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 샤갈의 연인,
마르크 샤갈[ Marc Chagall, 1887. 7. 7. ~ 1985. 3. 28. ]은 러시아 출신의 프랑스 화가다. 그는 신선하고 강렬한 색채로 독창적이고 상상력이 풍부한 환상적인 작품을 제작하였는데, 주제는 중력을 벗어난 영원의 사랑이었으며 인간이나 동물들, 특히 연인들은 자유롭게 하늘을 날아가는 사랑의 신화를 표현했다.
샤갈은 그림을 배워갈 무렵, 첫사랑 벨라를 만났다. 그녀와는 30년이라는 오랜 기간 동안 함께 생을 같이하다 벨라가 급작스럽게 사망하자, 두 번째와 세 번째 사랑을 만난다.
이번 편에서는 그의 첫사랑, 벨라 로젠벨트와 샤갈의 로맨스 스토리를 찾아 간다.
샤갈은 1887년 오늘날 벨라루스에 있는 비테프스크(Vitebsk) 근처의 가난한 유태인 가정에서 9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다.
러시아 제국 정부는 18세기 후반부터 제1차 세계 대전까지 샤갈과 같은 유태인을 오늘날의 우크라이나, 벨로루시, 폴란드, 리투아니아, 라트비아를 포함하는 지역의 정착지 내에 살도록 엄격히 제한했다.
또, 유태인은 정규 학교나 대학에 다닐 수 없었다. 도시 내에서의 이동까지도 제한되어 샤갈은 지역 안에 있는 유대인 종교 학교에서 초등 교육을 받았다. 그곳에서 히브리어와 성경을 공부했다.
샤갈이 13세가 되었을 때, 그의 어머니는 그를 일반 고등학교에 입학시키려고 했으나 그 학교에서는 유태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뇌물을 주며 샤갈을 고등학교에 입학시켰다.
샤갈은 학교 친구가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보고 그 친구에게 어떻게 그림을 배웠냐고 물었는데, 그 친구는 “도서관에 가서 책을 찾아봐, 네가 좋아하는 그림을 골라서 그냥 따라 그리면 돼”라고 대답했다. 그의 예술적 인생의 전환점이 된 계기였다. 그는 곧 책에서 이미지를 따라 그리기 시작했고 그 경험이 새롭고 흥미로워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샤갈이 어머니에게 화가가 되고 싶다고 했지만, 어머니는 화가라는 배고픈 직업에 반대했다. 그러나 결국 샤갈의 고집에 승복했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명문 미술 학교에 1906년 입학하여 2년 동안 공부했다. 1906년 당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 제국의 수도이자 국가 예술생활의 중심지였다.
샤갈은 1907년까지 그는 자연주의적 자화상과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으며, 1908년부터 1910년 까지는 미술학교에서 장식 예술 디자이너인 레옹 바크스트(Léon Bakst)의 제자로 무일푼 견습생의 신분이었다.
이 시기에 샤갈은 그의 여자친구 ‘테아 브라흐만’의 집에 놀러 갔을 때 그곳에서 운명적으로 벨라를 마주치면서 사랑은 시작되었다. 그 순간 여자친구 테야는 샤갈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1. 마르크 샤갈의 평생의 연인 벨라 로젠벨트
테아와 벨라는 오랜 친구였고 20세였다. 샤갈의 나이 22세 때의 일이다.
“어울리지 않게 등장하는 이 친구, 마치 다른 세계에서 온 것 같은, 감미로운 목소리는 나를 흥분시킨다. 나는 그녀의 새로운 세계에 들어갔고, 그녀의 세계는 영원한 것이 되었다”
” 그녀의 침묵은 나의 것이고, 그녀의 눈은 나의 것이다. 마치 우리가 오래전에 서로를 알고 있었고 그녀는 내 어린 시절, 현재, 그리고 미래의 나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그녀가 항상 나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처럼, 그리고 나는 이 사람이 내 아내가 될 사람이라는 것을 단박에 알았다.”샤갈은 그의 자서전에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를 이같이 표현했다.
“나는 감히 눈을 들어 그의 시선을 마주칠 수 없었다. 그의 눈은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파랬다. 마치 작은 배처럼 저절로 항해하는 것 같았으며 이상한 눈이었다.”라고 벨라는 회고록에 썼다.
샤갈은 벨라와의 운명적인 만남을 뒤로한 채 1910년까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머물렀고, 종종 비테프스크를 방문하여 벨라 로젠펠트를 만났다. 그해말 1910년 미술공부를 위해 프랑스 파리로 향했다.
