여인을 만드는 헤밍웨이의 패턴은 계속된다.
헤밍웨이와 타임지 특파원 메리 웰시와의 러브스토리를 다음 편에서 살펴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