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연인(2), 해들리 리처드슨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 1899~1961)는 미국의 일리노이주에서 태어난 현대문학의 거장이다. 많은 여성들과의 결혼생활로 인해 여러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대표작으로 소설『무기여 잘 있거라』(A Farewell to Arms)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으며, 이후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For Whom the Bell Tolls), 『노인과 바다』(The Old Man and the Sea) 등, 다양한 작품을 발표하여 미국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헤밍웨이는 20세가 되기도 전에, 약혼까지 했던 연인, 아그네스의 배신으로 사랑의 아픔을 겪게 되었고, 그 여인은 소설 ‘무기여 잘 있거라(A Farewell to Arms. 1929)’에 등장하는 여주인공의 영감이 되었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전쟁을 통해 한층 성숙한 생활을 하게 되었지만, 아직 어린 나이였고 부상으로 인한 요양이 필요했다.

1. 헤밍웨이의 첫 번째 아내가 된 연상의 여인, 해들리 리처드슨

가족들과 빈둥빈둥 집에 쉬면서 요양을 하고 있던 9월에 이를 즈음, 고등학교 친구가 그에게 토론토에서 글을 쓰는 일자리를 제안했고, 그는 할 일이 없던 차에 흔쾌히 수락했다.
글 쓰는 재주가 있었던 그였기에 일은 어렵지 않았고 재주를 발휘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해 말, 토론토 스타 위클리(Toronto Star Weekly)라는 잡지의 프리랜서 겸 전속 작가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듬해 6월 미시건으로 돌아왔고, 9월에는 시카고로 이주하여 친구들과 함께 살면서 토론토 스타위클리에 기사를 썼다. 한편으로는 월간지 《커먼웰스 협동조합》의 부편집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이때 헤밍웨이와 함께 살던 친구의 여동생을 만나기 위해 해들리 리처드슨이라는 아름다운 아가씨를 만나게 된다. 헤밍웨이는 해들리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되었다. 해들리는 29살로, 헤밍웨이보다 8살이 많았다.

해들리 리처드슨 이미지 사진

해들리 리처드슨(Hadley Richardson, 1891~1979 )는 세인트루이스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플로렌스 와이먼 리처드슨은 뛰어난 음악가이자 가수였고, 아버지 제임스 리처드슨은 가족 소유의 제약 회사에서 일했다.

해들리의 아버지는 1903년 재정적 어려움을 겪게되자 자살을 한다. 그녀는 어린시절 수줍음이 많고 은둔적인 성격을 가진 소녀였다. 그녀의 어머니가 브라이트병에 걸렸을 때, 해들리는 어머니가 죽을 때까지 간호했다.

사랑하던 어머니를 잃은 해들리는, 1920년 12월, 시카고에 있는 옛 룸메이트이며 친구였던 케이트 스미스를 방문했다. 그런데 그곳에서 케이트의 오빠와 함께 살고 있던 헤밍웨이를 처음 만나게 된 것이다.

해들리의 매력에 반한 헤밍웨이는 “첫눈에 해들리가 결혼할 여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며 해들리와의 만남은 운명적임을 그녀에게 어필했다. 모성본능을 갖고 있는 해들리 또한 헤밍웨이가 싫지 않았다.
헤밍웨이와의 나이차이에도 불구하고 과잉보호하는 어머니 치마폭밑에서 자란 해들리는 또래 여성치고는 어려보였다.

헤밍웨이의 전기작가 버니스 커트는 해들리가 아그네스를 연상시킨다고 하지만 해들리는 아그네스가 갖지 않은 애교와 유치함을 가지고 있었다.

해들리가 세인트루이스로 돌아간 1920년 겨울, 해들리는 다시 음악을 시작했고, 헤밍웨이와 겨울 동안 편지를 주고 받았다. 그녀가 나이 차이에 대해 우려감을 표하자 헤밍웨이는 전혀 문제 되지 않는다고 해들리를 안심시켰다.

헤밍웨이는 1921년 3월 세인트루이스의 해들리의 집을 방문하여 데이트를 즐겼고 2주 후에는 해들리가 시카고로 찾아가 데이트를 즐겼다.

