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초현실주의 예술가 살바도르 달리
살바도르 달리 (Salvador Dalí,1904.5.11. – 1989. 1. 23.)는 눈에 띄는 기괴한 이미지로 유명한 스페인 초현실주의 예술가로 스페인의 가톨릭 가정에서 카탈루냐계 변호사이자 공증인이었던 아버지인 살바도르 달리 이 쿠시(Salvador Dalí i Cusí, 1872 ~ 1950)와 어머니 펠리파 도메네크 페레스((?~1921)사이에 카탈루냐지방의 피게레스에서 태어났다.
마드리드에서 미술 정규 교육을 받은 달리는 1916년 가족과 함께한 여름 휴가에서 처음 현대미술을 접한다. 그리고 이듬해 달리의 아버지는 자신의 집에서 자신이 그린 목탄화 전시회를 개최한다. 달리는 어린 시절부터 인상주의와 르네상스 거장들의 영향을 받아 입체파와 아방가르드 운동에 매료 되었지만 1921년 달리의 어머니는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나 충격을 크게 받았다.
달리의 아버지는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여동생과 재혼했으며 성정체성에 의심받는 달리와 다르게 아버지인 쿠시는 바람을 너무 많이 피워 부인과의 갈등으로 이혼의 위기에 처하는 등 가정이 평안하지 않아 달리는 아버지와의 마찰이 매우 잦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달리는 갈라, 로르카 등과의 일화들 때문에 달리의 성 정체성에 대해서는 지금도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있고 계속해서 연구가 진행되고 있지만, 그가 무성애자였다는 주장과 양성애자였다는 주장이 큰 편인데, 본인이 확인했다는 것으로 달리가 이성애자나 동성애자는 아님은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
일각에서는 달리가 관음증 같은 성도착증 경향도 있었다는 주장이 있지만 이 모든 것 들은 그가 생전에 보여주었던 기이한 행동이나 기록 등을 통해서 추측되어 질 뿐 사실로 확인된 것은 없다.
2.운명적인 갈라와의 만남
1929년 달리의 카다케스 집에서 많은 이들을 초대한 가운데 달리는 자신의 운명적인 여인, 갈라(본명:옐레나 이바노바 디야코노바)를 만나게 된다. 당시 프랑스의 시인 폴 엘뤼아르의 부인이었던 갈라는 달리의 열성적인 구애에 흔들려 둘은 사랑에 빠지게 된다.
결국, 두 사람은 1929년 파리에서 달리의 개인전이 열리던 도중 동반 도주, 홀연히 잠적하여 이때 부터 함께 살기 시작한다. 이후 갈라는 폴 엘뤼아르와 이혼(1934)하고 1월 30일 달리와 파리에서 정식으로 결혼하게 된다. 이때 갈라가 40세, 달리는 30세 였다.

달리의 아버지 쿠시는 불륜 관계에서 시작되었던 갈라와 달리의 결혼에 대해 매우 반대했다. 그 와중에 달리가 프랑스 전시회 인터뷰에서 ‘나는 그저 재미로 어머니의 초상화에 침을 뱉곤 한다’라고 한 기사를 본 달리의 아버지는 매우 화를 냈으며 그에게 공식적인 사과를 요구했지만 달리는 거절했다한다.
달리는 어머니에게 경멸이나 모욕의 의미로 침을 뱉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는 달리가 어린나이에 어머니가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났을 때 매우 슬퍼했고 큰 충격을 받았었으므로 이해되는 부분이나 일반상식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기행으로 해석되는 부분이다.
결국 아버지는 달리의 상속권을 1929년 박탈당했으며 집안에 다시는 발을 들이지 말 것을 요구받았다. 하지만 달리가 몇년에 걸쳐 자기의 집 주변의 땅과 오두막들을 매입해 빌라를 건축하는 것을 본 아버지는 달리와 갈라를 차츰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한다.
