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그너의 두 번째 영감의 원천은 비단 상인 오토 폰 베젠동크의 아내이자 시인인 마틸데 베젠동크였다. 그녀는 미나가 발견한 연애 편지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아그네스 마틸데 루케마이어(Agnes Mathilde Luckemeyer)는 1828년 독일 엘버펠트(Elberfeld)에서 태어났다. 20살이던 1848년, 그녀는 비단 상인 오토 베젠동크(Otto Wesendonck)와 결혼했다.
바그너와 베젠동크 부부는 1852년 취리히에서 처음 만났다. 마틸드의 남편 오토는 바그너의 음악에 열렬한 찬사를 보내는 팬이었고, 바그너를 위해 자신의 땅에 작은 별장을 마련해 주며 후원했다.
1. 바그너의 연인이 된 마틸데 베젠동크 부인
그러나 바그너(Wilhelm Richard Wagner,1813~1883)는 1857년까지 마틸데에게 푹 빠져버렸다. 그녀가 그의 애정을 어느 정도로 받아들였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마틸드는 바그너 때문에 자신의 결혼이 위험에 빠질 생각은 없었다.
따라서 바그너와의 관계가 남편이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의도로 그녀의 남편에게 바그너와 만나는 사실과 목적 등을 계속 알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애정 행각은 바그너가 트리스탄 기사와 귀부인 이졸데의 사랑 이야기를 쓴 <트리스탄과 이졸데> 작업을 시작하게 했다.
이러한 불편한 애정 행각은 1858년에 미나가 바그너가 마틸데에게 보내는 편지를 보게 되면서 막을 내렸다.
바그너와 마틸데 베젠동크의 관계, 특히 이성적으로 어떤 사이였는지는 바그너를 연구하는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문제로 남아 있다.
미나는 바그너가 마틸데에게 유혹당했다고 생각했고, 그 후의 편지에서 그녀를 “저 더러운 여자”라고 표현하며 노골적으로 바그너를 압박했다. 미나는 바그너의 애정 행각에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으며 심장병까지 얻었고, 이는 바그너와 마틸데의 사이에 곤란한 상황을 초래했다.
그리고 바그너는 마틸드의 남편 오토가 마련해 준 별장에서 더 이상 지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결국 바그너는 취리히를 떠나 베니스로 향했다. 마틸드는 자서전적 회고록에서 나중에 바그너가 취리히에 머물렀던 것에 대해 썼지만, 미나와의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 즈음, 바그너는 또 다른 애정 행각을 벌이게 되는데, 이번에는 바그너의 가장 큰 후원자이자 <트리스탄> 초연의 지휘자였던 한스 폰 뷜로의 아내인 코지마 폰 뷜로였다.
2. 바그너의 계속된 유부녀와의 만남, 코지마 뵐로
프란체스카 코지마(Francesca Gaetana Cosima, 1837~1930)는 음악가 프란츠 리스트와 유부녀인 마리 다구(Marie d’Agoult)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로, 바그너보다 24살이나 어렸다.
같은 음악가인 리스트는 바그너와 친분이 있었지만, 그의 딸이 바그너를 만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지마는 1865년 4월에 바그너의 사생아를 낳았고, 이름을 이졸데라고 지었다. 바그너는 이졸데의 가톨릭 세례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두 사람의 부적절한 애정 행각은 뮌헨에서 추문으로 떠돌았고, 설상가상으로 바그너의 왕에 대한 영향력을 의심하던 뮌헨의 왕궁 일원 사이에서 손가락질 받는 인물이 되었다.
1868년 10월, 코지마는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한스 폰 뷜로는 처음에는 이에 절대 동의하지 않았으나, 코지마가 끈질기게 설득하여 결국 1870년 7월 이혼하게 된다.
이혼 후 한스 폰 뷜로는 바그너와 코지마 사이에 거리를 두었고, 그는 더 이상 바그너와 관계를 갖지 않기 위해 재정적 후원도 끊어 버렸다.
한스 폰 뷜로와 코지마의 이혼이 법원에서 마무리되자마자 한 달 후, 바그너와 코지마는 결혼했다. 바그너는 결혼식을 주변에 미리 알리지 않았고, 나중에 신문을 통해 결혼 사실만을 발표했다.
이렇게 코지마는 바그너의 두 번째 부인이 되었고, 바그너와의 만남을 리스트만큼이나 반대했던 코지마의 어머니인 마리 다구도 충격에 빠졌다.
마리 다구는 딸의 행위를 비난했고, 이에 대해 코지마도 어머니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876년 3월 마리 다구의 사망 소식을 들은 코지마는 베를린에 있었으나 장례식에 참석하지도 않았다.
이후 코지마는 딸 다니엘라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해 준 여자에 대한 슬픔 외에는 내가 할 일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고 소감을 밝혔다는 전해진다. 그녀의 어머니 마리 다구에 대한 반대가 마음의 상처가 되었던 것이다.

코지마는 바그너와 함께 독일의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을 바그너의 무대 작품들을 위한 쇼케이스로 설립하는 등 바그너의 음악 활동을 도왔다.
바그너가 죽은 후, 코지마는 바그너의 음악과 철학을 홍보하는 데 여생을 바쳤다. 후에 음악 평론가들은 코지마를 바그너의 후기 작품, 특히 <파르지팔>의 주요 영감을 준 공로를 인정했다.
바그너는 반유대주의와 히틀러가 그의 음악을 나치즘을 위한 음악으로 활용한 것 때문에 후대에 좋지 않은 이미지를 남겼다. 그러나 바그너는 본인만의 음악을 위한 예술적 통제가 가능한 극장을 갖고 싶어 했다.
바그너는 독일을 대표하는 음악가 중 한 명으로, 독일 국민을 위한 음악 축제인 바이로이트 축제를 만든 것으로 유명하다.
바그너는 1870년 코지마의 조언에 따라 1873년 최초의 바이로이트 극장을 만들고 축제를 하겠다는 발표를 한다. 1874년 전체 프로젝트가 무산될 위기에 처했으나 왕의 도움으로 극장은 1875년에 완공되었고, 축제는 다음 해 8월 13일부터 30일까지 성공적으로 마치게 된다.
축제가 끝난 후 바그너와 코지마는 아이들과 함께 베니스로 떠났고, 그곳에서 12월까지 머물렀으나 이 축제는 바그너에게 재정적으로 큰 적자를 가져다주게 된다.
코지마와의 결혼 생활은 바그너의 생애 마지막까지 지속되었으며, 그들 사이에서 딸 에바와 아들 지크프리트가 태어났다.
남편 바그너가 죽은 후, 코지마는 1906년까지 바이로이트 음악제를 계속 주선하며 작품의 재연에 힘썼다. 또한 상연하는 작품을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으로 한정한 것도 그녀의 의향에 따른 것이다.
코지마는 축제 주선의 자리를 아들 지크프리트에게 물려준 뒤에도 독일 음악계에 오랜 영향력을 남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