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칼라스의 연인(2/2), 선박왕 오나시스

마리아 칼라스와 선박왕 오나시스의 드라마틱한 이야기

1957년, 오페라의 여왕 마리아 칼라스(Maria Callas, 1923~1977)는 그리스의 선박왕 아리스토텔레스 오나시스를 만나면서 인생의 새로운 막을 열었다. 남편 메니기니와의 갈등이 깊어지던 중, 칼라스는 오나시스와의 만남으로 인해 더욱 복잡한 상황에 빠지게 된 것이다.

칼라스는 오나시스가 선상에서 벌이는 화려하게 벌거벗고 즐기는 향락의 문화를 알게 되었고 이에 매료되어 있었다.

1. 마리아 칼라스가 끼친 오페라계의 충격

1958년 5월, 칼라스는 밀라노 라 스칼라 가극장의 총감독 안토니오 기링겔리와의 충돌 후, 더 이상 스칼라좌 무대에 서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계약을 파기하며 충격을 주었다.

같은 해 11월 6일,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총감독 루돌프 빙은 이에 맞서 칼라스에게 계약 해지를 통보했다.

이후 칼라스는 미국 댈러스 오페라와 계약을 맺었지만, 이는 밀라노 스칼라좌, 뉴욕 메트, 빈 국립 가극장 등 권위 있는 극장에서 칼라스가 모두 퇴출된 후의 일이었다. 이미 칼라스의 마음은 오나스시의 화려한 생활에 마음이 가 있었으며 오페라는 안중에 없었다.

칼라스는 댈러스 오페라단에서 잠시 반짝 흥행을 거두었지만, 댈러스는 클래식 불모지였기에 칼라스는 점차 대중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게 된다.

마리아 칼라스의 사진 이미지

2. 유람선에서 온 사나이 오나시스의 유혹

1959년 8월, 오나시스는 자신의 호화 유람선 크리스티나호에 칼라스 부부를 초청했다. 크리스티나호는 오나시스가 수 많은 여인들을 유혹하는 곳이었고, 칼라스는 그곳에서의 향락적인 분위기에 더 더욱 매료되었다.

유람선에서 내린 직후, 칼라스는 남편과의 이별을 결심하고 오나시스와 동거를 시작했다. 1959년 9월, 이들의 관계는 이탈리아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 소크라테스 오나시스(Aristotle Socrates Onassis,1906~1975)는 그리스와 아르헨티나의 전설적인 사업가였다.

1923년, 젊은 오나시스는 아르헨티나로 이주하여 담배 상인으로서의 첫발을 내디뎠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그는 선박 소유주로 변신하여 해운업계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세계 최대의 민간 선박 함대를 소유하며, 부와 명예를 동시에 거머쥐며 그 시절 가장 부유하고 유명한 사업가 중 하나로 손꼽히는 입지전적인 인물이 되었다.

3. 오나시스와 칼라스의 화려한 생활과 갈등

이런 입지전적인 부유한 사업가, 오나시스와 동거하게 된 칼라스는 무대에서 잠정 은퇴하고, 요트와 제트기를 타며 화려한 상류층 생활을 즐겼다.

그러나 오나시스는 칼라스와의 결혼을 계속 미루었고, 칼라스가 임신했을 때는 낙태를 강요하기까지 했다. 결국 칼라스는 아기를 낙태시키고 말았다. 오나시스가 칼라스와의 관계의 거리를 느끼게하는 대목이다.

노래하는 요정, 마리아 칼라스의 이미지 사진

오나시스와의 동거 생활은 칼라스에게 실망을 안겼다. 오나시스는 칼라스에게 강아지 두 마리를 선물한 것 외에는 돈을 쓰지 않았다. 칼라스는 화려한 결혼을 꿈꿨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4. 재기를 꿈꾸는 마리아 칼라스

1961년부터 칼라스는 EMI에서 음반 녹음 활동을 재개했다. 비록 목소리가 예전 같지 않았지만, 칼라스의 이름값 덕분에 음반 판매량은 보장되었다.

1963년, 오나시스는 미국 대통령의 영부인이었던 재클린 케네디와 그녀의 여동생 리 라지윌에게 눈길을 돌리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칼라스와 오나시스의 관계는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오나시스는 칼라스에게 했던 것과 동일한 방법으로 재클린 자매를 유혹했으며, 오나시스는 자신의 자유롭게 향락을 즐기기 위해 1963년 말에서 1964년 초 사이에 칼라스를 떠나게 된다.

오나시스의 집을 떠난 칼라스는 파리에 위치한 아파트로 이사했다. 그렇다고 그들의 만남이 끝이 난 것은 아니었다.