그 후 5월까지 두 달 동안 서로를 보지 못했지만 6월에는 주변사람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약혼을 발표했다.

2. 헤밍웨이 재능에 대한 해들리의 믿음과 그녀의 유산

해들리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고 믿었고, 무엇보다 헤밍웨이를 재능을 믿었다. 그리고 8살이나 어린 헤밍웨이에게 재정적 뒷받침이 될 수 있는 부모들로부터 받은 자신의 유산을 믿었다.

해들리는 그 깨끗한 얼굴 피부와 짙은 갈색 머리를 가진 아름다운 여성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의 미모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아름다운 미모에 헤밍웨이가 사랑에 빠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전기작가의 말처럼 해들리의 외모에서 자신의 첫사랑 아그네스의 모습을 찾을 수 있어 빠져들었을 수 있다.

헤밍웨이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해들리를 “목도리처럼 긴” 얼굴, “쏘옥 올라탄” 코, “우아한 입술“ “거친 금발머리를 가진 작은 떡갈나무 같은 머리카락” 등으로 해들리의 외모를 묘사했다.

그렇게 서로 깊은 사랑에 빠져 1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 열애 끝에 드디어 1921년 9월 3일, 미시간 주 베이 타운십에서 결혼했고, 왈룬 호수에 있는 헤밍웨이 가족의 여름 별장에서 신혼여행을 보냈다.

해들리와 헤밍웨이의 결혼 사진

그런데 날씨가 비참할 만큼 험악했고, 리처드슨과 헤밍웨이는 열과 인후통, 기침으로 쓰러졌다. 이 비참한 날씨로 인한 고생은 두 사람의 짧은 결혼 생활을 예견하는 듯했다.

부부는 신혼여행을 무사히 마친 후 시카고로 돌아와 작은 아파트에서 살았다. 곧이어 해들리는 미움을 받던 삼촌이 사망하게 되자 삼촌의 유일한 상속자가 되어 유산을 받게 되었다.
그들 부부는 생각지 못한 유산을 받게 되었고, 두 사람에게 보다 확실한 재정적 독립을 안겨주었다.

두 달 후 헤밍웨이가 토론토 스타의 외국 특파원이 되었을 때 부부는 파리로 떠나 그곳에서 살았다.
1922년 봄에는 이탈리아로, 여름에는 독일로 여행을 떠났다. 유산으로 인한 재정적 안정이 가져다준 자유였다.

3. 서서히 멀어지는 해들리와 헤밍웨이

해들리는 1922년 12월 제네바 평화회담을 취재하고 있던 헤밍웨이를 만나기 위해 홀로 제네바로 갔다. 이 여행 중에 헤밍웨이의 원고가 든 여행가방을 잃어버려 헤밍웨이는 직장까지 잃어버리게 된다.

헤밍웨이는 망연자실하고 잔뜩 화가 나 해들리와 다투게 되는데 이때부터 둘 사이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그러나 몇 달 후, 해들리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고 토론토로 이사하기로 결정했다. 그곳에서 그들의 아들 존(밤비)이 1923년 10월 10일 태어났지만, 헤밍웨이는 토론토에서의 밋밋한 생활이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헤밍웨이는 토론토 저널리스트의 평범한 삶을 살기보다는 파리로 돌아가 작가의 삶을 사는 것을 꿈꾸었다. 결국 헤밍웨이의 열망에 그들은 또다시 파리로 돌아왔고 1924년 1월 노트르담의 새 아파트로 이사했다.

캐나다 토론토에서 파리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헤밍웨이는 파이퍼 자매를 만나게 되는데, 이 만남은 해들리에게는 결정적 불행으로 작용하게 된다.

4. 해들리와 헤밍웨이의 파경원인이 된 파이퍼와의 만남

헤밍웨이는 아내 해들리와 함께 1923년 스페인 팜플로나에서 열린 산 페르민 축제를 처음 방문했고, 그곳에서 투우에 매료되었다. 그리고 팜플로나의 방문은 연례행사가 되었다.

