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헬름 리하르트 바그너(Wilhelm Richard Wagner, 1813~1883)는 독일 오페라의 대표적인 작곡가이자 극작가, 연출가, 지휘자, 음악 비평가 및 저술가이다.
19세기 유럽의 음악과 문화 전반에 걸쳐 독보적인 예술가 중 한 명인 바그너는 바람둥이로 알려져 있으며, 그의 삶에는 많은 여성이 있었다.
첫 번째 부인 미나 플래너, 그리고 바그너가 좋아했지만 이루어지지 못한 오토 폰 베젠돈크의 아내 마틸드 루케마이어 베젠돈크, 세 번째 여인은 음악가 프란츠 리스트와 마리 다구사이의 사생아인 프란체스카 코지마이다.
결국 코지마는 아버지 리스트의 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유부녀의 신분으로 바그너와 애정 행각을 벌이다 사생아 딸을 낳고 본 남편과 이혼하여 바그너의 두 번째 아내가 된다.
이제 바람둥이 바그너의 첫 번째 아내, 미나 플래너와의 러브스토리 속으로 들어가 보자.
1. 바그너의 첫 번째 부인, 미나 플래너
바그너는 1836년 11월 24일 “미나”라고 불리는 여배우 크리스티네 빌헬미네 플래너(Christine Wilhelmine “Minna” Planer, 1809~1866)와 결혼했다. 미나 플래너는 작센 왕국 외더란에서 육군 트럼펫 연주자 고텔프 플래너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가난한 가정환경에서 자랐고, 빼어난 미모 때문에 15살 때 왕실 색슨 군대 근위대의 대장인 루돌프 폰 아인시델에 의해 유혹당했으며, 아인시델은 그녀를 임신시킨 후 버렸다.
어린 나이에 사생아 딸을 가진 미나와 그녀의 부모는 어린 딸의 임신 사실을 숨기기 위해 시골 친척들에게 보내졌다. 이듬해 태어난 미나의 딸 나탈리(애칭 “네티”)는 미나의 여동생으로 키워졌다.
미나는 빼어난 미모 덕분에 많은 독일 극단들의 부름을 받았고, 여성 청소년 배우로서 비극 무대에서 주인공 역할을 훌륭히 소화하며 대중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그녀의 신체적인 매력은 남자들로부터 많은 청혼을 받게 만들었다. 한 구혼자는 미나에게 “자연이 당신을 창조했을 때, 당신은 모든 틀을 깼고 창조주는 더 이상 아름다운 이미지를 만들지 않아도 되었을지 모릅니다”라는 편지를 썼다. 이는 미나의 아름다움을 잘 표현해준다.
1834년, 25살이던 미나는 극단 단원으로 지방 공연에 출연했다. 마침 바그너가 그곳에 묵을 숙소를 찾던 중 우연히 미나를 만났고, 21살의 바그너는 그녀의 미모에 한눈에 반했다.
미나의 매력에 빠진 바그너는 마치 폭풍처럼 미나에게 들이댔고, 그해 10월 집으로 돌아왔을 때 즈음에는 두 사람은 연인 관계가 되었다. 그러나 미나의 미모에 반해 많은 구혼자들이 몰려들어 미나는 구혼자들에게 계속 쫓기며 시달렸다. 바그너는 미나를 다른 사람에게 뺏길 수 없었던 나머지 자신과 미나는 이미 약혼을 했다고 거짓말로 주변에 알리며 주위를 따돌렸다.
그런 상황 속에서 미나를 차지한 바그너는 질투심이 많고 소유욕도 강했으며 성격도 만만치 않았다. 순하디 순한 미나와 자주 말다툼을 하였고, 그러한 다툼의 종말은 대개 마음 약한 미나가 눈물을 흘리며 양보하는 경우가 많았다.
1835년 11월, 바그너에게 불만이 많았던 미나는 소속 극단의 독단적인 행위에도 불만이 쌓여 극단을 옮기기로 결심하고 베를린에 있는 극단으로 갑자기 떠나버렸다. 갑작스런 미나의 행동에 당황한 바그너는 베를린으로 무작정 찾아가 결혼해 달라고 애원했다.
바그너의 간절한 애원에 결국 미나는 예전의 연인 관계 복원에 동의했다. 그러나 생활은 궁핍했다. 바그너는 베를린 악단의 부지휘자로서 자질구레한 자리에 있었고, 둘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조촐한 생활을 이어갔다.
어려운 상황임에도 1836년 11월 26일, 바그너와 미나는 트라그하임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미나는 바그너의 아내가 되는 것이 그녀가 갈망했던 결혼생활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선 경제적으로 어려웠고, 바그너와는 사랑과 존경심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그너의 상식을 벗어난 성격은 미나를 무척 힘들게 했다. 심지어 결혼식에 참석한 목사 앞에서도 서로 말다툼을 벌일 정도였다.
2. 구차한 도피생활, 바그너 부부
돈벌이가 시원찮은 바그너는 씀씀이가 헤퍼 계속해서 빚을 졌다. 바그너의 결혼 전에도 빚이 많았고, 씀씀이까지 헤펐으니 미나는 빚쟁이들에게 자주 독촉을 받아야 했다.
바그너의 보잘것없는 음악가 지위는 적은 돈을 받는 데 만족해야 했고, 생계 부양자는 미나가 맡았다. 그나마 미나의 뛰어난 미모와 연기력 덕분에 무대에서 지속적인 인기를 끌 수 있었다.