샤갈의 사랑 벨라 로젠벨트( Bella Rosenfeld, 1889 – 1944)는 비체프스크에서 보석상을 하는 부유한 유태인 가정의 귀한 막내딸로 태어났다.
샤갈과 벨라는 유대인 정착 지역의 경계 외곽에 있는 도시 비체프스크에서 서로 보지는 못했지만 함께 성장했다. 비테프스크는(Viciebsk)는 인구의 절반 이상이 유태인에게 모여 사는 도시였다.
벨라는 가난한 예술가 샤갈과 사랑에 빠졌고 그에게 그녀의 모든 마음을 주었다. 그녀의 유일한 사람, 거칠고 곱슬곱슬한 곱슬머리 아래에서 이상하게 큰 눈을 내다보고 있는 그림 같은 젊은 멋진 남자, 샤갈은 내 남자이며 자신에게는 다른 남자는 평생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
샤갈이 그림공부를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파리로 떠난 뒤, 벨라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여름방학을 어머니와 함께 해외에서 보낸 후,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모스크바로 돌아왔다. 고등여과에 수강하는 학생의 절반 이상은 가난한 가정의 여학생들로, 어려운 가정생활이나 학습장애를 견디지 못했다.
몇몇은 학비를 감당할 돈이 없어 퇴학을 당했는데, 특히 유대교 신앙을 가진 소녀들이 심했다.
벨라는 모든 것을 견뎌냈다. 그리고 1913년 11월 기말고사에 합격했고, 1914년 2월에는 논문이 통과하여 이학 후보 학위도 받았다.그녀는 서두르지 않았고, 공부를 하며 샤갈에게 편지로 안부를 주고받으며, 샤갈이 고향 비체프스크로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샤갈은 아직 비테프스크에 머물고 있던 약혼녀 벨라를 그리워했고 그녀를 잃을까 봐 두려웠다, 어떡하든 벨라루스로 가서 벨라와 결혼한 후 그녀와 함께 파리로 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는 활발한 작품활동을 하였다. 이 시기의 작품에는 고향, 비테프스크의 풍물이 추억처럼 나타난다. 아마 벨라에 대한 그리움이 고향을 그리는 것으로 표현된 것이다. 이 그림들은 자신의 미술 세계를 한층 발전시키는 그림들이 되었다.
그의 그림은 독창성과 일관성을 유지하며 20세기 유럽화단의 가장 진보적인 흐름을 이었다.
활발한 그림작품활동으로 샤갈은 본인의 작품이 전시를 하게 되면 자신의 작품을 인정받고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생길 것으로 판단했다. 그는 베를린의 저명한 미술상으로부터 자신의 작품을 전시해 달라는 부탁을 했고, 마침내 샤갈은 40점의 유화와 160점의 구아슈, 수채화, 드로잉을 전시했다.
샤갈의 바람대로 전시회가 성공리에 끝났고, 그의 사랑, 벨라가 있는 고향, 비체프스크로 갔다. 그곳에서 벨라와 결혼할 수 있을 만큼의 시간만 머물고 파리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사랑에 몸 단 샤갈은 벨라 부모에게 자신이 딸에게 적합한 남편이 될 것이라고 허락받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벨라의 부모는 샤갈이 가난한 집안인데다 그의 화가라는 직업은 의심스러웠다. 그런데다 그림도 상식적이지 않고 이상했다. 유태인 모티브의 기발한 그림들처럼 진보적이고 독창적인 그의 그림들은 평범한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는 이상하게 보였던 것이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들로 결혼을 반대했는데, 이것들은 샤갈이 성공적인 예술가가 되는데 목표의식과 영감을 주게 되어 오히려 긍정적 모티베이션이 되었다.
그러나, 1914년 7월 1차세계 대전이 발발하였다. 샤갈은 결혼 후 파리로 돌아갈 계획을 세웠지만 러시아 국경이 무기한 폐쇄되었다. 파리로 가는 발이 묶였지만, 다음해 7월 25일, 꿈에그리던 벨라와 결혼을 했다.그리고 1년후 샤갈 부부는 외동딸 아이다(Ida)를 낳았다.
샤갈은 1915년부터 모스크바의 유명한 살롱에서 작품을 전시하기 시작했고, 모스크바에서 열린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의 전시회에서도 작품을 전시했다. 1916년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그림을 전시했다.
제정 러시아에서 유태인들이 예술계에 진입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하나는 유태인임을 부정하는 것과 다른 하나는 유태인임을 공개적으로 표현하는 것이었다. 샤갈은 후자를 택했다.
