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연인
1. 스페인 대문호, 미겔 데 세르반테스
미겔 데 세르반테스 사아베드라 (Miguel de Cervantes Saavedra, 1547.09.29~1616.4.23) 스페인 마드리드 북쪽에 자리잡은 카스티야 지방의 작은 도시인 알칼라 데 에나레스(Alcalá de Henares)에서 몰락한 이달고( Hidalgo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귀족 신분을 지칭하는 낱말로 주로 작위가 없는 귀족을 뜻한다) 집안의 이발사 겸 외과 의사인 로드리고 세르반테스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할아버지는 종교재판소 변호사였다.
세르반테스의 집안은 부자 할아버지를 두고도 가난했다. 당시에는 의사도 피를 뽑거나 땀을 흘리게 해서 환자를 고치는 수준이었으며 그런 일은 이발사도 했다.
세르반테스의 학력은 불분명하나 대학은 졸업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길거리에 떨어져 있는 찢어진 종이라도 주워서 읽는 열렬한 독서광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2.세르반테스의 연인
세르반테스는 1584년 9월, 최근 죽은 친구이자 시인인 페드로 라이네스의 재산을 정리하기 위해 에스키비아스라는 톨레도의 마을을 방문했는데, 죽은 친구 부인의 이웃이었던 18살이 어린 카탈리나를 만났다.
카탈리나는 마을에서 작은 토지를 소유한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다.
세르반테스와 카탈리나는 서로에게 매력을 느꼈고, 빠르게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그들은 1584년 12월 12일, 에스키비아스의 성탄절 성당에서 결혼했다. 결혼식은 카탈리나의 삼촌인 후안 데 팔라시오스가 주관했는데 세르반테스 사베드라(Cervantes Saavedra)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나타난 것이 1586년, 그들의 결혼과 관련된 문서에서 이다.
그런데, 이런 일이 있기 얼마 전인 11월에는 세르반테스 사생아 딸 이사벨이 태어났다.
세르반테스는 결혼하기 1년 또는 2년 전에 아나 프랑카와 불륜 관계를 맺었는데 아나 프랑카는 마드리드 시내의 있는 여관 주인의 아내였다.
세르반테스는 나중에 이사벨이 본인의 딸이 맞다는 친자관계를 인정했고 1598년 이사벨의 어머니인 아나 프랑카가 죽었을 때, 세르반테스는 자신의 여동생 막달레나에게 딸, 이사벨을 돌봐 달라고 부탁했다. 이사벨은 세르반테스의 후반기에 중요한 인물이 된다.
세르반테스의 부인 카탈리나 데 살라사르 이 팔라시오스( Catalina de Salazar y Palacios.1565.11~1626. 10)는 스페인 카스티야 지방의 에스키비아스라는 톨레도의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부모는 헤르난도 데 살라사르와 카탈리나 데 팔라시오스였는데 그녀는 두 형제가 있었고 아버지는 일찍 죽었다.
세르반테스와 카탈리나의 가정생활은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다. 세르반테스는 결혼하기 전에 이미 혼외 자식인 이사벨을 낳은데다가 카탈리나는 자식을 낳지 못했다.
세르반테스 부부는 스페인의 여러 도시를 옮겨다니며 살긴 했는데 이마저도 세르반테스가 자신의 작품을 위해 여행을 하거나, 감옥에 갇혀 있어 대부분의 시간을 떨어져서 살아야만 했다.
이러한 이유로 사는 동안 재정적인 어려움에 시달렸는데 그나마 카탈리나가 작은 토지를 소유했던 덕분에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카탈리나는 에스키비아스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지만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로 성공한 후에는 그의 작품을 출판하고 보급하는 데 많은 기여를 했다. 그녀는 세르반테스의 죽음 후에도 그의 유산을 지켜주는데 성실히 역할을 다했다.

카탈리나가 세르반테스의 작품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돈키호테의 이상적인 여인 둘시네아도 실제 모델은 세르반테스가 어릴 때 사랑했던 알도나 로렌소라는 농부의 딸이라고 한다.
