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 가우디의 연인,”페피타”호세파 모레우.

안토니 가우디와 그의 연인 페피타: 사랑과 상실의 이야기

안토니 가우디는 스페인 카탈루니아 출신의 건축가로, 생전에 스페인 건축학의 아버지로 불리며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카탈루니아 민족을 대표하는 예술가로, 바르셀로나를 화려한 모자이크와 초현실적인 건축물로 가득한 예술의 도시로 탈바꿈시키는 데 큰 기여를 했다.

가우디(Antoni Plàcid Guillem Gaudí, 1852~1926)는 곡선과 유기적 형태를 중시하는 아르누보 건축의 중심 인물로, 세계 건축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인물이다. 그의 디자인 중 하나인 바르셀로나의 구엘 공원 입구에 있는 도롱뇽은 도시의 상징이 되었다.

안토니 가우디의 연인,"페피타"호세파 모레우. 2

1. 안토니 가우디의 연인, 호세파 모레우

그러나 가우디의 성공 뒤에는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이 있었다. 그는 평생 단 한 번의 사랑을 경험했는데, 그 상대는 호세파 모레우(Josefa Moreu, 1862~1890)였다.

가우디는 1884년, 그의 서른두 살 때 마타로네사 노동협동조합 클럽 하우스를 짓던 중 ‘페피타’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그녀와 사랑에 빠졌다.

페피타는 금발에 키가 큰 매력적인 여성으로, 이미 두 번의 결혼을 경험한 복잡한 이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페피타는 16세에 군인과의 사랑에 빠져 결혼했으나, 남편은 도박과 폭력으로 그녀의 삶을 파괴했다. 결국 그녀는 남편을 떠나고, 여러 역경을 겪으며 홀로 아이를 키우게 된다.

이후 가우디와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사랑을 경험하게 되지만, 그녀는 남편과의 이혼 조정이 길어지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발전하지 못했다.

가우디는 소심하고 수줍음이 많은 사람이었고 타고난 워커 홀릭이었다.
그런데다 건축가로서 그의 천재성을 인정할 수  있기는 했지만, 허약한 그의 신체는 병약한 종합병동이었다.

페피타는 이런 가우디를 잘 알고 있었으며 현명(?)했다.  가우디가 남자로서 부족하지만 본인이 불만족한 것 때문에 절대 가우디에게 화내지 않았다.

오히려 페피타는 가우디를 존경하는 마음이 컸으며, 주말마다 찾아오는 그와 사랑하며 지내면서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면서 가우디에게 위대한 천재라는 것을 인식시키고, 건축가로서의 자부심을 새겨주는 역할도 했다. 그녀의 아버지도 가우디의 천재성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남자로서, 남편으로서 가우디가 페피타의 마음을 사로잡지는 못한 것이다.

페피타는 이런 가우디를 만나면서도 침착하게 대시하는 다른 남자를 만났다. 붉은색에 가까운 그녀의 긴 금발 머리는 많은 신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어린 두 딸도 페피타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물려받아 매우 예뻤으며, 의붓딸로 키우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이때 가장 가까이 접근한 남자가 조세프 카바올롤이었다. 마침 페피타의 전 남편 라몬 모레우와의 이혼소송의 조정기간도 끝났다.

페피타는 잘생기고 멋진 남자,조세프 카바울룰과 미래를 약속하는 약혼을 하였다.

이런 약혼 사실을 모르는 순진한 가우디는 페피타가 이혼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이혼이 성립된 때에 용기를 내 페피타에게 고백을 하고 청혼을 했지만 이미 늦었다.

이미 페피타는 조세프 카바울룰과 약혼을 한 상태였다. 가우디의 청혼은 페피타로부터 보기좋게 거절당했다.

그리고 이후부터 귀찮게 구는 가우디의 접근을 거부했다. 이런 상황을 파악한 가우디는 실망했고 좌절했다.

