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 샤갈의 연인, 버지니아 해거드, 바바 브로드스키
마르크 샤갈[ Marc Chagall, 1887. 7. 7. ~ 1985. 3. 28. ]은 당시 러시아의 벨라루스 출신으로 프랑스에서 주로 활동했던 화가다. 그는 강렬한 색채로 독창적이고 환상적인 작품을 제작하였는데, 중력을 벗어난 인간이나 동물이 자유롭게 하늘을 날아가는 신화를 표현했다.
샤갈은 22살 때, 그의 첫사랑 벨라를 만났다. 그녀와는 30년이라는 오랜 기간 동안 함께 생을 같이했지만 급작스럽게 사망하자, 두 번째와 세 번째 사랑을 만난다.
지난 1편에서는 첫사랑, 벨라 로젠벨트와 찾아봤고 이번 편에서는 못다 한 스토리와 샤갈의 노년과 마지막을 함께하는 두 번째와 세 번째 로맨스를 찾아 간다.
그는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 이후, 모스크바와 그 근교에서 일하다가 가족과 함께 1923년 다시 파리에서 화가로서 활동한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독일에게 점령당한 프랑스를 극적으로 탈출하여 미국으로 건너가 7년 동안 뉴욕에서 살다가 1948년 프랑스로 돌아왔다.
샤갈은 1927년에 프랑스 미술계에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고 수십 년 동안 그는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유대인 예술가로 존경받았다. 그리고 그는 유럽 모더니스트 예술가 1세대의 마지막 생존자로 여겨졌다.
벨라 로젠벨트와 이별 이후, 샤갈은 두 명의 여인과 로맨스가 있었다. 한 명은 사생아 아들을 낳았지만 사진작가와 결혼을 하며 떠났고, 다른 한 명은 샤갈이 사망할 때까지 그의 공식적인 아내가 되었다.
샤갈과 같은 예술가의 인생에서 이러한 여성들의 역할과 중요성은 여전히 논쟁의 대상이다. 그러나 이전 편에서 다룬 벨라로젠벨트는 샤갈에 있어 두 여성과 달리 사랑이라는 이미지가 선명하다.
1944년 9월 벨라는 갑작스럽게 사망했는데, 샤갈은 슬픔에 잠겨 9개월 동안 작품활동을 중단했다. 다시 그림을 그렸을 때 그의 그림은 벨라의 기억을 기리는 작품이었으며, 이때부터 푸른색 사용이 급격히 늘었다. 서정적 슬픔의 표현을 파란색으로 했고, 이는 “샤갈의 블루”라는 대명사가 되었다.
1. 두 번째 사랑, 버지니아 해거드
홀로 된 1년 동안 딸 아이다와 사위 미셸과 함께 지낸 후, 이듬해 버지니아 해거드 맥닐(Virginia Haggard McNeil.1915-2006)이라는 여성을 비서로 채용하였다. 그리고 곧 그들은 연인관계가 되었다.
버지니아 해거드는 전 미국 주재 영국 영사의 딸이었다. 그들이 만났을 때 버지니아는 30세, 샤갈은 58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였고, 그녀는 데이비드 맥닐과 불행한 결혼 생활을 하던 유부녀였지만 샤갈은 젊은 여성의 세련된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다.
회오리바람 같은 버지니아와의 로맨스는 벨라를 잃은 후 침체에 빠졌던 샤갈에게 활기를 불어넣어 줬고, 이 시기는 샤갈의 예술경력에 있어 가장 성공적인 시기 중 하나가 되었다. 그들은 1946년에는 데이비드 맥닐(David )이라는 아이를 낳았다.
당시 버지니아는 아직 남편 맥닐과 이혼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데이비드에게는 샤갈이 아닌 맥닐의 성이 주어졌다. 그리고 그녀는 후에 맥닐과의 사이에서도 딸, 진(Jean)을 낳았다.
샤갈은 버지니아와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는 유럽 전역을 여행했고, 당시 프랑스의 예술적 중심지가 된, 남부 지중해 해안도시, 코트다쥐르에서 살기로 했다. 앙리마티스(Matisse)와 피카소(Picasso)도 인근에 살았다. 이들이 인근에 산 덕분에 때로는 함께 일했지만 그들의 작업 성격이 너무 뚜렷하게 달랐던 때문인지 오래가지 못했다. 그들 사이에는 예술적 경쟁이 있었던 원인도 한 몫했다.
둘의 관계는 7년 동안 지속되었다. 1951년, 버지니아는 불행했던 맥닐과 결혼생활을 마무리하고 이혼했지만 결혼 상대는 샤갈이 아니었다. 버지니아는 샤갈과 헤어지며 과거에 샤갈이 준 18점을 작품을 포기하고 자신과 관련된 두 점만 가지고 아들과 함께 샤갈을 떠난다.
버지니아는 샤갈보다 더 나이가 많은 벨기에 사진작가 찰스 레이렌스(Charles Leirens)와 만났다. 해거드는 샤갈과 함께한 “풍요로운 7년”을 그녀의 책 《샤갈과 함께한 나의 삶, 1986》에서 회상했다. 그녀는 회고록에서는 샤갈에 대해 “그는 사랑을 그렸지만 실천하지는 않았다”라고 썼다.
