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로 파가니니의 연인, 안토니오 비안키

니콜로 파가니니의 연인, 안토니오 비안키

니콜로 파가니니(Niccolò Paganini, 1782년 10월 27일 ~ 1840년 5월 27일)는 이탈리아 제노바 출생의 작곡가이자 바이올리니스트로,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로 불린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독특하고 감동적인 스타일과 높은 기술적 능력으로 바이올린 기술을 완벽하게 마스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파가니니는 매력적인 외모와 독특한 매력을 지닌 인물로, 평생에 유부녀로 추측되는 안토니아 비안키라는 한 여성과의 로맨스가 있다. 나중에 다른 여성들과 로맨스를 가졌다는 소문도 있지만 명확하지는 않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안토니아와의 관계에 중점을 두고 살펴보겠다. 핸리에트 손태그라는 가수와 파가니니와 함께 있는 초상화가 있지만 파기니니와의 로맨스가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1.파가니니의 유일한 여인, 안토니아 비안키

파가니니는 1813년 밀라노에서 만난 코모 출신의 가수 안토니아 비안키(Antonia Bianchi)와 진지하게 사귀기 시작했던 것으로 기록에 남아있다. 그러나 둘은 관계에 대해서 알려진 것은 거의 없으며, 둘은 이탈리아 전역에서 함께 콘서트를 함께 했고 1825년에는 팔레르모에서 아들 아킬레(Achille Ciro Alessandro)를 낳았다. 그러나 그들의 관계는 합법적인 관계가 아니었다. 기록에는 없지만 안토니아는 유부녀이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추측되며, 이들은 비록 합법적이진 않았지만 약 12년 동안 관계가 지속되었다.

파가니니와 손태그의 초상화

하지만 이들의 관계는 1828년에 끝났는데, 아이인 아킬레가 5세일 때의 일이다
파가니니는 아들 아킬레를 극진히 아끼고 사랑했다. 그는 콘서트투어에 아킬레를 동행자로 데리고 유럽을 여행하며, 자랑스럽게 모두에게 소개하며 자랑했다.

파가니니의 이와 같이 아킬레를 극도로 아끼는 모습이 여러 이야기에 나타나는데, 연주 여행할 때는 항상 아킬레를 동행시키며 호텔이 아닌 펜션에서 숙박하였다고 합니다. 이는 어린 아킬레에게 편안한 분위기를 주기 위함이었다.

그는 아킬레가 자유롭고 풍족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엄마의 부재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자주 표현했다. 또한, 파가니니는 아킬레에게 상당한 재산을 남겨주었다. 그는 사망 이후 아킬레가 혼자 남게 될 사후 준비와 재산 상속에도 철저한 준비를 하여, 아킬레가 평생을 풍족하게 살 수 있도록 했다

파가니니는 아킬레가 귀족이 될 수 있도록 귀족 팬들에게 부탁도 많이 했다. 이를 통해 아킬레가 귀족 작위와 영지를 얻을 수 있도록 노력했으며, 결국 그의 노력으로 아킬레는 커서 귀족이 되어 남작 작위와 더불어 영지도 하사 받았다.
아킬레는 이러한 아버지의 배려와 사랑에 큰 존경심을 갖고 살았다.

1836년에 파리로 돌아온 파가니니는 카지노 설립을 시도했다. 하지만 이 사업은 곧바로 실패하여 파가니니는 재정적인 어려움에 처했다. 손실을 메우기 위해 악기를 포함한 개인 재산을 경매에 내놓으려 한 것이 궁여지책에 불과했다. 불행도 한꺼번에 온다고 건강도 나빠지기 시작했다. 1838년 크리스마스에는 파리를 떠나 몸과 마음을 편하게 하기 위해 니스로 여행을 갔지만, 건강은 더욱 악화되었다. 1840년 5월에는 니스 주교가 파가니니에게 신부를 보내 마지막 미사의식을 거행하도록 지시했으나 파가니니는 여전히 건강이 좋다고 주장하며 거절했다.

그러나 일주일 후인 1840년 5월 27일, 57세인 파가니니는 신부가 도착하기도 전에 내출혈로 사망했다. 그리고 악마와 관련돼 있다는 소문으로 인해 교회는 그의 시신을 가톨릭 성당에 매장하지 않을 결정을 내렸다. 이전에 파가니니가 악마와 관련돼 있다는 말을 하게 된 것이 빌미가 되어 성당에 매장되는 것을 거절한 것이었다. 그러나 파가니니는 아들인 아킬레에게 성당에 묻혀지기를 바라는 부탁을 했다.

