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 1899~1961)는 미국의 일리노이주에서 태어난 현대문학의 거장이다.
헤밍웨이는 1923년 아내 해들리와 함께 스페인 팜플로나에서 열린 축제에 처음 방문했는데 그곳에서 공연된 투우에 매료되었다.
이 팜플로나 여행은 헤밍웨이의 첫 번째 소설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를 쓰게 되는 전기가 되어 소설가로 입문하게 되지만, 이 여행은 헤밍웨이에게는 새로운 여인을 만나게 되고 아내인 해들리에게는 이혼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1. 헤밍웨이와 폴린 파이퍼와의 만남
두 번째 해에는 팜플로나 대신 크리스마스에 슈룬스에 갔지만 그 해에는 폴린 파이퍼 자매가 합류했다. 헤밍웨이는 파이퍼 자매와 함께 파리로 돌아갔고, 해들리는 아들 존과 함께 오스트리아에 남았다.
해들리가 오스트리아에 있는 동안 헤밍웨이는 뉴욕으로 갔다가 3월에 파리로 돌아왔는데, 이때부터 폴린과의 애정 행각이 시작되었다.
폴린 파이퍼(Pauline Pfeiffer, 1895~1951)는 미국의 언론인이다. 파이퍼는 아이오와 주 파커즈버그에서 부동산 중개인인 폴과 메리 사이의 부유한 카톨릭 집안에서 태어났다.

1901년 세인트루이스로 이주하여 학교를 다녔다. 그녀의 가족들은 나중에 아칸소 주로 이사했지만, 폴린은 미주리 주에 남아 미주리 대학교 저널리즘 스쿨에서 공부하고 1918년에 졸업했다.
학교를 졸업한 후 클리블랜드와 뉴욕의 신문사에서 일했다. 그리고 나중에는 잡지사, 베니티 페어(Vanity Fair)와 보그(Vogue)지에서 일했다.
1926년에 폴린은 보그지에서 일하기 위하여 여동생 버지니아와 함께 파리로 이주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헤밍웨이와 그의 아내 해들리 리처드슨을 만나게 된다. 글을 쓰는 같은 일을 하는 네 사람은 친구가 되었다.
2. 헤밍웨이의 두 번째 아내 폴린 파이퍼
폴린과 버지니아는 헤밍웨이의 아파트를 자주 방문하여 친해졌다. 심지어 헤밍웨이 부부의 여행에 동행까지 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러한 친숙한 관계는 헤밍웨이의 아내인 해들리에게는 불행으로 다가왔다.
폴린은 처음에 해들리와 친구사이로 헤밍웨이를 만났지만 곧 헤밍웨이와 점점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폴린의 스타일리시한 외모와 헤밍웨이에 대한 배려 깊은 행동으로 헤밍웨이는 폴린에 푹 빠져 버렸다.
그리고 이와 같은 아낌없는 폴린의 헤밍웨이에 대한 배려깊은 행동은 헤밍웨이뿐 아니라 폴린에게도 “믿을 수 없는 행복”을 선사했다.
헤밍웨이는 아내 해들리를 사랑하면서도 폴린과도 사랑에 빠졌다고 회고했다.
1926년 봄,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첫 번째 부인인 해들리 리처드슨은 헤밍웨이와 폴린의 불륜을 알게 되었지만, 7월에는 폴린과 해들리, 헤밍웨이는 스페인 팜플로나로 연례 여행을 떠났다.
해들리는 남편과 폴린의 불륜을 알고 있었지만 여행하는 동안 꾹꾹 참고 견뎌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해들리는 폴린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파악하고 헤밍웨이와 폴린에게 100일 동안 연락 없이 떨어져 지내도록 요청했다.
만약, 100일이 지난 후에도 그들이 여전히 함께 있고 싶다면 이혼을 허락해 그들이 결혼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1926년 11월, 해들리는 미래의 남편 폴 모어(Paul Mowrer)를 만난 후 마음이 바뀌었다.
두 사람에게 요청한 100일간의 별거를 취소하고 헤밍웨이에게 이혼을 허락한다며 폴린 파이퍼와의 결혼을 더 이상 방해하지 않겠다는 편지를 보냈다. 이듬해인 1927년 1월 둘은 이혼했다.
폴린의 가족은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에 결혼 전에 헤밍웨이는 천주교로 개종했다. 나중 일이지만 폴린의 독실한 로마 가톨릭 신앙은 스페인 내전 당시 국민당을 지지하게 만들었고, 헤밍웨이는 공화당을 지지하면서 두 사람의 갈등의 원인이 된다.
해들리의 100일 제안에도 불구하고 폴린은 헤밍웨이를 사랑했지만 독실한 카톨릭신자인 어머니의 반대에 부딪혀 고민하고 있었다.
헤밍웨이는 당황해서 폴린을 설득해야 했다.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고 있는데 관계를 끝내는 것은 낙태하는 것과 같다”, “나의 내면이 모두 지옥에 떨어진 느낌”이라고 말하며 폴린을 설득했고, 결국 폴린이 동의했다.

헤밍웨이와 폴린은 그해 5월 결혼했고, 그들은 신혼여행으로 프랑스남부 지중해 해양도시 르 그라우-뒤-루아로 갔다. 그러나 그곳에서 그는 탄저병에 걸리면서 고생을 한다.
그해 말에 임신 중이던 폴린은 미국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1928년 3월, 폴린의 작가 친구인 파소스의 추천에 의해 플로리다의 외딴섬 키웨스트로 이사를 한다.
3. 정치성향 차이로 인한 부부 갈등
헤밍웨이는 폴린과 함께 미주리주 캔자스시티로 여행을 했는데, 그곳에서 1928년 6월 28일 아들 패트릭이 태어났다. 12월에 키웨스트로 돌아온 뒤, 1월에 프랑스로 떠나기 전에 《무기여 잘 있거라》의 초고를 썼고 8월에 완성했다.