버지니아는 1952년 4월, 찰스와 결혼한다. 그리고 전문 사진작가가 되었다.
버지니아는 벨기에로 이주하여 2006년 사망할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샤갈과 버지니아의 사생아, 데이비드 맥닐은 파리에서 가수이자 작곡가가 되었다.
2. 샤갈의 세 번째 연인, 영리한 바바 브로드스키
버지니아와 헤어진 샤갈은 혼자 살 수 없었다. 샤갈과 벨라의 외동딸, 아이다(Ida)는 1952년 1월 미술사학자 프란츠 마이어(Franz Meyer)와 결혼했는데, 아이다는 아버지가 버지니아와 헤어진 후, 외로워하는 것을 알고, 런던에서 성공적인 수공예 사업을 운영했던 러시아계 유대인 출신의 여성인 발렌티나(바바) 브로드스키를 소개했다.
발렌티나 브로드스키(Valentina “Vava”Brodsky Chagall, 1905~1993)는 샤갈의 비서가 되었고, 샤갈이 그녀와 결혼할 경우에 만, 비서로서 함께 하기로 서로 합의했다. 결국 결혼은 1952년 7월에 이루어졌다. 버지니아와 헤어진 후 3개월 만이었고, 일종의 계약 결혼이었다.
그들은 프랑스 프로방스에 남았다. 부부는 생 폴 드 방스 (Saint-Paul-de-Vence) 마을에 정착했다. 바바는 샤갈이 말년 30년 동안, 많은 작품활동을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다. 바바는 영리했고,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완벽한 여자였다.
바바는 샤갈의 사회생활과 계정을 관리하고, 그의 우편물을 검열하고, 대성당 창문에 스테인드 글라스디자인을 하도록 설득했다. 그녀는 샤갈을 유대인 예술가가 아닌 프랑스 예술가이자 특출한 예술가로 만들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유대예술과 거리를 두고자 유대언어인 이디시어 출판물도 접하지 못하도록 차단했다.
그리고, 사사건건 샤갈의 생활에 개입하는 샤갈의 딸, 아이다를 축출했다. 한동안 샤갈이 그의 딸과 가까워지려는 시도자체도 막았다.
바바는 이전의 계약결혼을 파기하고 자신에게 더 유리한 조건으로 샤갈과 재혼했다.
이와 같은 상황을 샤갈은 나중에 자신을 죄수라고 표현했지만, 감옥은 그가 즐기는 곳이었다. 그는 매일 그가 표현하는 감옥(?)에서 평화롭게 일했다. 샤갈은 그림을 그릴 때보다 더 행복했던 적이 없었다.
바바는 샤갈이 유능한 예술가의 재능을 외부에 알릴 수 있도록 큰 작품활동 할 수 있도록 했다. 샤갈의 예술에 대한 주요 공헌 중 하나는 스테인드 글라스 디자인 작업이었다.
1958년부터 1960년까지 메츠대성당, 1960년~1961년 까지는 예루살렘에 있는 히브리 대학의 하다사 메디컬 센터의 회당, 1964년 뉴욕 포칸티코힐스 연합교회, 1967년 스위스 취리히의 프라우뮌스터 교회, 1978년에는 독일 마인츠에 있는 성 슈테판 성당등 많은 스테인드 글라스 프로젝트를 맡아 디자인하여 설치했다.
특히, 1963년에는 장엄한 19세기 국립 기념건물인 파리 오페라 하우스(Palais Garnier)의 새로운 천장을 그려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천장화는 바바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의 결혼식 장면을 교묘하게 포함시키고,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는 유대인으로 표현했다. 이는 샤갈이 유대인인 까닭도 있지만, 이 프로젝트를 샤갈에게 맡기는 걸 반대했던 수많은 프랑스 반유대주의자들에게 일종의 답례(?)의 메시지를 준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1977년, 샤갈은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드뇌브 대십자 훈장을 받았고, 생존화가로 작품이 루브르 박물관에 영구전시되는 영광을 누렸다.
샤갈은 1985년, 생 폴 드방스에서 97세의 나이로, 영리하고 조직적인 바바의 감옥에서 죄수(?)로 사망했다.
발렌티나는 미망인이 되었고, 유태인 남편, 샤갈을 지역 내의 가톨릭 묘지에 묻었다. 그녀도 생 폴 드 방스에서 1993년 죽었고 남편과 함께의 묘지에 안장되었다. 미쉘은 바바의 남동생이다.
“샤갈의 모든 작품에서 관객의 관심을 끌고 사로잡은 것은 그의 색채였습니다.”
“샤갈은 가장 단순한 색상 사용으로 폭발적인 움직임의 생생한 인상을 주는 능력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1985년 프랑스에서 사망할 무렵, 유럽 모더니즘의 마지막 생존 거장이었다”
“그는 러시아 혁명의 부푼 희망과 실망을 직접 경험했고, 유럽 유대인의 거의 전멸을 목격했다. 그리고 그의 고향인 비테프스크는 240,000명의 인구 중 118명만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살았다.”
“입체파, 상징주의, 야수파의 예술 형식을 종합하고 야수파의 영향으로 초현실주의가 탄생했다”
“마티스가 죽으면 샤갈은 색이 실제로 무엇인지 이해하는 유일한 화가가 될 것이다” -파블로 피카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