갈라는 평생 동안 많은 예술 작품에 영감을 준 것 외에도 달리의 비즈니스 매니저 역할을 하여 파산을 능숙하게 피하면서 그들의 사치스러운 생활 방식을 관리하였다. 갈라는 달리의 매니저로서 그의 작품활동과 전시회등 모든 일정을 총괄했다. 전시회 장소부터 작품 판매까지 모든 계약은 그녀의 손을 거쳐야만 성사되었다.
달리는 갈라에게 전적으로 의지했는데 주변 관계인들이 “달리는 갈라가 없다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갈라에 대한 달리의 사랑과 신뢰는 식을 줄을 몰랐고 그는 오직 그녀만을 위한 발레 공연을 기획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달리의 갈라에 대한 집착으로 갈라는 달리의 작품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하게 된다.

달리는 갈라를 뮤즈로 많은 작품을 그렸는데 나이를 먹어도 누드화를 그릴 때는 아름답게 미화하여 그리곤 했다. 심지어 갈라에 대한 동정심과 흠모의 이미지를 만들어 순결하고 성스러운 여신의 모습으로 까지 둔갑시켰다.
달리와 갈라는 물질적 풍요를 맘껏 즐겼다. 그들은 최고급 레스토랑에서만 식사를 했고 갈라는 샤넬 같은 명품 드레스만 입었다. 따라서 갈라는 계속해서 돈이 필요했기 때문에 달리가 고액의 대가를 받을 수 있는 작업에만 몰두하기를 원했고 작품의 단가를 높이기 위한 언론의 주목이 필요하여 기이한 행동을 계속하길 바랐다. 때때로 그녀는 달리의 그림에까지 직접적으로 관여했는데 갈라는 의뢰받은 작품의 마감일이 다가오면 달리를 스튜디오에 가둬서 작품 마감일에 맞추도록했고, 돈을 벌기 위한 온갖 아이디어를 고안해냈다. 달리 또한 갈라의 명령을 충실히 수행했고 자신의 모든 작품 활동과 행동이 돈과 직결되는 것에 대해 거부하지 않았다. 오히려 스스로에게 ‘달러에 걸신들린’이란 뜻의 ‘아비다 달러스(Avida Dollars)’란 별명을 붙이는 등 자조하며 즐겼다
달리는 그만큼 갈라를 사랑했다. 초현실주의 예술계를 대표하는 거인으로 인간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욕망을 비틀고 해방시키려고 했던 달리. 하지만 그가 보여준 이미지와는 다르게 정작 그는 성적 능력하고는 거리가 먼 남자였다. 대외적으로는 충동적이고 기괴한 행동으로 항상 논란의 중심에 섰던 달리이지만 집안에서는 평생 독재적인 아내에게만 의지하고 집착하며 순결을 지켰다.
그러다 1949년 스페인으로 돌아온 달리는 성모, 예수의 십자가 처형, 최후의 만찬 등 종교적 주제들을 그리기 시작하며 자신의 작품 스타일을 바꾸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이런 그의 모습에 당황했으며 특히나 갈라는 그가 잘 팔리는 기이한 작품이 아닌 다른 주제를 그리기 시작한 것을 심히 못마땅하게 여겼다.

반면, 갈라는 젊은 뮤즈와 혼외정사를 즐겼다. 성적 욕망과는 거리가 먼 달리는 갈라의 이같은 일탈행동을 어느정도 용인하는 듯 했다.
달리의 이러한 갈라의 외도를 묵인하는 것에는 달리의 성적 컴플렉스 문제라 할수 있는데, 달리의 성적 콤플렉스는 뿌리가 매우 깊었다. 엄격한 가톨릭 신자였던 달리의 부모는 어린 아들이 육체적 쾌락에 빠지는 것을 우려해 일부러 그의 주변에 성병(性病)으로 고통받는 남녀에 관한 책이나 끔찍한 사진들을 놓아두었다. 이 때문에 달리는 성병에 대한 원초적 두려움을 가지게 되어 성적 욕구가 일 때마다 자위행위로 대체했고 그 방법 외에는 오르가슴을 느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달리의 자서전에 의하면 그는 갈라를 만나기 전까지 동정을 지켰으며 일생동안 순결과 순결의 의미에 대해 집착했지만 갈라와는 결혼을 했는데 훌륭한 화가가 되기 위해서는 발기부전은 불가피한 것이라며그녀와의 불완전한 성생활을 공공연하게 떠들고 다녔다. 갈라의 불륜의 단초는 달리가 제공했다고 할 수 있다.
