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흐마니노프의 연인, 나탈리아 사티나

 

라흐마니노프의 연인, 나탈리아 사티나

세르게이 바실리예비치 라흐마니노프(Sergei Vasilievich Rachmaninoff, 1873.4.1~1943.3.28)는 러시아계 미국인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이며, 레코딩 시대의 가장 위대한 피아니스트이기도 하다

라흐마니노프는 오랜 전통을 가진 지역 귀족인 아버지와 부유한 러시아군 장교의 딸사이에서 총 3남 3녀 중 4번째 자식으로 러시아의 스타로루스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지역 귀족이기도 하고 모친이 결혼 시에 상당한 지참금을 가져왔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는 상당히 유복했다.

라흐마니노프는 사실상 낭만주의의 마지막 세대였으며 현대 피아니스트의 정립에 상당히 공헌한 인물이다. 그의 신장은 무려 198cm, 거구이다.

1. 여동생 엘레나와 라흐마니노프

라흐마니노프에게는 여동생 옐레나가 있었는데 그녀는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의 작품을 그에게 소개하는 등 라흐마니노프에게 중요한 음악적 영향을 미쳤고 했다.

그런 그녀가 1885년 18세의 나이에 악성 빈혈로 사망하면서 라흐마니노프는 더 큰 상실감을 겪었다.

이런 마음의 상처에선지 라흐마니노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음악원에 입학하고 나서도 교육을 받았지만 적응하지 못하고 낙제를 거듭하고 있었다.


자식교육문제로 고민을 거듭하던 그의 어머니는 피아니스트 프란츠 리스트의 제자인 조카 알렉산더 실로티와 상의하였다.

알렉산더는 라흐마니노프의 어머니에게 라흐마니노프를 모스크바 음악원으로 옮겨 그의 옛 스승이었던 니콜라이 즈베레프에게 레슨을 받을 것을 권했고 결국 라흐마니노프는 모스크바의 음악원에 입학하게 되어1888년까지 음악원을 다녔다.
모스크바로 온 라흐마니노프는 마땅히 거주할 곳이 없어 고모집에서 살게 된다. 그의 나이 15살 때의 일이다.

2.라흐마니노프의 영원한 사랑 사촌 나탈리아 사티나

고모 바바라의 집에서 살게 된 라흐마니노프는 그때 11살의 사촌 여동생 나탈리아를 만나게 된다.
나탈리아 사티니(Natalia Satina, 1877.5. 26.~1951. 1. 17)는 라흐마니노프의 아버지와 같이 나탈리아의 어머니도 러시아의 오랜 전통의 귀족이었다.


나중 일이지만 나탈리아의 언니 소피아는 러시아의 식물학자로 페니실리움이라는 곰팡이 재배를 연구한 학자로 유명하다.

고모의 집에서 지내게 된 라흐마니노프는 나탈리아와 사랑을 했다. 이때 라흐마니노프의 고모는 모스크바 근교 이바노프카에 별장이 있었는데, 이곳은 라흐마니노프와 나탈리아가 함께 지내며 사랑을 키우기에는 안성맞춤인 장소였다.

라흐마니노프의 연인, 나탈리아 사티나 2

이곳에서 라흐마니노프는 나탈리아와 본격적인 사랑을 키운다. 라흐마니노프가 15살, 나탈리아가 11살 때의 일이다.

그리고 그의 나이 19세가 되던 해에 가족들에게 나탈리아와 결혼하겠다고 발표한다. 집안은 발칵 뒤집어 졌다.

당연히 가족들도 반대를 극심하게 했지만, 당시 근친혼은 러시아 정교회에서는 엄격하게 금지했던 것으로 사회적 종교 관념상 당연히 그들의 결혼은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다. 이 둘의 험난한 사랑의 시작이었다.

가족들은 러시아 정교회법을 근거로 결혼을 끝까지 반대한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라흐마니노프는 교회에 결혼의 허락을 신청하였으나 거절 당하게 만다.