1925년 6월에도 헤밍웨이와 해들리는 폴린 파이퍼를 포함한 미국과 영국의 국외 추방자 그룹이 동행하여 팜플로나를 방문하여 투우를 즐겼다.

이 팜플로나 여행은 헤밍웨이의 첫 번째 소설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The Sun Also Rises)에 영감을 주었는데, 그는 축제 직후 쓰기 시작하여 3개월 만인 9월에 완성했다.

헤밍웨이와 해들리의 다정했던 이미지 사진

그들의 결혼 생활은 헤밍웨이가 이 소설을 집필하고 수정하면서 파탄에 이르기 시작한다.
두 번째 해에는 크리스마스에 슈룬스에 갔지만 그 해에는 폴린 파이퍼가 합류했다. 헤밍웨이는 파이퍼와 함께 파리로 돌아갔고, 해들리는 아들 존과 함께 오스트리아에 남았다.

해들리가 오스트리아에 있는 동안 헤밍웨이는 뉴욕으로 갔다가 3월에 파리로 돌아왔는데, 이때 폴린과의 불륜이 시작되었을 수 있다.

1926년 봄, 해들리는 헤밍웨이의 불륜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그해 7월 팜플로나의 연례방문에서 함께 여행한 폴린의 존재를 견뎌냈다. 하지만 이때는 이미 해들리와 헤밍웨이의 사이는 돌이킬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파리로 돌아온 해들리와 헤밍웨이는 별거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가을에 공식적으로 해들리는 이혼을 요청했으며, 11월이 되자 그들은 재산을 나누었다. 그리고 해들리는 헤밍웨이의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의 로열티 제안을 받아들였다. 1927년 1월, 둘은 이혼했다.

해들리는 헤밍웨이의 첫 아내로 자신과 헤밍웨이 간의 신뢰와 사랑이 무너져 이혼하기 전까지 헤밍웨이를 지지하고 돌봤다. 헤밍웨이는 해들리를 본인의 여러 작품에 모티브로 등장시킨다.

그중에서도 헤밍웨이의 처녀작에 해당하는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The Sun Also Rises)에 등장하는 여성 주인공 비레크는 해들리를 모티브로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5. 헤밍웨이와 헤어진 해들리 리처드슨

해들리는 헤밍웨이와 헤어진 후 1934년까지 프랑스에 머물렀다. 파리에 있는 그녀의 많은 친구들 중에는 시카고 데일리 뉴스의 외국 특파원인 폴 모우러가 있었다.
해들리와 모우러는 해들리가 헤밍웨이와 헤어진 해인 1927년 봄에 만났다.

저널리스트이자 정치 작가인 모우러는 1929년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1933년 7월, 모우러의 5년간의 구애 끝에 리처드슨과 폴 모우러는 런던에서 결혼했다.

해들리는 특히 모우러가 그의 아들 존(범비)의 따뜻한 관계에 대해 고마워했다. 두 사람이 결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미국으로 돌아와 시카고 교외로 이주해서 살았다. 해들리는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에서 로열티를 계속 받았는데, 로얄티에는 1957년 개봉된 동일 제목의 영화에 대한 것도 포함되었다.

해들리 리처드슨의 이미지 사진

이 작품에서는 사이에서 갈등을 겪는 여성이 등장하는데 이여성은 해들리를 모티브로 한 것으로 추정된다.
해들리를 여러 작품에서 모티브로 삼은 것과 같이 헤밍웨이와의 관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녀와의 이별은 헤밍웨이의 문학 작품에도 큰 충격으로 작품에 반영됐다.

해들리와 헤밍웨이와의 이혼 후 헤밍웨이를 두 번 정도 마주쳤다고 한다. 한 번은 와이오밍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 그리고 파리에서의 짧고 즉흥적인 만남이었다고 한다.

헤밍웨이의 첫 아내였던 해들리 리처드슨은 1979년 1월 22일 플로리다 주 레이크랜드에서 8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리고 뉴햄프셔의 탬워스에 있는 초코루아 묘지에 묻혔다.

헤밍웨이와 해들리 리처드슨이 헤어지게 된 원인을 제공한 콜린 파이퍼, 그와 헤밍웨이와의 사랑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들어가 보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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