달리는 갈라의 사치와 불륜 때문에 고통스러워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라에게 집착했던 것은 갈라가 달리에게 영원한 솔메이트였다는 사실이다. 달리는 그녀에게서 모성애를 느끼고 근원적 편안함을 느낀 것 같다. 달리와 갈라의 관계는 50년 넘게 지속된 긴장되고 복잡한 모호한 관계였다.
3.갈라의 끝없는 남성편력
갈라는 지칠 줄 모르는 남성 편력으로 달리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달리는 갈라가 자신을 떠날까 봐 늘 두려움에 시달렸다. 1968년 달리는 갈라에게 지로나의 성(城)을 사 주었다. 그리고 달리는 갈라의 요청에 따라 그녀의 허락 없이는 그 성에 접근하지 않을 것임을 약속하였다. 갈라는 이 성에서 젊은 남자들과 마음껏 바람을 피웠고 자신의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거의 실험에 가까운 성형수술을 수차례 감행했다. 달리는 자신의 오랜 뮤즈가 멀어지자 신경쇠약과 우울, 그리고 건강악화를 겪는다.
급기야 달리가 76세가 되던 1980년, 달리는 중풍의 영향으로 붓을 잡기가 힘들 만큼 수전증에 시달리게 된다. 갈라의 불륜이 지속되면서 달리는 인내심에 한계를 느끼고 그녀를 폭행하여 갈비뼈 두개를 부러트리고 갈라는 흥분한 달리를 진정시키기 위해 마약성분의 바리움을 투여했는데, 적정량을 넘어선 투약으로 달리는 혼수상태가 되어버렸다.
또 이것을 완화치료하기 위해 갈라는 암페타민이라는 중추신경 자극제를 투여하게 된다. 이러한 과다약물 투여가 달리의 신경계에 나쁜 영향을 끼쳤고 그의 정신병은 더욱 심해지며 몸을 떨기까지 했다.
이때부터 달리는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했다. 갈라는 그런 달리를 두고 젊은 남자 새애인을 만났다. 새애인은 <지저스크라이스트 슈퍼스타>의 예수 역을 맡은 배우이자 메탈밴드 ‘블랙사바스’의 보컬리스트 제프 팬홀트였다. 그는 43세 아래의 그녀가 가장 아끼는 연인이었는데, 갈라는 그에게 100만 달러짜리 저택을 사주었다.
그러나 이 무렵부터 갈라는 노인성 치매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4.달리와 시인 친구 로르카와의 관계
달리를 무성애자로 보는 시각과 동성애자로 보는 오해도 있었다. 스페인에서 칭송받는 국민적인 시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Federico García Lorca, 1898~1936)이다.
한때 달리와 로르카는 친하게 지냈었는데, 로르카는 스페인의 국민 시인이자 민족 운동가였는데 동성애자였다. 한때 스페인 정부는 로르카와 달리의 ‘부적절한 관계’에 대해 인정하지 않았다.
1936년에 들어서면서 스페인에는 파시즘의 유령이 떠돌기 시작했다. 로르카는 동성애자, 집시 옹호자로서 위험한 상황에 처했으며 시민전쟁중에 로르카는 친구의 집에 피신했다가 체포되었다가 재판도 없이 처형당했다. 달리는 세상을 떠나기 3년 전에야 자서전 집필작가에게 “그것은 아름답고(관능적이고) 비극적인 사랑이었다”고 두 사람의 연인관계였음을 암시했다.