시간은 흘러 둘이 만난 지 9년째인 24살 때에 라흐마니노프가 1897년에 교향곡 1번을 발표했지만, 평단의 엄청난 비난세례를 받으며 개인적으로도 음악적으로도 충격에 빠진다.

3. 어렵게 얻어낸 결혼 승낙


좌절한 라흐마니노프는 창작의욕도 없어지고 심한 우울증과 엄청난 슬럼프에 빠져 지내게 된다.

이를 지켜보는 라흐마니노프의 고모, 바바라는 사위로서의 조카는 싫었지만 천재적 음악재능을 보이는 라흐마니노프를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한다.


친구인 러시아 공주 알렉산드리아 레빈에게 부탁해 유명작가인 톨스토이에게 라흐마니노프를 소개하여 음악을 선 보이기도 하고 유명한 정신과 의사에게 보내 우울증을 치료 받게 한다.

이런 바바라의 아낌없는 노력에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치료는 성공적으로 끝났고, 드디어 1901년 4월에는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완성한다.


나름 음악적 소양을 갖추고 있었던 고모 바바라는 이 협주곡을 듣고 반했다. 그리고 그동안 반대했던 결혼을 1901년 9월에 허락한다. 라흐마니노프와 나탈리아의 결혼 선언 약 9년 만이다.

그러나 바바라와 집안은 결혼은 허락했지만 교회의 승낙이 없어 결혼을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한번 내친걸음이라 멈출 수 없었던 고모 바바라는 교회의 승낙을 위하여 할수 있는 온갖 있는 노력을 다하였다.

당시 러시아 정교회, 즉 교회의 수장은 차르(황제)였다. 그러나 차르는 명예적 수장으로서 교회의 일은 관여치 않았다.


그러나 차르는 측근 귀족인 바바라의 간곡한 부탁 때문에 예외적으로 라흐마니노프의 결혼을 허락한다.
대신 사람의 시선을 피할 수 있고, 교회의 거센 반발을 막을 수도 있는 군부대 내 막사의 예배당에서 결혼식을 하게 하는 조건이었다.

4. 우여곡절 끝에 결혼에 성공한 라흐마니노프와 나탈리아

이렇게 라흐마니노프와 나탈리 사티나는 우여와 곡절 끝에 결혼하게 된다.
그들은 귀족집안답게 이바노프카의 저택에 있는 두 집 중 작은 집을 선물로 받고 3개월 간의 유럽 일주 신혼여행을 떠났다.

둘은 귀국하자마자, 모스크바에 정착했고, 그곳에서 라흐마니노프는 성 캐서린 여자 대학과 엘리자베스 연구소에서 음악 교사로 일하기 시작했다.


나탈리아와의 결혼으로 행복에 겨운 라흐마니노프는 1903년 2월까지 당시 그의 경력에서 가장 큰 피아노 작곡인 ‘쇼팽 주제에 의한 변주곡'(Op. 22)을 완성했다.

1903년 5월 14일, 부부의 첫 딸 이리나 세르게예브나가 태어났다.

라흐마니노프는러시아의 정치적 혼란에 점점 더 불만을 품고 작곡을 할 수 있도록 활발한 사회생활에서 은둔할 필요가 있었다.

1906년 11월 가족과 함께 모스크바를 떠나 독일 드레스덴으로 향했다. 그들은 1909년까지 그곳에 머물렀고, 이바노프카에서 여름휴가를 보내기 위해 러시아로 돌아왔다.

5. 러시아 혁명과 미국 망명

1917년에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 러시아 제국이 무너지고, 러시아가 공산화되자 노르웨이로 갔다가 1918년 미국으로 망명한다.

미국에서 1928년 블라디미르 호로비츠를 만나 이후 평생 음악적 동료이자 친구로 지냈다.

라흐마니노프는 남은 인생의 대부분을 순회 연주자로서 큰 어려움 없이 재정적으로 안정을 찾았고, 가족은 하인, 요리사, 운전사와 함께 중상류층의 삶을 살았다

미국으로 망명한 이후 소련 정부와 그와의 관계는 대체로 나빴지만 그래도 조국이라는 생각은 있었는지 말년에 독소전쟁이 터지자 소련군을 돕기 위한 콘서트를 열어 그 수익금을 소련에 기부하기도 했다.