안토니 가우디의 연인,"페피타"호세파 모레우. 3

2. 가우디를 배신한 호세파 모레우

가우디는 이 첫 실연의 충격으로 평생 독신으로 지내게 되었고, 그의 예술적 감성은 페피타와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페피타의 바람과 달리 가우디에게 깊은 사랑의 상처를 안겨주며까지 결혼을 한 남편 조셉 카바올롤을 두아이를 더 낳게하고 오래지 않아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만다.

페피타는 이후에도 여러 남자와의 관계를 이어갔고, 결국 재능 있는 사업가 조안 비달을 만나게 된다. 그녀는 자신의 사업을 성공적으로 운영하며 네 자녀를 키우는 강인한 여성으로 성장했다.

조안 비달은 페피타의 삶에 안정감을 주는 남자였다. 비록 전 남편들과 비교해 잘생기지도 않고 남자답지도 못했지만, 그는 페피타를 사랑하며 네 자녀에게 훌륭한 아버지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페피타는 여전히 모자 가게의 주인이었지만, 그녀의 대부분의 시간은 남편과 아이들에게 바쳐졌다. 그러나 불행히도 페피타는 1890년, 28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하고 만다.

가우디와 페피타가 서로 헤어진 후 다시 만났다는 기록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피타의 삶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은 가우디의 유일한 사랑이었기 때문이다.

안토니 가우디의 연인,"페피타"호세파 모레우. 4

타고난 워커 홀릭 가우디

가우디를 아는 사람들은 그가 사랑하는 연인을 찾지 못한 것이 경제적 수입이나 건축가로서의 명성과는 관련이 없다고 말한다.

그는 젊은 시절의 화끈한 삶을 뒤로하고, 10년 동안 페피타와의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을 간직했다. 이후 36세부터는 경건한 가톨릭 신자의 길을 걸으며 독신으로 지내며 자신의 직업에 헌신했다.

그의 신앙과 예술혼, 사람과 자연에 대한 애정은 독신의 고독함을 이겨내는 데 큰 힘이 되었다. 이러한 경험은 그가 바르셀로나에 독창적인 건축물들을 남기는 데 기여했다.

가우디의 금욕적인 삶은 그의 대표작인 사그라다 파밀리아(Sagrada Família)와 깊은 연관이 있다.

1852년, 가우디는 카탈루니아 지방의 리우돔스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류마티즘을 앓아 지팡이를 짚고 다녔고, 건강이 좋지 않아 군대에서도 편안하게 열외되었다.

그러나 그는 바르셀로나의 건축전문학교에 입학하여 25세에 건축사 자격을 취득하고 본격적인 건축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가우디는 독창적인 디자인과 소재를 다루는 재능으로 주목받았고, 그의 건축물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수를 보여준다.

그의 대표작인 카사밀라는 찬사와 혹평을 동시에 받았으며,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가우디가 그의 연인 페피타를 만나기 전부터 건축이 시작되었으나, 가우디가 1883년부터 프로젝트를 이어받아 아르누보식으로 변형하여 설계했다.

그는 자신의 생애를 이 프로젝트에 바쳤고, 1926년 교통사고로 사망할 당시 프로젝트의 25%만이 완성된 상태였다.

가우디는 생전에 독특한 외모와 스타일로 주목받았으나, 나이가 들면서 검소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1926년 6월 7일, 그는 성당에서 미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노면전차에 치였다. 그의 허름한 옷차림 때문에 병원에서는 그를 노숙자로 오인하여 제대로 치료받지 못했다.

결국, 그는 6월 10일 7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장례식은 스페인의 반국장으로 치러졌고, 그의 시신은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지하묘지에 안장되었다.

가우디의 독창적인 건축물들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으며, 그의 예술적 유산은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페피타와의 사랑은 그의 삶과 작품에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가우디의 예술혼은 그녀와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가우디와 페피타의 이야기는 사랑과 상실, 그리고 개인의 성장이라는 주제를 담고 있으며, 두 사람의 삶은 서로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준다.

 안토니 가우디의 연인,"페피타"호세파 모레우. 5

  

How useful was this post?

Please rate me.

Average rating 2.7 / 5. The number of votes cast 3

No one has voted so far. Please rate your post first.

error: Content is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