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치아노 파바로티의 연인(1/2), 아두아 베로니,마들린 르네

루치아노 파바로티의 연인, 아두아 베로니

루치아노 파바로티 (Luciano Pavarotti, 1935.10.12.-2007.9.6.)는 이탈리아가 자랑하는 모데나( Modena)출신의 세계적 테너가수다. 그의 크고 빼어난 고음은 엄청난 호소력으로 유명하며 많은 음반을 남겼다.

그는 플라시도 도밍고(Placido Domingo), 호세 카레라스(Jose Carreras)와 함께 ‘3대 테너(The Three Tenor)’로 활동한 적도 있다.

파바로티는 못 말리는 호색한이었다. 남녀 간의 사랑과 욕망을 주로 다룬 오페라의 가수로서 많은 이성파트너와 호흡을 맞추는 환경이어서 그런 행동을 할 기회가 많아서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와 결혼하여 35년이라는 결혼생활을 한 아두아 베로니는 매우 현명했다. 남편의 타고난 바람기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남편 옆에 있는 비서들과의 염문은 애써 눈감아주었다.

그러나 두번째 부인이 되는 니콜레타 만토바니와의 관계가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자 더 이상은 참지 않았다.

그는 평생 무수한 바람을 피웠다. 그의 평생의 사랑했던 여인들, 그의 연인을 만나보자.

1. 파바로티의 젖 남매 사이의 미렐라 프레니

파바로티의 연인을 이야기하기 전에 그의 소꿉친구이며 유명한 이탈리아 성악가인 소프라노 미렐라 프레니와의 인연을 그냥 지나가기에는 아쉬움이 있어 빼놓을 수 없다.

루치아노 파바로티와 미렐라 프레니의 이야기는 모데나의 작은 마을에서 시작되었다. 둘은 같은 유모의 젖을 먹고 자란 젖남매 사이였다. 그들의 어머니들, 잔나 아르첼리와 아델레 파바로티는 같은 담배공장에서 일하게 되어 친구사이였다. 당시 이탈리아의 지도자 무솔리니는 부녀의 노동력을 활용하기 위한다는 명분의 복지정책의 결과다,

1935년, 잔나 아르첼리는 딸 미렐라 프레니를 출산했다. 그러나 일 때문에 바쁜 그녀는 프레니를 동네 유모에게 맡겨야 했다.
같은 해 10월, 아델레 파바로티도 아들 루치아노 파바로티를 출산했다. 파바로티 역시 같은 유모에게 맡겨졌고, 이렇게 해서 프레니와 파바로티는 같은 유모의 젖을 먹고 함께 자랐다.

미렐라 프레니(Mirella Freni,1935. 2. 27. ~ 2020. 2. 10.)는 루치아노와 같은 이탈리아 모데나의 궁핍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발사였고 어머니는 몰락귀족이었다.

어린 시절, 둘은 같은 스승에게 성악을 배웠고, 세계적인 성악가로 성장하면서도 호흡을 맞추는 일이 많았다.

특히, 둘의 호흡은 오페라 ‘라 보엠’에서 가장 돋보였다. 이 작품은 프레니와 파바로티가 가장 선호하는 레퍼토리였고,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지휘한 둘의 ‘라 보엠’ 음반은 불멸의 명반으로 평가받았다.
이렇게 두 아이는 같은 유모의 젖을 먹고 자란 젖남매에서 세계적인 성악가로 함께 성장했다.

이둘의 관계는 평생 친구로서, 초기에는 성악 라이벌로서 서로 동기부여를 하는 관계였고, 후에는 서로 여러차례 협연하는 등 평생 친구로서 협업하였으며 이성친구로서 또는 연인으로서의 관계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은 없다.

2. 루치아노의 아내, 아두아 베로니 (Adua Veroni)

20세기 중반의 격랑의 시대를 살았던 루치아노 파바로티는 2차 대전이라는 큰 전쟁이 끝나자 숙원이었던 합창단에 들어가 활동을 한다. 파바로티의 아버지는 아마추어 테너였다. 파바로티는 누가보아도 기골이 장대하고 열성적이었다. 피바로티는 교회와 아마추어 합창단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음악가의 길을 반대했다. 너무 험난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아버지의 반대로 체육교사가 되기로 했지만 어머니가 바로 잡아주었다.