갈라, 로르카 등과의 일화들 때문에 달리의 성 정체성에 대해서는 지금도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되며 계속해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그가 무성애자였다는 주장과 양성애자였다는 주장이 가장 큰 편인데, 확실한 것은 달리가 이성애자나 동성애자는 아니라는 것을 본인이 확인시켰었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달리가 관음증과 같은 성도착증 경향도 있었다는 다양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지만 이 모든 것 들은 그가 생전에 보여주었던 기이한 행동이나 기록 등을 통해서 추측만 할 뿐 사실로 확인된 것은 없다.
1982년 달리는 스페인 국왕은 후작 작위(Marqués de Dalí de Púbol)를 수여 하였지만 달리는 삶에 대한 의지를 잃게 된다. 1984년 그의 집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화상을 입었는데 일부 시각에서는 이 화재가 달리의 자살 시도라고 보기도 한다.
이후 달리는 심부전증으로 입원치료를 했으나, 1989년 1월 23일 아침 그는 84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장례식장에는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가 참석했다. 그의 시신은 자신의 미술관인 피게라스 극장 미술관에 안치되었다.
5.달리의 미술세계와 독특한 수염
달리하면 떠오르는 것이 독특한 수염인데, 학교에서 퇴학 당한 1926년, 달리는 자신이 존경하던 파블로 피카소를 파리에서 만나게 된다. 피카소는 여러 친구들에게 달리를 소개했는데 그 영향으로 향후 몇년간 피카소의 화풍과 큐비즘이 작품에 등장한다.
이 시기에 바르셀로나의 인형, 달빛 아래의 정물화를 그리게 되고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정신 분석학을 탐독하며 그의 초상화를 그리는 등 열렬히 프로이트를 추종하였는데 프로이트에 대한 추종이 ‘꿈과 정신의 세계’에 대해 표현하기 시작하는 중대한 계기가 된다.
이 무렵부터 달리는 스페인의 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를 수염을 모방하여 수염을 기르기 시작했다.

수염과 관련하여 에피소드를 소개하면, 존 레넌의 부인이며 나름 기괴한 행동을 하던 화가로 잘나가던 요코가 달리의 콧수염 한쪽을 당시 돈 천만 원에 사겠다고 제안을 했다. 달리는 평소 요코를 마녀(魔女)로 여겼기에 자신의 수염을 가져가면 분명히 수염에 마법을 걸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소중한 수염을 주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큰돈을 포기(?)할 수 없어, 장난기가 발동하여 마당에서 마른 잔디 한 줄기에 물감으로 색칠을 하여 멋지게 포장하고 요코에게 보냈는데 요코는 감쪽같이 속아 돈을 보냈다고 한다. 후에 사기당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는 하는데 요코가 그 수염을 어떻게 처리했는지. 달리에게 사기친 돈을 청구 했는지, 아니면 수염을 지금까지 소장하고 있는지, 소장하고 있다면 더 큰 돈을 받지 않았을까? 궁금하다.
살바도르 달리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제일 먼저 떠올리는 작품은 “기억의 지속”(1931)이다. 1934년 이후로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서 소장하고 있다.

6.달리의 기행(奇行), 유언, 에피소드
달리는 사는동안 광기어린 기행으로 유명했는데, 그러한 기행들을 자신의 자서전 ‘The Secret Life of Salvador Dalí’에서 상세히 서술되어 있다.
-5살 때 개미에 뒤덮여 썩어가던 박쥐를 입에 넣었다.
-어렸을 때 담비 망토와 금색 왕관을 쓰고 여장을 했다.
-각종 벌레, 쥐가 득실대던 닭장 속에 한나절 칩거했다.
-할머니가 애써 기른 머리카락을 가위로 잘라버렸다.
-15살에 파이프를 피우고 넥타이 핀을 꽂고 다니면서 어른 코스프레를 했다.
