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차르트의 연인, 알로이시아 베버
요하네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Johannes Chrysostomus Wolfgang Gottlieb Mozart,1756. 1. 27.~1791. 12. 5.)는 ” 18세기 음악의 거장으로, 35년이라는 짧은 생애 동안 수많은 교향곡, 오페라, 협주곡, 소나타를 작곡했다. 그는 음악적 업적뿐만 아니라 로맨틱한 이야기로도 기억된다. 특히, 그의 첫 번째 연인으로 알려진 알로이시아 베버와의 만남과 헤어짐은 그의 작품과 함께 그의 음악적 삶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의 첫 번째 연인 알로이시아와의 사랑이 좌절된 후, 모차르트는 알로이시아의 동생 콘스탄체에게로 향하게 되는데, 모차르트와 알로이시아의 만남과 사랑과 헤어짐은 어땠는지 알아본다.
1.모차르트와 알로이시아 베버의 만남
1777년, 21세의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독일의 만하임에서 젊은 작곡가로서 여행을 하며 일자리를 구했는데 이곳에서 베버 가족을 처음으로 인연을 맺었다. 그때 소프라노 가수로 데뷔를 준비하고 있던 17세의 소녀 알로이지아 베버(Aloysia Weber.1760 – 1839)를 만나 그녀에게 노래를 가르치는 일을 맡았다.
모차르트는 어린 나이부터 13세까지 가수로서 공연도 많이 할 정도로 훌륭한 가수였었는데, 변성기가 온 후로는 노래를 그만두었었다.
모차르트는 이때의 노래공연 경험으로 나중에 오페라 작곡가로서 음악적 영감을 받았고,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오페라가 만들어지는 모든 과정을 잘 알게 되었기 때문에 알로이시아에게 노래와 오페라에 대해서 가르칠 수 있었던 것이다.
알로이시아 베버는 1760년 프롬프터와 음악 저작가로 일하는 아버지 프리돌린의 딸로 독일의 젤림 비젠탈에서 태어나 만하임에서 자랐다.
그녀의 세 자매는 모차르트의 마술피리에서 밤의 여왕 역할을 초연한 소프라노 요제파 베버, 나중 모차르트의 아내가 된 콘스탄체 베버, 그리고 소피 베버가 있었는데, 아버지의 영향인지 모두 음악에 재능을 보이는 자매였다.
모차르트는 알로이지아에게 노래를 가르치면서 알로이시아의 재능과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사랑에 빠졌다. 알로이시아는 이미 매우 뛰어난 학생으로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소프라노였다.
모차르트는 알로이시아에게 보컬 테크닉, 공연 기술, 오페라 역할, 연주 기술등 모든 것을 가르쳐주었다.
당시, 모차르트가 얼마나 그녀에게 빠졌느냐면 그의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 “알로이지아를 이탈리아로 데리고 가서 데뷔시키겠다”는, 당시 상황으로 봐서는 상당히 허황된 계획까지 세웠을 정도였다.
모차르트는 그녀의 재능만큼은 정확하게 본 것이었다.

그리고 오페라와 음악 세계에 노출되게 함으로써 알로이시아를 음악적으로 많은 성장을 하도록 지도하였다.
알로이시아는 이후 당대를 풍미한 콜로라투라 소프라노로 명성을 날리게 된다.
그리고 1778년, 뮌헨으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오페라가수로 데뷔했다.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데다 뛰어난 무대 위의 퍼포먼스로 오페라 공연세계에서 떠오르는 스타로 각광받으며 유명해졌다.
그러나, 이와 달리 모차르트는 구직 활동에 실패하여 몇 달 동안 만하임을 떠나 파리로 있었다. 그가 잘츠부르크로 돌아가는 길에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는 알로이시아를 만났는데 둘간의 사이가 예전과 같지 않았다.
모차르트는 알로이시아에게 청혼했다. 그러나 변변한 일자리가 없는 모차르트에게는 언감생심 가당치 않았고, 알로이시아 또한 아직 여건이 아니라며 발뺌을 했다.
알로이시아는 잘 나갔다. 1779년에는 황제 요제프 2세의 프로젝트인 비엔나의 국립 싱스필에서 노래하는 가수로 캐스팅되어 베버가족은 9월, 비엔나로 이주했다.
그러나 호사다마라 했던가, 잠시 티켓 판매원으로 취업하여 일을 하던 알로이시아의 아버지 프리돌린이 갑자기 사망하고 만다. 이사한 지 한 달 후의 일이다.