이러한 작품전시로, 유대인 샤갈의 그림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많은 부유한 수집가들이 그의 작품을 구입하기 시작했다. 잉크 그림으로 많은 이디시어(중동부 유럽에서 사용하는 유대언어) 책에 삽화를 그리기 시작하면서 샤갈은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샤갈의 나이 30세 때(1917년)의 일이다.
벨라는 그녀가 지금껏 학교에서 배우며 익혔던 모든 경력을 무시하고 수년 동안 남편과 딸에게 헌신했다. 성실한 학교생활과 성과를 거두었던 문학소녀인 벨라에게는 분명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샤갈 부부의 결혼 생활 초기에는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의 광적이고 발작적인 국제 정세와 분위기 속에서 생존을 위한 투쟁의 연속이라 할 수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1918년에 끝났지만, 러시아 혁명에 따른 국내 정세는 혼란이 계속되었고 기근이 퍼져 국민의 생활도 어려웠다.
샤갈부부는 더 편안하고 안정된 나라에서 자신의 예술을 발전시킬 수 있도록 프랑스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1923년 샤갈은 모스크바를 떠나 프랑스로 돌아왔다.
1924년에는 프랑스 북서부 브리타뉴를 여행하며, 1926년까지는 프랑스에 머물며 끊임없이 그림을 그렸으며 약 100여 점의 작품을 뉴욕의 라인하르트 갤러리에서 미국에서의 첫 전시회를 갖기도 했다.
이즈음, 샤갈의 그림에 관심이 많았던 그림상 볼라르는 1931년 샤갈에게 구약성경의 삽화를 의뢰했다. 앙브루아즈 볼라르(Ambroise Vollard, 1866– 1939)는 20세기 초 프랑스 현대 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딜러로 여겨지는 프랑스의 미술상이었다.
볼라드의 제안에 흥미가 끌린 샤갈은 프랑스에서도 충분히 프로젝트를 할 수 있었지만, 이를 핑계로 이스라엘에 가서 성지를 직접 경험하고자 했다. 샤갈은 두 달 동안 성지에 머물르며 여행을 즐기다, 성경 삽화에 대한 제안에 뛰어들었다. 집으로 돌아온 샤갈은 삽화에 대한 열정과 창의성으로 가득 차, 곧바로 성서에 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샤갈이 본격적인 성서 작업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1934년, 히틀러가 독일에서 권력을 잡았다. 곧바로 유대인을 탄압하는 반유대주의 법이 제정되었고, 독일 남부 다하우(Dachau)에 최초의 강제 수용소가 세워졌다.
이어 1937년 초에 독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던 약 2만 점의 예술작품이 히틀러의 나치정권에 의해 “퇴폐적”인 것이라며 압수되었다. 본격적인 나치즘의 서막이었다.
독일 언론은 과거 한때 샤갈의 작품을 열광하였지만, 히틀러의 새로운 독일은 유대인 샤갈의 예술을 조롱하면서 서구 문명에 대한 공격을 상징한다며 폄훼하기 시작했다.
2. 프랑스 나치정부의 유대인 탄압과 샤갈부부의 프랑스 탈출
독일은 1939년 9월 프랑스를 침공했다. 프랑스는 6주 만에 항복했고, 프랑스에는 친(親)독일정부인 비시(Vichy) 정부가 수립되었다.
샤갈 가족은 비시정부의 도움으로 프랑스에 남아 예술활동을 계속하였지만, 프랑스내에 있는 유태인들이 수집되어 독일 강제 수용소로 보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마침내 1940년 10월, 나치 점령군의 명령에 따라 유태인들이 공직과 학계에서 쫓겨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샤갈 부부는 자신들이 직면한 위험에 눈을 떴다.
유일한 피난처는 미국이었지만, 뉴욕으로 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미국 정부는 전쟁통의 유럽인들을 막기 위하여 감당하기 어려운 거액의 채권을 사도록 했기 때문이다.
1941년 4월, 샤갈과 벨라는 프랑스 시민권을 박탈당했다. 샤갈 가족은 마르세유의 호텔에 머물렀고, 그곳에서 다른 유태인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미국인 언론인 바리안 프라이(Varian Fry)와 마르세유 주재 미국영사는 유럽에서 미국으로 밀입국하는 샤갈을 포함한 예술가와 지식인들을 구출하는 작전을 펼쳤다.
빨리 행동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던, 딸 아이다(Ida)는 뉴욕 현대미술관의 알프레드 바(Alfred Barr)에게 부탁하여 미국이 추방해야 할 저명한 예술가 명단에 샤갈의 이름을 올렸다.