전쟁의 상흔으로 이탈리아 국민들은 마음의 치료가 필요했다. 사람들은 오페라극장으로 몰려갔고 오페라 가수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파바로티는 초등학교 보조교사와 보험설계사일을 했다. 오페라에서 꾸준하게 단역이라도 맡겨지자 파바로티는 미련 없이 보험설계사일을 그만두고 성악에만 전념했다.

그의 젖먹이 친구 미렐라 프레니는 일치감치 데뷔해서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었지만 파바로티는 이탈리아북부 작은 극장 오페라의 단역에 만족해야 했다.

그는 낙천적인 성격을 가진 절대미각의 소유자였다. 한 때 180Kg의 체중이 나갈 정도로 건강에 심각한 위기가 왔지만 무대를 꽉 채워주는 테너는 듬직해 보여 인기를 끌었다.
1961년 고향 모데나의 극장에서의 연 ‘라보엠’의 공연으로 성공적인 데뷔를 한다. 이즈음 9월 30일 아두아 베로니(Adua Veroni)와 결혼을 했다.

안정을 얻은 파바로티는 승승장구했다. 단숨에 오페라 세계를 아우르는 테너가수로 도약한다.

아두아는 훗날 회고했다. “나는 그 남자와 사랑에 빠졌고, 그리고 그 남자의 목소리와 사랑에 빠졌다. 루치아노 파바로티의 목소리에 반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두아 베로니의 사진

파바로티와 아두아 베로니는 세 딸을 얻었다. 1962년에 로렌차가, 1964년에 크리스티나가, 1967년에는 막내 줄리아나가 태어났다.

그러나 아두아는 파바로티가 마법을 걸었던 유일한 여성이 아니었다. 파바로티는 음악, 여성, 음식, 축구를 순서대로 사랑한다고 했다. 루치아노는 무수한 바람을 피웠다.

그는 기자들에게 비아그라의 장점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과 함께 섹스에 대한 파바로티의 태도를 자세히 묘사하는 얘기도 했다.
“공연 전이든 후든 상관없다. 가장 좋은 것은 공연 중, 무대 위의 유일한 테이블에서 섹스하는 것일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호색한이었다.

3. 파바로티의 연인이 된 줄리어드 음대생, 마들린 르네

파바로티의 이러한 애정행각은 그칠 줄 몰랐다. 1979년 뉴욕의 명문 줄리어드 음대에서 마스터클래스를 진행하던 중 놀랍고 재능 있는 오페라 가수 마들린 르네(Madelyn Renee, 1955~ )를 만난다.

마들렌 르네의 사진

마들린은 파바로티가 그녀를 가르치는 대가로 그의 비서가 되었고, 둘의 열정이 피어났다.
파바로티의 장난스럽고 뛰어난 유머 감각은 마들린을 반하게 했고, 아주 작은 일에도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는 천진난만한 성격을 가진 파바로티의 매력은 마들린의 가슴을 요동치게 했다.

그리고 파바로티의 비로서로서의 역할을 다했다. 평생 여행가방을 싸본 적이 없는 파바로티지만 성격은 완벽을 추구했다. 하다못해 손수건도 제자리에 있지 않는 걸 용납하지 않았다. 이런 까다로운 그의 성격을 맞추며 마들린은 파바로티의 학생으로서, 비서로서, 멘티로서 그리고 친구로서의 역할을 다했다.

“리사이틀이 열리고 있는 무대 뒤에서 그의 따뜻한 차를 준비하고 들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가 나를 무대 밖으로 끌고 나가 듀엣곡 ‘La Bohème’을 불렀어요.”

“루치아노와 연애를 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어디까지 선을 그어야 할지 판단하기 어려웠어요.”

그가 존경해 마지않는 스승과 연애를 한다는 것은 꿈도 못 꿀일이었는데 갑자기 그녀에게 닥친 일들은 그녀가 감당하기 쉽지 않았다.

마들레과 파바로티의 사진

둘의 관계는 마들린의 부담감과 함께, 유부남인 파바로티의 위치가 있어 머지않아 관계는 끝나고 만다.
마달린은 “우리 둘의 만남은 둘에게 고통스러운 순간”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들은 여러 해 동안 둘의 만남에 대해서 말을 하지 않았다. 아마도 루치아노의 아내 아두아의 심기를 건드리는 게 부담으로 다가왔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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