세르반테스는 1616년에 죽을 때, 카탈리나와 수녀원에 묻히고 싶다고 유언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출판하고 보급하는 데 도움을 주고 삶과 문학에 대한 중요한 역할을 한 부인 카탈리나를 고맙게 생각한 듯하다.
10년후 부인 카탈리나가 사망했을 때 수녀원에 합장되었다.
그녀는 1626년 10월 30일 마드리드에서 죽었고, 세르반테스와 같은 수녀원에서 장례를 치렀고 세르반테스의 유언대로 수녀원에 묻혔다.
3.세르반테스의 작품에 연인이 미친 영향
세르반테스의 대표작 돈키호테에는 둘시네아라는 돈키호테의 이상적인 연인으로 표현되는데 둘시네아의 캐릭터는 세르반테스의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여성이며, 돈키호테의 이상적인 연인이지만, 소설 속에서는 실제로 등장하지는 않는다.
둘시네아의 실제 모델은 카탈리나가 아니라, 세르반테스가 어릴 때 사랑했던 알도나 로렌소라는 농부의 딸이라고 한다.
이렇게 카탈리나는 세르반테스와 결혼한 후에도 그의 작품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이지 않는데 카탈리나는 세르반테스의 삶과 문학에 대한 이해에 도움이 되었고, 그의 작품을 출판하고 보급하는 데 많은 기여를 했다.
그녀는 세르반테스의 죽음 후에도 그의 유산을 지켜주었고, 그의 작품 세계에 여러모로 영감을 준 인물 중 하나였다.
또한 세르반테스의 혼외 딸인 이사벨도 세르반테스의 작품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니나 세르반테스의 후반기 작품 활동에 있어 중요한 인물로 역할을 다한다.
이사벨은 세르반테스의 죽음 후에도 카탈리나와 함께 세르반테스의 작품을 출판하고 보급하는 데 기여하였고, 그의 유산을 지켜주었다.
4.돈키호테로 대변되는 세르반테스
세르반테스가 22세 때인 1569년, 결투에서 안토니오에게 부상을 입힌 혐의로 기소되었다.
체포 영장이 취소될 기회를 엿보던 세르반테스는 입대하여 신성 동맹 함대의 일부인 마르키즈호를 타고 레판토 해전에 참전하였으며 이 해전은 오스만 함대를 패배로 끝났다.
이 기념비적인 해전은 무슬림의 유럽 침략을 막았고, 처음으로 유럽의 기독교인들이 무슬림에 의해 침략 당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었다고 한다.
세르반테스 자신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본인은 말라리아를 앓고 있었지만 작은 배인 12인승 소형 보트를 지휘하여 적의 갤리선을 공격하는 데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세르반테스는 이때 총상을 입고 왼손이 불구가 되었는데 이때부터 ‘레판토의 외팔이’라는 별명을 얻게 됐다고 한다. 그의 나이 24세 때였다.

그는 1572년 7월에 복무에 복귀했지만, 기록에 따르면 1573년 2월에도 그의 가슴 상처는 여전히 완전히 치유되지 않은 상태에서 나바리노 원정대에 합류하였다.
참여한 튀니스 점령작전은 패전하였고 튀니스는 1574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탈환되었다.
레판토 해전의 승전에도 불구하고 전쟁 전체는 결국 오스만튀르크 제국의 승리였다.
세르반테스는 군 생활을 계속하다가 1575년 9월에 귀국하기 위해 탄 배가 태풍에 휩쓸리고 튀르크 해적의 습격까지 받아 튀르크의 포로가 된다.
노예 신분으로 5년간 포로 생활을 하다가, 가족이 모은 돈으로 몸값을 지불하고 천신만고 끝에 간신히 풀려났다. 그때가 33세였다. 그때 자유의 중요성을 절감했을 것이다.
1580년 세르반테스는 풀려난 뒤 군사 식량을 납품하는 식량 조달원이라는 직책을 맡았으나, 그런 중에도 파문당하고, 당국 허락 없이 밀을 팔았다는 죄목으로 투옥되기도 했다.