2.파가니니의 죽음과 아들 아킬레의 장례 노력

아킬레는 아버지 파가니니의 장례식을 성공적으로 진행한 유일한 자식으로서, 아버지가 원했던 대로 죽으면 고향 성당 무덤에 묻어달라는 부탁을 평생 동안 엄격하게 지키기로 다짐했다. 이를 이행하지 못할 경우 후손들에게 이 유언을 계승해 계속 지켜야 한다고 결심했다.
이 결심은 아킬레가 1886년에 아버지의 부탁을 이루어주게 되기까지 46년이 지난 후에 이루어졌다. 아킬레는 이렇게 아버지의 사후 소원을 이루었으며, 70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는 아킬레가 대부분의 삶을 아버지가 원하던 무덤에 묻는 것에 헌신한 결심을 의미한다.

파가니니의 여인 안토니아 비안키와의 연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거의 없다. 다만 그녀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아킬레에 대해 파가니니는 아낌없는 사랑을 했고 아들은 그에 보답했다.

파가니니는 1840년 5월 27일, 그의 나이 58세에 세상을 떠났다.
사망 원인은 류머티즘인데, 류머티즘은 관절과 근육을 통해 발생하는 만성 염증성 질환으로, 파가니니가 연주와 음악 활동으로 인해 신체적 스트레스를 겪어왔다고 여겨지기에 매우 신뢰성이 높다.

파가니니의 공연을 광고하는 게시판

파가니니는 죽기 직전까지 음악에 대한 열정을 유지하며 활동적이었다. 그는 최종 공연까지 자신의 예술을 추구하고 음악 세계에 큰 영향을 끼치려고 노력했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파가니니는 심오한 연주 기술과 뛰어난 바이올린 연주로 유명했다. 그의 연주 스타일은 혁신적인 기술과 관통력 있는 솔로 작품을 통해 전통적인 바이올린 연주 방법을 뛰어넘었으며, 그는 압도적인 손의 움직임, 속도, 정확도, 그리고 극도의 능력으로 연주자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그중에서도 자신이 작곡하였으며 각각 다른 난이도와 기술을 담은”24개의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카프리스”로 알려진 작품이 파가니니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많은 사람들은 연주에 몰두하는 그의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 이는 그의 음악적 능력이 외모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졌음을 보여주었다. “악마의 연주”라는 표현은 주로 두 음악가, 파가니니와 프란츠 리스트에게 쓰였는데, 이 둘은 각각 바이올린과 피아노에서 독특하고 감동적인 스타일과 뛰어난 기술을 선보여 이 같은 별명을 얻었다.
앞서 언급한 대로 파가니니는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압도적인 기술, 속도, 정확도로 유명했으며,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라 불렸다.

이 ‘악마이야기’는 파가니니의 유명한 에피소드 중 하나인데, 어떤 기자가 파가니니에게 “당신의 매혹적인 연주의 비밀은 무엇인가?”라고 물었고, 파가니니는 같은 질문에 지쳐 있는 상태라서 “악마가 연주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 기사는 나중에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퍼져나가며 악마와의 영혼 교환에 관한 이야기로 알려졌다.
파가니니는 이 기사로 인해 많은 오해와 어려움을 겪었지만, 이 유명한 소문은 파가니니의 음악적 열정과 재능을 강조하며 그의 연주를 신비롭고 환상적으로 만드는데 일조했다.

3.니콜로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파가니니는 여러 대의 바이올린을 보유하고 있었고, 그중 몇 개는 오늘날에도 보존되고 있다. 가장 유명한 바이올린은 “카노니카” 또는 “파가니니 카노니카”로 알려져 있는 악기이다.

이 바이올린은 유명한 이탈리아 제작자 지우세페 구아르네리(Giuseppe Guarneri)에 의해 1743년에 만들어졌으며, 파가니니가 평생 동안 사용한 주요 악기로 알려져 있다.

파가니니의 바이롤린 사진

현재 “파가니니 카노니카”는 크레모나에 위치한 스트라디바리 박물관에 소중히 보존되고 있다. 이 박물관에는 세계적인 바이올린 제작자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와 다른 유명한 제작자들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으며, 역사적인 악기들도 소장하고 있다.

파가니니는 이외에도 다른 여러 개의 바이올린을 소유했었다.
“스트라디바리우스 델 제수”(Stradivarius Del Gesù)와 “스트라디바리우스 메시아”(Stradivarius Mesías)가 있으며, 현재 이러한 악기들이 다양한 수집가나 연주자들에 의해 주의 깊게 보관되거나 연주되고 있다고 추측된다. 파가니니가 연주했던 바이올린은 그 존재 자체가 예술적 가치와 역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4. 현재까지 파가니니가 살아있다면?

만약 파가니니가 지금까지 살았다면, 그는 그의 독특한 연주 스타일과 창의성을 기반으로 다양한 음악을 연주했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그의 재능과 열정이 다양한 음악 장르와 스타일에 적용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먼저, 파가니니는 주로 클래식 음악에서 활동하며 독주 바이올린 작품에서 탁월한 기술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주로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과 같은 작곡가들의 작품을 선호하며 많은 곡을 연주했을 것이며 이는 파가니니의 뛰어난 연주기술과 표현력을 결합한 공연으로 더욱 빛났을 것이다.

그의 연주를 볼 수 없음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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