1930년대 초, 헤밍웨이는 겨울에는 따뜻한 키웨스트에서 보내고, 여름에는 시원한 와이오밍주에서 사냥을 즐기며 살았다.
1930년 11월에는 자동차 사고로 팔이 부러졌다. 헤밍웨이는 7주 동안 병원에 입원했고, 헌신적인 폴린은 헤밍웨이를 돌보았다. 글을 쓰는 손의 신경이 아무는 데는 1년이나 걸렸고, 그 기간 동안 극심한 통증에 시달리기도 했다
1933년, 헤밍웨이와 폴린은 케냐로 사파리를 떠났다. 10주간의 여행은 아프리카의 푸른 언덕과 단편 소설 “킬리만자로의 눈”과 “프랜시스 매콤버의 짧고 행복한 삶”의 소재를 제공했다.

어니스트와 폴린은 아프리카에서 행복했지만 집에서는 애정관계에 긴장과 불만이 커졌다. 둘 간의 갈등은 종교적인 것이 많았다. 특히 스페인 내전(1936-1939)에 있어 카톨릭인 폴린은 국민당을, 천주교인 헤밍웨이는 공화다파를 지지하였기 때문이다.
1937년, 점점 갈등의 골이 깊어지자 헤밍웨이는 폴린을 떠나 1년 전 키웨스트의 한 술집에서 만났던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인 마사 겔혼(Martha Gellhorn)과 동행하여 스페인 내전을 취재하기 위하여 스페인으로 떠났다.

1937년 말 마사와 함께 마드리드에 있는 동안 헤밍웨이는 도시가 프랑코 군대에 의해 포격을 당하는 중에도 그의 유일한 희곡(The Fifth Column)을 썼다.
몇 달 후 헤밍웨이는 무사히 키웨스트로 돌아왔고, 이듬해에 스페인의 마지막 전투를 취재하기 위하여 스페인으로 갔다. 헤밍웨이는 전장을 떠나 강을 건넌 영국과 미국 언론인 중 한 명이 되었다.
이 스페인 전장의 취재경험은 그의 필생의 역작 “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1940)”의 영감과 소재가 되어 그를 미국을 대표하는 거장의 반열에 오르게 한다.
그해 여름 헤밍웨이가 와이오밍을 방문하여 폴린과 아이들을 재회하였지만, 폴린과 그의 두 아이들은 헤밍웨이를 떠났다.
이미 남편은 마사 겔혼과 사랑에 빠졌으며 본인과는 돌이킬 수 없는 관계임을 알고는 있었지만 가톨릭 신앙 때문에 이혼을 해줄 수는 없었다.
폴린은 가톨릭 신앙 때문에 이혼을 거부하고 버텼지만, 결국 헤밍웨이와 겔혼이 결혼하기 3주 전인 1940년에 어쩔 수 없이 이혼을 허락하게 된다.
그리고 1940년 11월 4일 폴린과 이혼은 확정되었다. 헤밍웨이는 3주 후에 겔혼과 결혼한다.
4.헤밍웨이와 폴린 파이퍼의 이혼
폴린 파이퍼는 1951년 10월 1일 56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캘리포니아를 자주 방문하기도 했지만 플로리다의 키웨스트에 살았다.
그녀의 죽음은 성 정체성 문제를 겪고 있는 아들 그레고리의 문제 때문이었다.
그레고리는 남성으로 태어났으나 동성애적인 성정체성을 갖고 있었으며 영화관 여자 화장실에 들어갔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폴린은 아들을 구하러 경찰서에 갔고, 그 후 헤밍웨이와 전화통화를 하며 아들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서로를 비난하며 심하게 다투었다.
그날 밤 폴린은 쇼크로 급히 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진단되지 않은 희귀한 부신 종양이 발견되었고, 수술을 했지만 결국 수술대에서 사망하고 만다.
몇 년 후, 의사가 된 그레고리는 어머니의 부검보고서에서 어머니가 종양으로 사망했다고 판정했으나 결론적으로는아버지와의 전화 통화로 인해 종양이 과도한 아드레날린을 분비했다가 멈추는 바람에 혈압이 변해 어머니가 급성 쇼크에 빠져 사망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레고리는 60대에 여성으로 성전환 수술을 받았으며 글로리아라는 여성 이름으로 개명하고 살았다.
헤밍웨이와 폴린 파이퍼는 이렇게 헤어졌다. 헤밍웨이는 첫 번 째 아내 해들리의 친구인 폴린과 불륜을 저지르고 폴린과 결혼을 했다.
그러나 언론일을 하던 마사 겔혼을 만나서 불륜을 저지르고 그의 아내 폴린 파이퍼와 헤어지게 된다. 폴린도 헤밍웨이의 전처인 해들리와 똑 같은 전철을 밟게 된 것이다.
헤밍웨이와 폴린과의 이혼은 종교에서 오는 정치성향도 원인이라 하겠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헤밍웨이의 여성 편력이 원인일 것이다.
헤밍웨이의 첫 번째 아내 해들리와 헤어지게 된 원인을 제공했던 콜린 파이퍼, 마사 겔혼에 의해 또 같은 일을 겪게 된다. 마사 겔혼은 헤밍웨이와 어떤 러브스토리를 남기고 헤어지게 될까. 다음 편에서 살펴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