이후 그라나다에서 세금 징수원으로 근무했는데, 억울하게도 세비야 감옥에 7개월 동안 갇힌다
갇혀 있던 동안에 그는 돈키호테를 구상했다. 그리고 풀려난 뒤 바야돌리드에 가정을 꾸렸고 거기에서 불세출의 명작 돈키호테를 탈고하며 1605년 출판된다.
세르반테스는 자신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될지 몰랐다고 한다. 그러나 돈키호테는 시대를 초월하는 고전명작이 되었고 세계문학사를 대표하는 걸작이 되었다.
이때의 나이가 58세. 1585년 첫소설 라 갈라테아(La Galatea) 이후 무려 20년 만에 내놓은 소설이다.
돈키호테는 당대 유럽 최고의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라 어마어마한 인기로 끌었고 1614년에는무단으로 다른 작가들이 돈키호테 속편을 출간하는 일까지 벌어진다.
이런 광경을 본 세르반테스는 1615년 돈키호테 속편을 낸다. 그 뒤 마드리드로 거주지를 옮기고 1616년 4월 22일 당뇨병과 간경변으로 한편의 영화 같은 생을 마감한다.
그는 숨질 때까지 트리니티 수녀원의 일을 도왔다고 한다. 결국 사후에 그 수녀원에 묻혔다.
그가 수녀원에 묻힌 이유가 있는데, 세르반테스는 젊은 시절에 알제리에서 튀르크 해적에게 납치되어 5년 동안 포로로 생활하고 있는데 가족과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몸값을 지불하고 겨우 풀려났다.
그 중에서도 특히 트리니티 수녀회가 많은 돈을 모아 세르반테스의 구출에 기여했다.
이에 세르반테스는 평생 자신의 삶을 트리니티 수녀회에게 빚진 것으로 생각했고, 스페인으로 돌아온 후에는 수녀원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으며 그는 자신의 작품인 돈키호테에서도 트리니티 수녀회를 칭찬하는 대목을 넣었다.
그리고 세르반테스는 1616년에 죽을 때, 수녀원에 묻히고 싶다고 유언했다.
세르반테스는 수녀원에 묻혔지만, 수녀원이 17세기 말에 새로 지어졌을 때, 그의 유해는 새 건물로 옮겨졌다. 그 후 4세기가 지나도록 잊혀져 누구도 그가 묻힌 정확한 위치를 알지 못하게 되었다. 그의 무덤을 찾는 데 수백 년이 걸렸다.
2014년, 스페인 정부에서 10만 유로(약 1억 4천만 원)가까이를 들여 트리니티 수녀원 내의 세르반테스의 유해를 찾아냈다.
이 수녀원 지하에는 세르반테스와 그의 부인 등이 묻혀 있었다. 그의 유언대로 새로운 무덤을 만들어 그곳에 재장례를 했다.
5.후대의 평가
모든 세르반테스의 초상화는 어디까지나 상상도이다. 즉 세르반테스가 살아 있을 때 그려진 세르반테스의 공식적인 초상화는 없다.
1859년 루이스가 초상화는 그의 상상력을 기반으로했으며 스페인 유로 동전에 나타나는 이미지는 1905년에 만들어진 세르반테스의 흉상을 기반으로 제작된 것이다.

마드리드의 중심부 에스파냐 광장에는 세르반테스와 돈키호테, 산초의 동상이 있다. 스페인 심장부에 세르반테스의 동상이 있다는 의미로 스페인이라는 나라의 아이콘이라고 해석되어도 무방할 것이다.
이와 같은 세르반테스를 현대 스페인에선 당연히 자국을 대표하는 대문호로 추앙하고 있다.

세르반테스의 문학에 대해서 20세기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문학 평론가 해럴드 블룸은 “단테 이후 서양의 중심 작가는 셰익스피어와 세르반테스였으며, 그 이후에 나온 톨스토이나 괴테, 디킨스, 프루스트, 조이스도 그에 못 미친다”라고 평했다.
세르반테스는 글 쓰는 방법을 알고 있고, 돈키호테는 행동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은 서로를 위해 태어난 하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