그리고 소련 당국의 요청으로 귀국을 고려하였던 듯하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1943년 2월 1일 라흐마니노프와 그의 아내 나탈리아는 뉴욕시에서 미국 시민권을 획득하고 미국시민이 되었다.

라흐마니노프의 연인, 나탈리아 사티나 3

그때 공격적인 형태의 흑색종 진단을 받았는데 라흐마니노프는 손이 매우 컸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큰 손은 마르팡 증후군 때문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1943년 3월 마지막 주에 흐마니노프의 건강은 급격히 악화되었다. 그는 식욕을 잃었고, 팔과 옆구리에 지속적인 통증을 느꼈으며, 숨쉬기가 점점 더 어려워졌다.

3월 26일, 그는 의식을 잃었고 이틀 후, 70세 생일을 나흘 앞두고 사망했다. 결국 1943년 3월 28일에 미국 베벌리힐스에서 흑색종으로 사망하였다.

라흐마니노프와 나탈리아는 결혼 이후 평생 큰 굴곡 없이 잘 지냈으며 나탈리아는 특별한 사회활동 없이 라흐마니노프의 일정에 따라서 내조했고 최선을 다하였다.

처음 시작에는 난관이 따랐지만 이후 그들은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다.


6. 여류작가 마리에타 샤기난

라흐마니노프에게 있어 평생 여인은 나탈리아였다. 그러나 5년간 편지를 왕래한 여류작가가 있는데 그는 마리에타 샤기난( Marietta Sergeevna Shaginyan, 1888.4.2~1982.3.20)이라는 작가였다.

샤기난은 아르메니아 출신의 소련 작가, 역사가, 시인이다. 풍자-환상 소설을 실험한 공산주의 작가 중 한 명이다.

1912년 2월, 샤기냔은 작곡가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에게 편지를 써서 “Re”라고 써서 첫 편지를 보냈다. 라흐마니노프는 그녀에게 노래로 만들 수 있는 시를 제안해 달라고 요청했다.

라흐마니노프는 1917년 러시아혁명으로 러시아를 떠나 노르웨이로 간 후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으며, 그때부터 그들의 서신 왕래는 중단되었다.

라흐마니노프가 사망한 후, 시인 마리에타 샤기냔은 15통의 편지를 출간했다. 그들의 관계의 본질은 낭만주의에 가까웠지만 주로 지적이고 감정적이었다.

샤기냔과 그녀가 라흐마니노프와 나눈 시는 라흐마니노프의 여섯 곡, Op. 38에 영감을 준 것으로 샤기난에 의해 주장되어졌다.

라흐마니노프의 연인, 나탈리아 사티나 4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을 관통하는 주제에는 크게 종교(종소리)와 우울증(죽음), 그리고 조국 러시아가 있다.

그 기저에는 음악적 좌절에서 오는 우울증과 그의 평생의 사랑,나탈리와의 애타게 기다려 온 결혼까지의 과정등에서 오는 우울증, 좌절감이 음악에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조국 러시아의 혁명발생으로 미국으로 망명하였지만 조국 러시아에 대한 사랑 등이 관통하는 주제로 쓰였다.

어쨌든 라흐마니노프는 생애 전반과 사후 몇십 년간 끊임없이 비판과 저평가를 받은 인물이다.

라흐마니노프가 세계적으로 유명하지 않은 작곡가는 아니지만, 유독 우리나라에서는 대단히 인기 있는 작곡가다. 세계적으로 라흐마니노프의 연주가 이루어지는 횟수를 비교해 봤을 때도 한국에서 연주 빈도가 상당히 높은 편이다.


형식과 전개가 훌륭한 곡보다는 멜로디 자체를 감정적으로 즐기는 우리나라 음악팬들의 취향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부분은 형식과 구조적 완성도가 훌륭한 작곡가 차이콥스키의 선율이 우리나라에서 인기가 많은 것과도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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