바리안 프라이는 프랑스 경찰에게 그들을 석방하라고 압력을 가했고, 경찰은 두 사람을 체포하여 심문을 하겠다고 협박까지 했지만 경찰이 굴복하여 우여곡절 끝에 샤갈과 벨라를 포함한 2,000명 이상의 사람은 죽을 고비를 넘긴다.
이들은 1941년 6월 23일 뉴욕에 도착했다. 독일이 소련을 침공한 바로 다음 날이었다.
샤갈은 뉴욕으로 온 후 죽을 고비를 넘긴 탓인지 정세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으며, 이런 관심은 십자가 처형과 전쟁 장면을 포함한 주제를 그린 그의 예술로 표현되었다. 그는 독일군이 자신이 자란 고향인 비테프스크를 파괴했다는 것과 나치 강제 수용소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알고 나서 몹시 괴로워했다.
1941년의 예술가들은 아직 샤갈의 예술을 이해하지 못했고, 심지어 좋아하지도 않았다. 이런 기조는 앙리 마티스의 아들이 샤갈의 전시회를 관리하게 되면서 서서히 그림이 이해되고 바뀌기 시작하게 되었고, 샤갈 부부도 안정을 찾았다.
벨라는 그동안 샤갈의 화가 활동을 내조하기 위해 오랫동안 글쓰기를 소홀히 했었다.
그러나 뉴욕에서 망명 생활을 하는 몇 년 동안 비테프스크에서의 어린 시절에 대한 서정적인 회고록, 불타는 불빛(Burning Lights)을 유대인 언어인 이디시어로 썼다.
3. 벨라의 갑작스러운 사망
지루하게 계속되던 2차 대전은 막바지로 흘러갔다. 연합군에 의해 노르망디상륙작전이 성공하고 1944년 8월 말, 파리가 드디어 해방되었다. 샤갈 부부는 고향 같은 파리의 좋은 소식을 듣고 프랑스로 곧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으로 휴가를 떠났다.
그러나 좋은 일도 잠시, 안타깝게도 벨라가 갑자기 병에 걸렸고, 다음날 지역 병원으로 데려갔지만 1944년 9월 2일 저녁 6시에 사망하고 만다. 당시 발표로는 인후염이라고 했는데, 지금은 항생제로 쉽게 치료할 수 있는 병이었다.
벨라의 딸 아이다는 항생제를 구해 엄마를 치료하고자 했으나 약을 가지고 도착했을 때 이미 벨라가 사망한 후였다. 그러나 공식 증거자료에 따르면 당뇨병이 벨라의 사망 원인이었다고 한다.
샤갈은 “벨라가 세상을 떠난 날, 천둥 번개가 치고 비가 계속 쏟아졌다. 주변과 내 눈이 어두워졌다”라고 썼다. 샤갈이 사랑한 유일한 사람, 그의 천사, 벨라 샤갈이 사망한 지 30일째 되는 날, 유대인 작가, 예술가 및 과학자위원회는 카네기 홀에서 샤갈가족과, 친구, 지인들 약 200명이 참석한 가운데 그녀를 추모하는 장례식을 개최했다.
장례식이 끝난 후에도 샤갈은 슬픔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벨라에 대한 게으름을 자책했고, 약 9개월 동안 슬픔에 잠겨 붓을 잡지 않았다.
러시아 혁명, 두 번의 세계전쟁, 가난과 부, 유대인 탄압으로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길 때, 그와 함께 했던 샤갈의 충실한 뮤즈이자 아내였던 벨라 로젠펠트는 30년 동안 샤갈과 모든걸 함께했다.
온화하고 똑똑하고 아름다운 벨라는 샤갈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고, 잘 이해했으며, 단 한 점의 그림도 그녀의 감정이입 없이는 완성되지 않았다. 작가 샤갈은 그의 긴 생애가 끝날 때까지 그녀를 숭배하고 그 누구보다 사랑했으며 그의 모든 그림에서 사랑의 상징인 천사로 그려졌다.
벨라 로젠펠드(Bella Rosenfeld)의 책 “불타는 빛(Burning Lights)”은 1946년에 출판되었고, 회고록의 두 번째 부분인 “첫 번째 만남(The First Meeting)”은 1년 후에 출판되었다.
샤갈은 벨라를 답한다.
“벨라는 누구를 닮았습니까? 아닙니다. 그녀는 누구와도 닮지 않았습니다. 벨라는 구름, 나무, 집과 함께 드빈스크강에 비친 비체프스크 산의 바슈냐-벨로치카입니다. 그녀는 사물, 사람, 풍경, 유대인의 명절, 꽃 등 이 모든 것이 그녀의 세계이고 그녀는 그것들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벨라가 샤갈의 전부였음의 증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