-어린 아이를 5미터 높이의 다리 밑으로 떨어뜨려 죽일 뻔 했다. 그는 자신이 어렸을 적 약간의 사디즘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했다.
-화장실에 갈 땐 언제나 귀나 수염에 재스민 꽃을 꽂았다. 탈취 기능 때문이다.
-건강을 위해 담배를 끊고 ‘수염’을 시작하였다. 담뱃갑에 여분의 수염을 넣고 다니며 사람들에게 “수염 하실래요?”라고 권유한 것(모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의 수염을 물엿으로 굳힌다고 밝혔다)
-달리의 가장 대표적인 기행은 1936년 런던에서 열린 전람회에서 구식 잠수복과 헬멧을 착용하고 당구채를 들고 러시아 사냥개 2마리를 데리고 등장해 강연을 한 일이다.
( 하지만 잠수복의 밀폐로 인해 청중들은 강연을 들을 수가 없었고 정작 본인도 숨이 막혀 오히려 청중들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했다. 이때 사람들이 달리가 질식사할 위기란걸 눈치채는게 늦어서 하마터면 달리는 죽을뻔했고,인력만으론 도저히 이게 안벗겨져서 결국 공구를 가져와 해체해서 구조했다.)
달리의 유언은 “내 시계가 어디 있지?”였다. 시계는 그의 예술세계이자 정신세계를 상징하는 달리의 대체 상징제였다. 그가 찾는 잃어버린 시계는 갈라가 아닐까, 사람들은 낯설고 기괴한 그의 그림을 처음 접하고 약물중독이 아닌가 의심했지만 그는 “난 마약 따위는 안 해, 내가 마약인걸”이라며 마약에 자신감을 드러냈으며 담뱃갑에 수염을 넣고 다니며 사람들에게 “수염 하실래요?”라고 장난을 치기도 했다.
달리는 츄파춥스의 로고를 디자인한 사람이다. 1969년 달리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었던 츄파춥스 사장과 커피를 마시던 중 그자리에서 냅킨 위에 빠르게 스케치를 해서 로고 디자인을 그 넘겨준 것. 이후 그 로고는 1988년까지 사용되다 리뉴얼되어 현재의 디자인으로 변경되었지만 기본적인 레이아웃과 폰트는 거의 바뀌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로고가 꼭 포장지 상단에 위치해야 한다”고 섬세하게 코치한 덕분에 스페인 지방의 평범한 막대사탕은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사탕이 되었다.

디즈니사와 단편 애니메이션을 만들었고 보석과 가구 제품을 디자인, 청바지 브랜드 갭 광고 디자인, 초콜릿 광고모델로 출연한 적도 있다. 1950년에는 크리스찬 디올과 함께 미래지향적인 패션을 소개했고 타로카드도 제작했으며, 평생 사랑한 뮤즈, 갈라의 이름을 딴 《갈라의 만찬들(Les Diners de Gala)》이라는 요리책을 펴낸 적도 있다.
에피소드로 달리에게 자식은 없었다고 알려졌다. 그러다가 2017년 7월 난데없이 61세인 빌라 아벨 마르티네즈라는 여성이 본인이 달리의 딸이라고 주장하며 3700억이 넘는 달리 재산(사회단체에 속해져있다고)의 상당수 상속을 요구하고 나섰다.
결국, 논란 끝에 28년만에 묘지가 파헤쳐 피부와 손톱, 뼈에서 DNA 샘플이 채취하여 DNA 조사를 하게 되었으나 분석 결과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법원은 친자 소송을 기각하고 묘지 발굴 비용을 지불하라고 명령하였다.
달리 재단은 이에 대해 고인을 모독한 사기극이 끝났다라고 자평하였다. 판결 직후 빌라 아벨은 항소하였으나, 3년 정도 지난 2020년 5월 마드리드 법원에서 이를 기각되었다.
달리가 돈을 얼마나 많이 벌었고 남겨 놓았는지 추정되는 부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