끌로드 드뷔시의 연인(3/3), 엠마 바르닥
끌로드 드뷔시(Claude Debussy, 1862-1918)는 프랑스 태생의 작곡가이며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으로 러시아 음악과 동양 음악의 활용하며, 본인만의 음악을 추구한 혁신적인 음악가이다.
음악적으로는 높이 평가를 받지만, 이성관계에 있어서 만큼은 아주 개차반으로 평가받는 못된 난봉꾼이었다.
잘 생기지는 않았지만 귀공자풍의 외모로 묘한 매력을 갖고 있었던 드뷔시의 주위에는 항상 많은 여인들이 있었다.
1편에서 살펴본 유부녀 마리 바스니에부인과 젊은 갸비 뒤퐁과의 만남, 2편에서는 갸비 뒤퐁의 친구릴리 텍시에와의 연애사를 들여다보았다. 이번 편에서는 바람꾼 바그너보다 한수 위의 난봉꾼 드뷔시의 마지막 연인, 유부녀였던 엠마 바르닥 부인과의 사랑이야기와 자포니즘 음악 <바다>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1. 드뷔시와 은행가의 아내 엠마 바르닥과의 만남
릴리의 가슴에 총알을 박고 홀로 잘 나간다면 세상을 공평하지 않다. 드뷔시는 대중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어쩔 수 없이 은둔지로 잠적해서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져야 했다.
이런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진 대신 그에겐 또 다른 창작 열정이 되살아난다. 만남, 결별, 자살의 사이클이 반복되는 중에 완성된 작품이 그의 대표작 <바다>다. 드뷔시의 관현악곡 <바다>는 바로 그런 시기에 태어났다. <바다>이야기는 잠시후에 살펴본다.
엠마 바르닥( Emma Bardac, 1862~1934)은 프랑스의 가수이자 부유한 은행가의 아내였으며 가브리엘 포레와는 연인사이였다.

유태인 혈통의 엠마는 17세에 파리의 은행가 지기스몽 바르닥(Sigismond Bardac)과 결혼하여, 이미 두 자녀를 두었다. 그리고 포레의 연인이었다. 드뷔시만큼 이성에 대한 편력이 대단한 여성이었다.
포레와의 불륜 이후, 엠마는 1903년 말 드뷔시의 제자 중 한 명인 아들 라울을 통해 드뷔시를 소개받았다.
그녀는 음악에도 탁월한 재능을 보였는데, 종종 자신의 집으로 음악가나 작가 등을 초청해 파티를 열기도 했고, 19세기 초 살롱 음악회 같은 모임도 자주 열었다.
드뷔시는 치정(癡情)의 열풍에 휩싸인 상태에서도 음악가로서의 명성이 점차 확고해지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고, <바다>를 완성하던 1905년에 엠마와의 사이에서 딸 슈슈(Chouchou)를 얻었다.
바르닥은 결국 1908년 드뷔시와 결혼했고, 그들의 험난한 결합은 10년 후 드뷔시가 사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드뷔시는 당시 애정의 격랑 속에서도 침몰하지 않았던 행운아였을 뿐 아니라 어느덧 40대에 접어든 그의 창작적 에너지는 절정을 맞고 있었다.
위와 같이 자살사건에 은둔생활까지 많은 대가를 치르고 바르닥과 맺어졌지만 둘의 결혼 생활은 생각했던 만큼 행복하지 않았다.
나중에 드뷔시는 진정으로 사랑한 여자는 딸인 슈슈뿐이라는 말까지 한 걸 보면 이성 간의 사랑보다 핏줄이 끌리는 자식만이 그에게 지속적인 사랑의 감정을 이끌어냈던 것으로 보인다.
드뷔시는 그의 딸 슈슈에게 보인 애정은 각별했다. 슈슈를 위해 <어린이의 세계>이라는 여섯 개의 소품곡을 남겼을 정도다.

이 곡을 들으면 ‘이렇게 순수하고 사랑스러운 음악을 작곡한 사람과 엉망진창 난봉꾼이 동일 인물이라니!’하고 경악하고 말 것이다.
엠마는 이미 두 딸의 어머니였는데, 릴리와 헤어지고 엠마와 결혼한 드뷔시는 또 외도를 반복했다.
계속되는 드뷔시의 애정행각과 반복되는 거짓말, 그리고 배신에 상처받은 엠마는 드뷔시와 결국 이혼소송을 하게 된다.
당시 재판부는 상당한 금액의 위자료와 생활비를 엠마에게 지급하라는 판결을 드뷔시에게 내렸다.
이러한 법원의 판결에도 불구하고 드뷔시는 엠마에게 돈을 보내지 않았을 만큼 드뷔시는 뻔뻔했다.
2. 이성에 대한 드뷔시의 못된 연애 본성
드뷔시 때문에 두 명의 여성이 자살을 시도한 것은 단지 그의 바람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는 여자와 깨끗하게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여성에 미련이라도 있는 듯 끈질기게 늘어지는 드뷔시의 연애 수법 때문이었다.
바람도 모자라 상대 여성을 미치게 만드는 것, 자살을 시도한 두 명의 여성은 드뷔시를 사랑해서 죽음을 택한 것이 아니라 점점 미쳐가는 본인의 비참한 모습 때문에 죽음을 선택한 것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클로드 드뷔시는 파리 근교의 생 제르망 레이(St Germain Laye)에서 태어났다. 양친은 도기상(陶器商)을 경영했고 클로드는 맏아들로 남녀 4명의 동생이 있었다.
생활은 넉넉하지 않았으며 우연히 시인 베를렌(Verlaine)의 의모(義母)가 되는 모테(Mauté) 부인에게 음악의 재능을 인정받은 것이 그가 음악가가 되는 계기였다.