경제력도 부족하고 성격까지 괴팍한 바그너에게 미나는 불만이 많았다. 게다가 그녀의 탁월한 미모 때문에 많은 남성들로부터 유혹을 받았지만, 바그너의 관심이 낮았고 미나의 의지가 약했기 때문에 이를 뿌리치기 어려웠다.
급기야 미나는 1837년 5월 31일 디트리히라는 지역 사업가와 함께 미나의 딸 나탈리를 데리고 바그너로부터 도망치기에 이른다.
깜짝 놀란 바그너는 미나를 찾아 여기저기 수소문했지만, 결국 드레스덴에 있는 미나의 부모님 집에서 그녀를 찾았다.
바그너는 미나에게 자신에게 돌아와 달라고 간청하며 읍소했다. 마지못해 미나는 마음을 바꾸고 화해했다.
그해 10월, 바그너가 리가에서 지역 오페라단 음악 감독직을 겨우 맡았으나 생활 형편은 쉽게 나아지지 않았다. 두 부부는 1839년까지도 많은 빚을 지며 힘든 생활을 하게 되었다.
빚 독촉에 시달려 어쩔 수 없이 리가를 떠났지만, 그들의 빚은 남은 생애 동안 계속 따라다녔다.
이 같은 도주 행각 동안, 그들은 영국으로 가는 항로에서 폭풍우를 만나 죽을 고비를 넘겼다. 이 경험은 바그너가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을 작곡하는 데 영감을 주었다. 다시 파리로 돌아온 부부는 파리에서 여러 해를 보냈고, 바그너는 그곳에서 가사를 쓰고 다른 작곡가의 오페라를 편곡하는 것으로 생계를 이었다.
그들의 구차한 삶에도 불구하고 바그너는 빚 때문에 결국 투옥되었다. 미나는 남편을 석방하기 위해 파리에 있는 독일 친구들에게 돈을 구걸해야 할 정도로 그들의 삶은 어려웠다.
1842년 4월, 바그너 부부가 파리를 떠날 수 있게 된 것은 드레스덴에서 바그너가 왕립악단의 카펠마이스터(음악감독)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미나는 바라던 약간의 재정적 안정과 사회적 지위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바그너가 1849년 5월, 범슬라브주의와 무정부주의 운동인 드레스덴 봉기에 연루되면서 체포 영장이 발부되었고, 위험을 느낀 바그너는 취리히로 도망쳤다. 미나는 안정적으로 살고 있다고 한숨을 돌리고 있던 터라 바그너의 무책임한 행동에 몹시 화가 났다. 이후 그들의 관계는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냉각되었다.
미나는 스위스의 취리히를 작은 시골 도시로 여겼고, 바그너가 안정된 소득을 제공하는 카펠마이스터라는 사회적 지위를 잃은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해 8월에야 미나는 취리히에서 바그너와 다시 합류하기로 동의했지만, 그들의 관계는 냉랭해졌고 추구하는 방향도 완전히 달라졌다.
더욱이 미나는 지휘자로서의 바그너의 작품은 이해할 수 있었지만, 점점 미나가 좋아하지 않고 이해하기 싫은 바그너의 오페라 작품 활동을 하는 것을 보며 마음이 완전히 돌아섰다.
그러나 미나는 예전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던 젊은 시절의 그녀가 아니었다. 이미 많은 나이가 들어 무대에서 일할 수 없어 바그너에게 묶여 있었다.
취리히에서 바그너와 합류하기 전, 마음은 없지만 바그너의 마음을 다시 얻고자 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결국 남편의 노예가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고, 이런 두려움은 큰 스트레스로 작용했다. 이때부터 미나는 많은 스트레스로 심장병의 징후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나로부터 마음이 떠난 바그너는 이미 결혼한 21살의 제시 로쏘와 불륜 관계를 맺으며, 1850년에는 극동으로 도망가기로 계획하고 제시와 함께 미나를 떠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바그너의 이러한 비겁한 행동 계획을 눈치챈 미나는 제시의 어머니와 함께 제시를 설득해 이 계획을 중단하게 하고 포기하게 했다.
머쓱한 바그너는 결국 미나에게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들의 관계는 한동안 원래의 열정을 되찾은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본색을 숨기지 못하는 바그너가 1857년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작업하는 동안 유부녀 마틸드 베센돈크와의 관계는 미나와 바그너 사이에 최종적으로 갈라서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1858년 4월, 미나가 바그너로부터 마틸드에게 보낸 편지를 발견한 후, 미나는 그들을 간통했다고 비난했고, 바그너는 미나가 그의 편지에 “독단적인 해석”을 했다고 주장하며 그것을 부인했다.
미나는 바그너가 마틸드에게 유혹당했다고 생각하며, 그 후의 편지에서 그녀를 “저 더러운 여자”라고 불렀다. 이러한 해명에도 불구하고, 바그너와 미나는 결국 헤어졌다. 그러나 바그너는 미나의 악화된 심장 상태를 치료하기 위해 베니스로 함께 여행을 가주기로 배려했다.
미나와 바그너는 다시 함께 살지 않았지만 이혼하지도 않았다. 미나는 남은 생애 동안 바그너의 재정 지원을 받으며 연명했지만 결국 1866년 드레스덴에서 심장 마비로 사망했다.
미나를 버리고 만난 여인 마틸드 베센돈크와 바그너에 필적하는 바람둥이 음악가 프란츠 리스트의 사생아인 코지마와의 사랑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다루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