2.알로이시아의 이혼남 조셉 랑거와의 결혼
졸지에 생계를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게 된 알로이시아와 그의 어머니 카실리아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집에 하숙인들을 받아들여 생활비를 보태야 하는 지경에 이른다. 알로이시아의 공연수입만으로는 가족의 생활비가 부족했던 것이다.
알로이지아는 가수로서의 많은 인기가 있었던 데다 훌륭한 미모를 갖추고 있어 남자들한테 인기가 많았다. 모차르트뿐만 아니라 다른 남자들로부터도 구혼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아버지의 사망으로 생활고도 겪고 있는데, 변변한 수입이 없던 모차르트는 결혼상대로는 매력적이지 못했고 구혼은 달갑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알로이시아는 모차르트의 구혼을 뒤로한 채 1780년 10월 31일 이혼남 조셉 랑게(Joseph Lange)와 결혼을 해버렸다. 모차르트는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알로이시아와 조셉의 결혼은 일정액의 생활비를 지원한다는 조건부 결혼이었다. 조셉은 아마추어 화가이기도 했는데 나중에 모차르트의 초상화를 그렸다. 이 초상화는 조셉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꽤 유명해졌다.
이렇게 모차르트의 알로이시아의 로맨스는 끝났다.
알로이시아에 대한 모차르트의 사랑은 거의 짝사랑이었다. 비록 결혼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그녀와의 연애사는 모차르트의 인생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베버 자매들에 대한 모차르트의 경험과 그들의 가족들과의 끈끈한 애정고리는 모차르트의 풍부하고 다양한 작품구성을 하는 데 있어 많은 기여를 했다.
모차르트는 알로이시아를 위한 선물로 “Je suis Lindor”의 주제에 변주곡 K. 354/299a를 작곡했다. 이 곡은 가사가 있는 곡은 아니지만, 알로이시아와의 관계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진 음악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3. 알로이시아의 동생 콘스탄체와의 결혼
짝사랑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모차르트는 베버 가족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알로이시아가 랑거와의 결혼 후에는 1781년에 비엔나로 이사했고, 베버의 집에서 잠시 하숙을 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모차르트의 관심은 알로이시아의 동생 콘스탄체에게로 향했다. 모차르트는 그 해 말에 콘스탄테에게 구혼했다. 베버집안의 알로이시아와의 관계를 알고 있는 모차르트의 아버지는 콘스탄체와의 연애에 대해서 반대했다.
그럼에도 이미 모차르트의 콘스탄체에 대한 감성은 깊어졌다. 결국 모차르트는 아버지의 반대에도 콘스탄체베버와 1871년 약혼을 하고 이듬해인 1782년 결혼한다.

모차르트는 성공과 인정을 받았던 시기가 있었지만, 그의 뛰어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콘스탄체와 결혼 후에도 종종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프리랜서 작곡가로서 수입이 예측 불가능함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사치스러운 생활 방식이 문제였다. 이런 이유로 자주 친구들로부터 돈을 빌리고 도움에 의존하는 등 재정적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그런데다 작곡을 하면서 건강을 돌보지도 못했고, 류마티즘, 열병, 천연두, 그리고 다른 질병들을 포함하여 그의 일생 동안 다양한 질병으로 고통을 받았다.
결국 모차르트는 1791년 12월 5일, 35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죽고 만다. 모차르트와 콘스탄체 부부는 총 6명의 자녀들을 낳았지만 차남과 막내아들 2명만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았다. 나머지 자식들은 태어난지 1년 내에 모두 사망했으며 한 명은 사산했다.
아내 콘스탄체는 남편이 죽은 후 추모 음악회, 미발표 작품의 출판 등으로 경제적으로 크게 성공한다.
콘스탄체는 모차르트가 완성하지 못한 작품 ‘레퀴엠’의 완성을 모차르트의 여러 제자들에게 맡겼으나 끝내 완성하지 못하다가, 결국 프란츠 크사버 쥐스마이어(Franz Xaver Süssmayr)가 완성했다.
그리고 1809년 덴마크 출신의 외교관이던 게오르크 니콜라우스 폰 니센(Georg Nikolaus von Nissen)과 재혼했다.
콘스탄체와 새 남편은 모차르트에 대한 전기를 남겼고, 덴마크로 이주했다가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로 돌아와 여생을 마감했다.
조셉랑거와 결혼을 한 알로이시아는 이후에도 콘서트를 해가며 꽤 성공적인 가수 생활을 이어나갔는데 돈만 보고 결혼해서인지, 다른 이유가 있음인지 1795년부터는 랑게와 별거를 하였다. 결혼 16년 만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