아마추어이면서도 뛰어난 피아니스트였던 모테는 무상으로 레슨을 맡았으며, 1872년(10세)에는 파리 음악원에 입학이 허가되는데 이 계기로 클로드의 관심은 피아노에서 작곡으로 옮겨 갔다.
알려져 있다시피 드뷔시의 청년기는 무척 곤궁했다. ‘아르 누보’(새로운 예술)를 지향했던 당시 파리의 예술가들은 너나없이 그랬으며 보헤미안적 삶을 동경했던 그들에게 예술을 향한 열정과 궁핍은 동전의 양면을 이뤘고, 더불어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낭만적 연애였을 것이다.
남녀상열지사는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 입방아에 오르내리기 좋은 소재였을 뿐 아니라, 당시의 드뷔시가 어느덧 주목받는 음악가의 반열에 올랐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드뷔시의 정도가 지나친 여성편력은 파리 뒷골목을 함께 누볐던 과거의 동료들, 여전히 ‘보헤미안’의 삶을 살고 있던 에릭 사티와 같은 친구들조차도 드뷔시를 손가락질했다.
드뷔시가 여성들한테 인기 있었던 이유는 뭘까? 패션에 민감한 멋쟁이 신사?” 귀공자풍 외모?
프랑스풍의 신비로운 음색과 변화무쌍한 화음이 많은 여성들의 가슴을 울린 것이 아닐까? 바그너도 많은 여성을 울렸다고 하는데 드뷔시가 바그너보다 한 수 위인 데다 비인간적 행위도 서슴지 않았으니 여성과의 관계에서 만큼은 더더욱 손가락질을 많이 받은 음악가이다.
이렇게 바람둥이로 알려진 드뷔시의 여성들과 많은 관계와 만남은 자신만의 예술적인 세계를 탐구하고 독창적인 작품을 창작하는 데 큰 영감과 자극이 되었을까?
어쨌든 음악가로서 드뷔시는 창조성과 혁신성이 뛰어난 음악가로서 후대에 큰 영향을 주었다. 위의 많은 드뷔시의 여성들은 드뷔시의 육체적 연인관계와 더불어 드뷔시의 끊임없는 창작열정의 유입과 배출의 역할을 함께하며 음악과 교향시를 통해 그의 음악을 성장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그런 그의 연인들의 희생(?) 위에 그의 음악은 많은 사랑과 찬사를 받으며 오늘날까지도 많이 연주되고 즐겨 들어지고 있다.
3. 클로드 드뷔시의 동양풍의 작품 <바다>
일본의 화가 가츠시카 호쿠사이(葛飾北齋,1760~1849)의 채색목판화 <카나가와의 큰 파도>는 아주 유명한 그림이다.

가츠시카는 후지산의 모습을 원경(遠景)으로 바라봤다. 바로 눈앞에서는 집채만한 파도가 사납게 으르렁대고 두 척의 배가 풍랑에 휩쓸려 흔들리고 있다.
그리고 멀리에서, 머리에 흰 눈을 얹은 후지산이 그 모든 상황을 점잖게 지켜보고 있다. 마치 파도 위에 요연하게 떠 있는 한 조각 섬 같다.
어쨌든, 이 우키요에, 혹은 니시키에는 일본의 전통문화에서 중요한 위상을 갖고 있다. 19세기에 유럽에까지 알려지며 큰 인기를 끌었고, 오늘날 일본의 애니메이션에서도 우키요에 스타일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다.
19세기 후반의 유럽, 특히 프랑스에는 마침내 ‘일류’(日流, Japonisme)라고 부를 만한 이국풍의 문화애호 바람이 불어 닥쳤고 그 중심에 가츠시카의 우키요에가, 특히 <가나가와의 큰 파도>는 당시의 일류를 대변하는 그림이었다고 할 수 있다.
프랑스의 작곡가 클로드 드뷔시도 어느 날 이 그림과 대면했다. 이 인상적인 채색목판화는 드뷔시의 교향적 스케치 <바다>(La Mer)의 모티브 가운데 하나였다.
19세기가 끝나갈 즈음 파리의 만국박람회에서 처음 접했던 이국풍(異國風)이 마침내 드뷔시의 음악 속으로 상륙했던 것이다.
<바다>의 작곡 연도는 1903년부터 1905년까지이다. 가츠시카의 판화 <카나가와의 큰 파도’>처럼 드뷔시의 삶에서도 격랑이 일었던 시기이다. 릴리, 엠마, 그리고 그의 딸 슈슈의 태어남.
생상스가 독일의 음악을 기반으로 음악 창작을 발전시킨 인물이라면, <달빛>,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 그리고 자포니즘의 동양풍 <바다>를 통해 그의 타고난 음악적 재능을 바탕으로 그만의 독특하고 독자적인 음악 세계를 만든 불세출의 훌륭한 음악가였다.
그러나 음악적 작품의 호평에 비해, 그가 그의 여인들에게 보여준 비인간적인 행태들은 예술의 세계와는 관계없이 여러 사람의 손가락질을 받았고 그의 음악작품과 달리 평가되고 있다.
드뷔시는 1917년 9월 14일 마지막 연주회를 열었고 1918년 초에 병상에 누웠다. 제1차 세계대전은 여전히 한창 진행 중이었고 파리는 독일군의 공중 폭격과 포격을 받고 있었다.
드뷔시는 1918년 3월 25일 자택에서 사망했다. 엠마와 드뷔시의 딸 슈슈는 디프테리아에서 회복하던 중 1919년 의사의 잘못된 치료로 사망했다.
엠마는 1934년에 사망했으며 그녀의 딸 슈슈와 드뷔시와 함께 파리의 파시 공동묘지에 묻혔다.