마리아 칼라스와 오나시스가 유람선에 함께 있는 모습의 사진

파리는 오나시스가 보유한 여러 자택 중 하나가 있었던 도시로, 유명인들의 사생활에 무관심한 대중 덕분에 칼라스와 오나시스가 다시 만남을 갖기 좋은 장소였다.

1964년, 칼라스는 연출가 제피렐리와 함께 런던 코벤트 가든 오페라에서 ‘토스카’로 무대에 복귀했다. 팬들의 환호와 흥행에도 불구하고 평론가들의 평은 엇갈렸다.

특히 1965년 7월 5일, 코벤트 가든에서의 마지막 ‘토스카’ 공연은 원래 예정된 5회의 공연 중 단 한 번만 열리고 나머지는 취소되어 많은 이들을 실망시켰다.

칼라스는 오페라 무대에서 은퇴할 생각은 없었지만, 이후에도 여러 시도를 했으나 무대에 다시 서지 못했다.

1966년, 칼라스는 오나시스와 결혼을 희망하며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고 그리스 국적을 취득했다. 그리스 법에 따라 메네기니와의 결혼이 무효화되었지만, 오나시스는 결국 그녀와 결혼하지 않았다.

1968년 5월, 칼라스는 ‘라 트라비아타’ 음반 녹음을 시도했으나, 오나시스와의 관계 때문에 중단되었다.

5. 오나시스와 재클린 케네디의 깊은 관계와 결별

아마 이때 칼라스는 오나시스와 재클린의 깊은 관계를 알아챘을 것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은 그해 10월, 오나시스는 재클린 케네디와 결혼식을 올리며 칼라스와의 관계는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다.

재클린과 결혼하는 오나시스

1971년, 오나시스와 재클린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마리아 칼라스와 오나시스는 다시 만남을 가졌다. 그들의 재회는 마치 운명 같았다.

1972년, 칼라스는 뉴욕의 줄리어드에서 진행하던 마스터클래스를 중단하고 파리로 돌아왔다. 이는 오나시스와 재클린의 관계가 파탄나고 오나시스가 뉴욕을 떠난 시기와 일치한다. 마치 서로를 향한 그들의 마음이 다시금 불타오른 듯했다.

1973년, 칼라스는 테너 주세페 디 스테파노와 함께 세계 순회 투어를 개최했다. 두 사람은 성악가로서의 전성기를 지났지만, 여전히 그들의 이름은 관객들을 끌어모았다. 공연은 매진되었고, 그들의 무대는 여전히 열정적이었다.

그러나 오나시스가 아들의 사망으로 큰 충격을 받았고, 그의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면서 투어는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6. 오나시스의 사망과 빈털터리가 된 칼라스의 말년

1975년 3월 15일, 오나시스가 사망하며 칼라스는 큰 충격에 빠졌다. 오나시스는 재클린과 이혼하지 않았기에 칼라스는 오나시스로부터 아무것도 물려받지 못했다.

오직 오나시스의 여동생이 칼라스에게 오나시스의 편지들을 돌려주었을 뿐이었다. 그 편지들은 칼라스에게 남겨진 마지막 유산이 되고 말았다.

말년의 칼라스는 파리의 아파트에 고립된 채 생활했다. 가족들과의 트러블, 남편 조반니 메네기니와의 결별, 그리고 오나시스의 사망은 그녀를 완전히 고립된 삶으로 내몰았다.

우울증과 불면증을 이겨내기 위해 약물을 남용했고, 이는 그녀의 건강을 더욱 악화시켰다. 칼라스는 젊은 시절의 음반을 들으며 “그래… 그땐 넌 참 잘했어”라고 중얼거리는 것이 유일한 위안이었을 뿐이었다.

결국, 1977년 9월 16일 아침, 칼라스는 급성 심근경색으로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시신은 그리스 정교 의식에 따라 장례 후 화장되어 페르 라셰즈 묘지의 납골당에 안장되었다.

말년의 마리아 칼라스 이미지 사진

그러나 그녀의 유골함은 극성팬들에 의해 도난 시도가 끊이지 않았고, 결국 그녀의 유골은 에게해에 뿌려졌다.

칼라스와 오나시스의 얽히고설킨 인생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그들의 이야기는 마치 오페라의 한 장면처럼 극적이고 복잡했으며, 그 속에서 칼라스는 끝내 사랑과 무대, 어느 하나도 완전히 소유할 수는 없었다.

그들의 사랑의 결말은 비극적이었지만, 그만큼이나 강렬하게 세간의 눈길을 끌은 사랑이었기에 잊을 수 없는 것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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